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전생-258화 (258/275)

제258화

“……으음.”

방안을 오락가락하던 낙월추가 신음을 흘렸다.

“산서성으로 가거라. 그 외에 다른 말은 일절 하지 않으셨으니 네가 알아내야 할 게다.”

반복적으로 암영이 한 말을 되새김질했다.

‘산서성으로 가라 하셨단 말이지. 산서성…… 그다지 가고 싶진 않은 곳이었는데…… 큭.’

낙월추의 얼굴에 작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주 어린 시절.

그는 본디 산서성 태원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였다.

하나 낙월추가 불과 일곱 살밖에 되지 않았을 무렵, 부패 관리들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사건에 휘말려 매질을 당해 부모를 모두 잃었다.

그 당시엔 아무런 힘도 없는 평민이자 어린아이인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조실부모한 채로 거리의 부랑아로 거의 죽어 가던 낙월추를 거두어들인 게 암영이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이 역시 독고백이 시킨 일이었다.

필히 키우면 크게 될 아이이니 데려와 키우라는 명이었다.

그만큼 낙월추에게 산서성은 좋은 추억보다는 좋지 못한 추억이 더 그를 내리누르는 곳이다. 그렇게 산서성을 떠난 후로 단 한 번도 돌아간 적이 없었다.

한데 암영은 이를 분명 알면서도 자신에게 가라고 한 것이다.

‘제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겁니까, 스승님.’

하나 더는 시간이 없다.

한시바삐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에 결국 낙월추가 생각을 지우고 발끝에 힘을 실었다.

이미 내려진 명을 거부할 권한 따위는 그에게 없으니.

흑야로 움직였던 이들은 서신 한 통을 보내면 다시 재개할 수 있다. 중원 곳곳에 그들은 널리 퍼져 있을 테니까.

자신이 먼저 움직여 그곳의 상황이 어떤지 파악하는 게 급선무였다.

‘출발해 볼까.’

타다닥!

쉴 새 없이 다리를 놀리며 뛰는 와중에도 낙월추가 머리를 굴려 댔다.

이제는 독고백이 왜 그곳으로 가라 했는지에 대해 생각의 회로를 바꿨다. 필히 아무것도 없는 곳에 가서 일을 벌이라 하시진 않았을 터.

혈교 때와는 달리 이번엔 별다른 언질조차 없다.

알아서 알아내라는 지시임이 분명했다.

본디 그러한 놀이 역시 즐기는 독고백이니 이상하게 여길 것도 없었다.

다만 산서성에 무언가 있는 건 확실하다.

‘……적어도 혈교 같은 단체가 있는 거겠지.’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뜰 무렵, 낙월추가 산서성에 도착했다.

“이곳이야말로 참으로 오랜만이군. 산서성이라…….”

주변을 둘러보던 낙월추의 눈동자에 감정이 서렸다.

그의 눈길이 닿는 거리에는 예전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고, 달라진 곳도 있었다.

하나 낙월추의 감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나무 위에서 잠시 쉬고 있던 낙월추의 귓가를 파고드는 말이 제법 흥미를 끌었기 때문이다.

“허이고…… 그놈의 사파가 또다시 일을 치고 다닌다며?”

“그렇다고 안 합니까? 말도 못 하지요. 이놈의 세상이 어찌 되려고 자꾸 이런 일만 터지는지 모르겠습니다요. 혈교라는 무시무시한 놈들이 사라지니 이제는 사파라니……! 치가 떨립니다. 또 그놈의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얼마나 뜯으려는지…….”

제법 나이 든 사내와 젊어 보이는 사내가 서로의 말을 주고받을 때.

깡마른 사내 한 명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그러곤 작고 쉰 목소리로 그들을 다그쳤다.

“아, 이 사람들이! 놈들 귀가 얼마나 밝은지 모르오? 천 리 밖의 이야기들도 듣는 무림인들 아니오? 그렇지 않아도 요새 점점 놈들의 머릿수가 늘어나는 중인데 그러다 경을 친다고! 보아하니 어차피 이제 이곳은 사파의 터전이 될 텐데, 그러다 눈 밖에 나지 말고 입단속들 단단히 하시오.”

“흐읍……! 아, 알겠네. 딸린 식솔들도 많은데 경을 치면 안 되지. 끙…… 어서 가서 일이나 마저 함세. 이러다 늦겠네.”

짧지만 길었던 대화를 엿들은 낙월추의 입가에는 자연스레 미소가 걸렸다.

‘이거였군. 사파라…….’

생각보다 쉽게 사태를 파악한 그였다.

휘이- 휘이익-

한적한 곳으로 향한 낙월추가 휘파람을 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타닷!

어디선가 검은 복면을 쓴 무인들이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다섯 명의 사내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워낙 소수 정예를 추구하다 보니 산서성에 남아 있는 이들은 기껏해야 다섯 명이 전부였다.

“부르셨습니까.”

“제법 빨리 왔구나.”

“과찬이십니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니 좋긴 좋군. 그간 잘 지낸 건가?”

“예. 주군의 보살핌 덕입니다.”

“그럼 앞으로 다시 날 따라야 하는 것에도 큰 불만은 없겠지.”

다섯 명 중에서도 우두머리 역할을 했던 자가 계속해서 낙월추의 말에 답했다.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무엇을 하면 됩니까?”

그때였다.

스릉-!

“호오. 제법이군.”

그제야 낙월추가 만족의 미소를 지으며 검을 거둬들였다.

일종의 시험 같은 것이다.

제법 오랜 시간 동안 흩어져 지낸 탓에 상대방의 마음이 변했을까 알아보기 위해 낙월추가 순간적으로 빠르게 발검하여 사내의 목에 검을 들이댄 것이다.

살의를 풍겼지만, 결국 검은 사내의 목 앞에 아슬아슬하게 멈추었다. 그리고 사내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은 상태로 그의 검을 막지도, 어떠한 다른 행위를 하지도 않았다.

마치 목각 인형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을 뿐이다. 만약 사내가 그 검을 피하려 마음먹었다면 무슨 짓이든 했으리라.

그만큼 낙월추에 대한 신뢰와 그의 뒤에 서 있는 독고백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다는 뜻.

낙월추가 평소처럼 다시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사파가 자리 잡은 곳으로 날 안내해라.”

“예, 대주.”

* * *

“젠장…… 젠장 X미럴! 이를 대체 어쩐단 말이냐.”

어둡고 습한 산골짜기에서 누군가 초조한듯 자리를 빙빙 돌며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 댔다.

조금만 나아가면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이 있었지만, 주변이 온통 수풀로 둘러싸여 잘 보이지 않는 장소였다.

그의 곁에는 천으로 돌돌 말려 두 개로 나뉜 무언가와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닌 듯 보이는 자들 약 스무 명, 그리고 혼이 반쯤은 나간 듯 눈이 퀭한 사람 한 명이 함께였다.

그랬다.

당장 욕지기를 내뱉으며 발을 동동 구르는 자는 바로 혈교와의 전쟁에서 용케 도망친 공손우경이었다.

귀마병의 도움을 받아 도망치는 데 성공한 그였으나 워낙 외모가 독특한 탓에 사람들의 눈에 뜨인다면 곧장 얘기가 새어 나갈 것임을 알고 있으므로 어떻게든 숨어 지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사람들이 돌아다니지 않는 야밤에 귀마병이 주변에서 먹을 것을 구해 온다는 사실이다.

귀마병을 다룰 수 있는 약을 먹은 게 그에게 큰 행운이 된 것이다.

그렇게 보름이 다 되도록 숨은 채로 어찌 앞날을 살아나가야 할지 궁리하던 공손우경의 귓가에 계속해서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이럴 수는…… 으으악!”

간신히 공손우경에 의해 목숨을 구했지만, 정신이 절반은 나간 듯 보이는 조익기가 계속해서 헛소리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 내 저 짐짝은 뭐 한다고 데리고 와서는 이 개 고생을! 아이고 뒷골이야. 너 이제 그만 조용히 하지 못하겠느냐!”

“히끅!”

공손우경이 조익기를 향해 소리를 버럭 지르자 그제야 그가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빨리빨리 움직여라. 오늘 안에는 도착해야 한다고 하질 않느냐!”

제법 어두운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지나가는 기척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모두 엎드려라.”

척.

그러자 멀뚱히 서 있던 귀마병들이 모두 일제히 몸을 바닥에 눕혔다.

강시들과는 달리 제법 유연한 신체를 지닌 그들의 행동은 무척 자연스러웠다.

평생 강시만 다뤄왔던 공손우경도 잘 적응이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그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공손우경이 고개를 휙휙 내저으며 잔뜩 긴장한 채로 재빠르게 수풀 속으로 몸을 숨겼다.

자신의 기운을 숨기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혹여 저 행렬에 일류 이상의 무인이라도 섞여 있다면 들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두근, 두근.

꿀꺽.

목이 타는 듯이 말라오며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다.

지난 보름간 이 시간에 사람이 지나다니는 것은 첫날과 이튿날을 제외하고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일반 평민들이라면 돌아다니지 않는다.

‘서, 설마…… 무림맹 놈들이 기어코 내가 이곳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인가? 아니야. 그래도 나, 나에겐 아직 귀마병이 있다.’

철통같은 방어벽인 귀마병이 스무 기나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효과를 발휘했다.

‘아. 조익기!’

언제 입을 다시 열지 모르는 조익기의 입을 막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곤 공손우경이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 대혈사련이 자리를 잡는 중요한 날이니라. 한 놈도 쳐지지 말고 운반에 집중하도록!”

“알겠습니다!”

“쯧, 그렇게 크게 답할 것 없다. 우리의 움직임은 되도록 조용히, 은밀할수록 좋다는 걸 잊은 것이냐? 멍청한 놈들 같으니라고.”

행렬의 맨 앞에 선,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혀를 차며 그들을 한심한 듯 바라본다.

조용히 듣고 있던 공손우경의 귓가가 움찔거렸다.

‘혈사련? 혈사련이라 하면……?’

그가 아무리 오랜 세월을 동굴 속에 갇혀 강시들에 대한 연구만 하고 살았다지만, 속세의 사정에 영 밝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들를 때마다 매번 새로운 소식을 가져다주는 진천후에게 중대사는 들을 수 있었던 덕분이다.

그리고 그중에서 혈사련 역시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설마…… 사파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단 말인가? 아니지. 아니야. 혹시 모르지. 그 이름만 가져다 빌려 쓰는 놈들일지도 모른다.’

다행히 이곳을 지나가는 행렬이 꽤 긴 데다 속도가 더딘 편이라 공손우경은 좀 더 그들을 지켜볼 수 있었다.

“대주님, 조금 전 들어온 소식에 따르면 궁주님께서도 곧 내일쯤 도착하실 거라 합니다.”

순간 공손우경의 안색이 밝아졌다.

당금 세상에서는 궁주라는 단어를 쓰는 집단은 그리 많지 않다.

그것도 혈사련과 관련된 궁주라면 더더욱 말이다.

‘정녕 사파로구나!’

마교와도 척을 진 마당에 공손우경이 몸을 기댈 수 있는 곳은 이 하늘 아래 아무 곳도 없다.

하나 사파라면 말이 달라질 수도 있다.

비록 혈교와 사파가 다른 길을 걷는 이들이긴 하나, 자신의 힘과 귀마병을 가져다 바친다면?

충성을 맹세한다면?

이미 갈 곳을 잃은 공손우경이 배신할 가능성은 적으므로 사파의 입장에서도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 두 동강 난 진천후를 강시로 되살린다면 더더욱 말이다.

공손우경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어림과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바스락.

“이보시오. 말씀 좀 묻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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