제259화
스릉-
채쟁-!
“웬 놈이냐!”
대주 응손기(應巽基)를 중심으로 곳곳에서 무인들의 검이 튀어나왔다. 난데없이 수풀 속에서 사람이 튀어나왔으니 놀라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유일하게 공손우경만이 항복의 표시로 양손을 들며 실실 웃었다. 보름간 제대로 씻지도 못한 꾀죄죄한 꼴이었기에 그 모습은 실로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미친놈인가?’
하나 그러한 생각도 잠시.
대주라 불린 그는 곧 얼마 전 세간에 떠돌던 소문을 기억해 냈다. 혈교와의 전쟁 속에서 늙은 꼽추 한 명이 진천후의 시신과 함께 사라졌다는 소문을 말이다.
그러자 곧 응손기의 눈에 음흉함이 서렸다.
자체적으로 어마어마한 상금이 걸린 자가 홀로 눈앞에 나타났다.
이야말로 어마어마한 사냥감이 아닌가?
입에 절로 군침이 도는 듯했다.
그런 응손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공손우경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내 가만히 듣자 하니 대혈사련의 동지들이신 것 같은데…… 맞소이까?”
“내가 그걸 왜 네깟 놈한테 말을 해야 하지?”
“이 내가 혈사련에 몸을 담고 싶어서 말이오.”
“큭큭…… 크하하하! 얘들아. 저놈이 대체 지금 무슨 정신 나간 소리를 지껄이는 게냐?”
그렇게 다들 배꼽을 잡으며 웃음 짓던 그때.
타닥!
척.
카가강!
순식간에 그들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어느새 공손우경의 주변으로 귀마병이 빼곡히 둘러싼 것이다. 사람의 모습을 했지만 눈동자가 텅 빈 채로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귀마병의 모습은 처음 보는 이라면 누구나 다 기겁할 만했다.
더구나 공손우경을 향했던 검날은 전부 다 휘거나 잘려 있었다. 그들을 향해 내려친 검 역시 깡 소리를 내며 힘없이 구부러졌다.
“저…… 저건 뭐야?”
몹시 당황한 듯 보이는 응손기의 안면에 공손우경이 친절히 웃으며 답했다.
기괴할 정도로 삐뚤어진 누런 이를 드러내며 말이다.
“나는 그저 내 늙은 한 몸 죽기 전까지 사파에 충(忠)을 다해 담고 싶을 뿐. 날 순순히 혈사련에 데려다만 준다면 그대를 귀찮게는 하지 않겠소이다. 날 잘만 안내해 준다면야 오히려 이 행렬을 든든히 지켜 줄 수도 있지. 흘흘.”
공손우경의 눈이 기괴하게 빛났다.
* * *
우글우글.
낙월추가 흑야를 이끌고 도착한 곳은 제법 시끌벅적했다.
당장 오늘부터 혈사련의 새 결사를 다지는 자리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해서 이를 자축하기 위해 화려한 연회가 시작된 것이다.
앞으로 약 칠 주야 동안 벌어질 이 허례의식(虛禮儀式)은 마치 문파의 개파식(開派式)처럼 만천하에 알려질 터였다.
그래서인지 이 연회에는 제법 많은 중소 상가 가주들도 함께였다. 산서성뿐만 아니라 하북성과 하남성에서도 부랴부랴 소식을 듣고 온 듯했다.
이번 혈교와의 전쟁에서 무림맹에 대한 신의를 저버린 자들이 많은 탓이다.
물론 개중에도 힘으로 밀려 울며 겨자 먹기로 들어온 이들도 많았지만 그뿐이다.
결국 무력이건 자발적이건 약자는 강자의 밑으로 들어가기 마련이니.
그중에 단연 우세한 상가는 바로 태원상가였다.
전 가주 오사달이 죽고 이제는 그 자리를 오사총이 지키고 떳떳하게 있었다. 얼마 전부터 수상한 움직임을 보여 오던 오사총이 결국 제 발로 혈사련과 손을 잡은 것이다.
온몸에 비곗덩어리를 둘러싼 그는 연신 손뼉을 치며 살에 파묻힌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사방이 온통 파리로 들끓는군.’
낙월추는 주변에 달라붙은 상가 인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먹음직한 먹이가 있는 곳에 파리가 들끓는 건 당연지사.
힘이 있는 자에게 미리 잘 보여 다들 한 자리씩 꿰차려 열심히 손을 비비는 모습은 낙월추에겐 참으로 역겹게 느껴졌다.
으득.
‘저런 자들이 힘없는 이들을 쥐어짜고, 훗날 탐관오리를 만들어 또다시 힘없는 이들을 쥐어짜 죽이겠지.’
하나 그가 이번에 맡은 명은 저들의 중심에 있는 혈사련과 손을 잡고 저들이 세력을 키우는 데 일조하는 것이 되리라.
치가 떨려 왔지만, 결국 이 또한 명이니 복종할 수밖에.
간신히 감정을 억누르고 있던 그때, 단상 위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정무봉의 아버지이자 맹호궁의 궁주, 정구살이었다.
이번에도 큰 이변 없이 혈사련의 네 기둥 중 가장 큰 힘을 지닌 맹호궁이 련주 자리를 꿰찬 것이다.
끝이 좋지 않았지만 다시 힘을 합치자는 취지인 만큼 오랜만에 모인 정구살과 추운방, 그리고 냉공소는 나름 침착함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정구살은 새하얗게 센 머리가 무색할 만큼 아직 정정했다. 때문에 정무봉 역시 자리를 물려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의 낮고 굵직한 음성은 작았지만 내공이 담겨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그의 말은 반 경어체였다.
“오늘이야말로 드디어 우리 혈사련이 다시 하나가 되는 역사적인 자리요. 벌써 이십 년이 흐른 이야기지.”
짝짝짝짝-!
단 한마디를 말했을 뿐인데 곧 너 나 할 것 없이 곳곳에서 박수 소리가 크게 터져 나왔다.
“경하드립니다! 련주님! 참으로 좋은 날입니다. 흐흐.”
“경하드립니다! 련주님!”
그 말을 시작으로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고 있던 그때.
여전히 다리를 꼰 채로 몸을 옆으로 기울이고 있던 곽태보의 옆구리를 뒤에서 누군가 꾹 찔렀다.
냉가혜가 보다 못해 그의 태도를 나무란 것이다.
명색이 정식으로 혈사련의 체면 세우는 자리인데, 예의를 차리라는 뜻이리라.
더군다나 그는 정무봉과 추일공.
그리고 냉가혜와 곽태보 네 사람 중 가장 나이가 어리면서도 유일하게 가문을 이끌고 있는 문주다.
일찍이 대를 이어야 했던 곽태보의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고, 문주였던 곽필 역시 몇 해 전 명을 다했으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더욱더 위엄을 세워야 한다.
말은 없었지만 이는 충분히 전달이 되어 왔다.
곽태보가 능글맞게 웃으며 냉가혜에게 답했다.
“아아, 알겠습니다. 누님.”
곽태보가 말을 하건 말건 냉가혜의 눈은 앞을 향한 채로 답이 없었다.
‘역시 재미있는 여인이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곽태보가 씨익 웃어넘긴다.
“이 어찌 우리만 축하할 일이겠는가? 우리를 믿고 따라 주는 자네들이 있으니 든든하군.”
“저희 역시 앞날을 잘 부탁드립니다. 련주님!”
정구살의 발언이 끝나기 무섭게 본격적으로 서로의 축사가 오가기 시작했고, 찌푸려졌던 낙월추의 표정은 순식간에 원상태로 돌아왔다.
작금엔 그런 것을 일일이 따질 시간 따윈 없었으니.
그의 눈이 노련한 사냥개처럼 주변을 살폈다.
날은 오늘이 최적이다.
끼어들 만한 적절한 시점을 재고 있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구살의 발언이 모두 끝이 나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연회가 시작되었다.
“……어찌할까요.”
“조금 더 기다리도록 하지. 저녁 연회가 끝나고 저들이 잠시 쉬는 시간을 노릴 것이다.”
낙월추가 돌아섰다.
“알겠습니다. 대주님.”
* * *
아침 댓바람부터 시작된 연회에 이미 다들 벌겋게 취기가 오를 시각.
하루 종일 상가의 가주들에게 시달린 정무봉, 추일공, 곽태보, 그리고 냉가혜가 건물의 안쪽으로 들어섰다.
오늘 따로 보여 드릴 이가 있다고 해서 일부러 시간을 내서 온 것이다.
곽태보는 본디라면 정구살 등과 함께 있어야 했지만, 나이가 나이다 보니 이 자리가 더 편한 듯했다.
“인간들 더럽게 많군.”
“이제 겨우 첫날인데 앞으로 육 주야는 더 이 짓거리를 해야 되는 건가?”
“귀찮더라도 어쩔 수 없는 부분 아닌가.”
정무봉과 추일공이 투덜대자 곽태보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받아쳤다. 평소 정무봉이라면 재수 없다며 욕이라도 퍼부었을 테지만, 당금은 그러한 것조차 귀찮았다.
“내가 지금 그걸 몰라서 이러는 줄 아느냐? 정말 네놈은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구나. 막내 동생뻘도 안 되는 녀석이…… 쯧.”
“그런 나는 문주고, 그쪽은 아직까지 소궁주지.”
“저, 저놈이……!”
정무봉이 곽태보를 향해 손을 날리려는 순간이었다.
스슥-
“장난은 거기까지다.”
누군가가 그들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놈! 누구냐!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맹호궁, 소궁주 정무봉. 그리고 넌 칠성파의 추일공이고…… 네가 천검문 문주 곽태보일 테지. 마지막으로 유일한 홍일점 철혈냉가의 냉가혜. 맞나?”
“대체 누구기에 우리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거지?”
순식간에 곽태보의 눈빛이 변했다.
방금 전까진 설렁설렁 웃는 모습이었다면 작금은 온통 살기가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 그를 막아선 것은 다름 아닌 냉가혜였다.
“잠깐. ……네놈이 오늘 우리에게 기어들어 오겠다던 그놈인가?”
보통은 몰래 잠입하려거든 검은색 복면이라도 두르는 것이 정석이다.
한데 이자는 그러한 것조차 없다.
그렇다면 미리 소개받기로 한 자라는 것밖엔 답이 나오지 않는다. 하나 그럼에도 전대미문의 사내는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그랬다.
그는 낙월추였다.
상황이 잠잠해지자 낙월추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자가 누구인진 몰라도 나는 아니다. 너희들에게 제안을 하나 하러 왔다.”
“당장 내 저놈을!”
“정무봉, 멈춰. 뭐 하는 놈인 진 몰라도 이야기는 들어 보도록 하지. 적의 소굴에 기어들어 오면서 얼굴을 감추지 않고 드러낼 정도라면 실력자거나 미친놈일 테니.”
“크으……!”
이번에도 보기 좋게 체면을 구긴 정무봉이 날아가던 손을 거두었다. 그녀의 말대로 어차피 이곳까지 들어온 것 이야기 한 번쯤은 들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은 일일 지도 모른다. 더불어 작금 같은 시기에 힘은 많이 모을수록 좋은 법이니.
“네놈들 힘만으로는 산서성을 재패하는 데 필히 문제가 있을 거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지?”
이번엔 곽태보가 물었다.
자존심이 상한 것인지 목소리엔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살기 역시 감추지 않은 채였다.
하나 가소롭다는 듯 낙월추가 피식 웃으며 여유롭게 답했다.
“산서성의 절반에 해당되는 상권을 누가 가지고 있는지 아는가?”
“운양상단 말인가.”
곧바로 답한 건 냉가혜였다.
이에 낙월추가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지. 그 운양상단이 송운이라는 자가 관여되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나?”
“……몰랐다. 한데 송운이라면…… 이번에 혈마를 잡은 그놈을 말하는 건가.”
“호오? 정확히 알고 있군.”
그의 답에 냉가혜의 눈살이 처음으로 찌푸려졌다.
‘송운이 이 일에 끼어 있을 줄이야.’
그리되면 일이 제법 곤란하게 되어 버린다.
어떻게든 엮이기 싫은 자가, 반드시 마주쳐야 하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셈이니 말이다.
가만히 생각을 정리하던 냉가혜가 다시 조용히 읊조렸다.
“이번에 혈교에게 손을 내민 자들이 있다고 들었다. 설마…… 그게 네놈인가?”
그 말에 낙월추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 녀석도 내 주군의 수하이긴 하지. 하나 그놈보다는 내가 더 믿음직할 거다.”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을까.
다시 입을 연 쪽은 냉가혜였다.
“좋다. 네놈을 받아 주도록 하지.”
“……허?”
낙월추가 헛숨을 내뱉었다.
고맙다고 하진 못할망정 받아 주겠다니?
뭔가 주객전도된 느낌이긴 하나, 어쨌든 서로의 협상이 맞아떨어졌으니 더 반박할 필요성을 느끼진 못했다.
다만 헛웃음이 날 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정무봉과 추일공이었다.
“하나 냉가혜! 이건 우리끼리 성급히 결정할 문제가……!”
“뭐 어때? 어차피 실질적인 실무는 우리에게 다 맡긴다고 하지 않으셨던가? 설마 그 정도 확답도 받지 못한 거냐. 정무봉?”
“그, 그럴 리 없지 않으냐!”
그리고 누군가 낙월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을 열었다.
벌컥.
“……이곳인가?”
열 개의 눈동자가 전부 공손우경에게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