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7화
어두컴컴한 방 안.
초라함을 떠나 어떤 물건도 존재하지 않는 그곳 중앙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달빛만이 그 사람을 비추며, 작은 그림자를 만들어 내 누군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죽은 듯 앉아 있던 그는 한 시진이 흐르고 나서야 조용히 감았던 눈을 떴다.
무림맹에서 배신자의 낙인이 찍히고 화산파로 죽기 살기로 도망쳐 왔던 곽철우였다.
“……후우우.”
깊은 한숨을 내뱉은 그가 그날을 회상했다.
* * *
곽철우가 입을 떼자 주변에 있던 오룡일봉의 귀가 절로 한데 모아졌다.
“나는…… 나는 화산파로 가야겠다.”
스릉-!
그 말이 나옴과 동시에 팽후영이 가차 없이 등에 둘러메고 있던 도를 뽑아 들었다.
서슬 퍼런 도는 마치 당장이라도 곽철우의 목을 베려는 듯 날카롭게 위협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눈동자가 커질 대로 커진 남궁장후와 당무옥이 동시에 외쳤다.
“혀, 형님!”
“팽후영!”
“말리지 마세요. 저는 무림맹의 사람입니다. 무림맹의 한가운데에서 배신자는 이대로 못 보냅니다. 아시죠?”
팽후영의 말이 주변의 공기를 싸늘하게 얼렸다.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서로 동고동락한 형제와도 같은 사이가 아니던가. 이젠 오히려 가문의 친형제보다 더 오래 살을 맞부딪치며 살아온 나날이었다.
한데 어찌 일말의 자비조차 없이 냉혈한처럼 굴 수 있단 말인가?
그런 팽후영이 야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결국 화산파를 택하겠다는 곽철우에 대한 배신감이 섞여 오묘한 감정을 만들어 냈다.
그때, 곽철우가 입을 열었다.
“난 괜찮다. 후영이는 당연한 선택을 한 것뿐이니. 이런 아이인 것을 몰랐던 것도 아니지 않더냐? 다만, 내가 완전히 가겠다는 뜻이 아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이죠?”
팽후영이 되물었다.
화산파의 사람이 화산파로 돌아가겠다는데 그게 완전히 가겠다는 뜻이 아니라면 무슨 뜻일까.
순간, 아무 말도 못 한 채 멍하게 서 있던 양풍완의 눈이 번뜩 뜨였다.
‘……설마?’
그다지 좋지 않은 느낌이 모두의 뒷골을 싸늘하게 스친다.
“형님, 설마 그건…… 아니죠?”
어딘지 모르게 굳은 다짐이 보이는 곽철우의 눈빛이 양풍완과 마주쳤다.
“풍완이가 많이 크긴 컸나 보구나. 가기 전 맹주님께 들러야겠다. 이건 결코 나 혼자서 해낼 수 있는 계획은 아니니.”
거기까지 듣고 난 후에야 팽후영의 두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설마, 그곳에 홀로 돌아가서 길을 뚫어 주겠다고?’
팽후영이 아는 양의문은 냉철하고 악독한 인물이었다.
정녕 화산파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하지 못할 게 없다고 생각하는 자였다.
곽철우가 비록 돌아가신 형님의 하나뿐인 제자라고 할지언정 일단 의심이 가면 쉽게 믿지 않을 테고, 심하면 죽일지도 모른다.
‘한데 그곳을 제 발로 걸어 들어가겠다고?’
팽후영이 과연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줘야 하는 걸까?
이대로 보내 줬는데 결국 살아 돌아가기 위해 뒤통수를 친 것이면 어떡한단 말인가?
별별 생각이 팽후영의 이성을 괴롭혔다.
그렇다고 믿어 주지 않기에는 그녀 역시 곽철우를 너무도 잘 알았다.
하나 그 고민은 그리 길지 못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제가 언질을 넣겠습니다.”
결국 팽후영 역시 곽철우의 말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 * *
그로부터 칠 주야가 넘게 흘렀다.
다행히 백능은 그날 곽철우의 의견을 듣고 조금의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고, 적당한 날짜를 정해 그를 보냈다.
하나 아무리 곽철우라 한들 아무런 외상없이 돌아가면 반드시 의심을 피하지 못할 거라는 말에 백능의 도움을 받아 외상을 몸에 새겼다.
아팠지만, 사혈은 모두 빗겨 맞았기에 참을 만했다.
그리고 그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보여 주기라도 하듯, 어제부터 양의문의 경계가 약화됐다.
“혈교가 무너지거든 그로부터 십 주야 후. 그리고 혈교가 무너지지 않거든, 너의 판단에 맡기도록 하마.”
백능의 목소리가 곽철우의 귓가를 울렸다.
지난 며칠간 수도 없이 되새기고 있던 날짜.
그사이 송운이 나섰고, 예상보다 훨씬 쉽게 혈교가 무너졌다는 소식이 만천하에 울렸다.
‘……이제 사흘 뒤.’
밝은 달이 지고 그믐달이 뜨는 날.
그가 자라왔던 이곳에 거대한 혼란이 닥칠 것이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그의 마음 한편이 싸하게 쓰라려왔다. 오랜만에 돌아온 화산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기 때문이다.
‘예전과 달라진 것이라고는 그저 스승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과 분위기뿐이거늘…….’
곽철우의 눈가에 잠시 물기가 어렸다 사라졌다.
어찌하여 이런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 것일까.
이조차도 하늘이 주는 시련일까.
‘스승님…….’
가슴 깊이 묻어 두었던 스승의 이름을 꺼내 보아도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곳을 택할까?’라는 생각이 수십 번씩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기도 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자신의 앞에 그 어떠한 커다란 시련이 닥쳐와도 사람은 옳은 길을 가야 한다는 스승님의 말씀이 가슴을 때렸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자신의 문파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아니 오히려 문파의 일일수록 더욱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 문파를 지키는 길이리라.
핑-
그때, 아주 잠시 주변에 고요히 흐르던 기파의 파동이 흔들렸다.
순식간에 주변의 기가 어지러워지면서 하나의 기척이 사라졌다.
화산파로 돌아온 이후 줄곧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던 자의 것임을 알았지만, 곽철우는 티를 내지 않았다.
아마 그를 시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모르는 척, 알지 못하는 척.
두 귀와 두 눈을 모두 감고 닫아 버렸다.
그래야 의심을 피할 수 있다.
여태껏 잘해 왔지 않는가.
그렇게 해서 삼엄했던 경비 역시 삼분지 이로 줄어들 수 있었다. 아직 화산파는 곽철우의 실력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곳으로 돌아오기 전, 복용하면 약 십 주야간 자신의 본래 내공을 감출 수 있는 특이한 약을 받아 온 덕이다.
‘앞으로 삼 주야만…… 삼 주야만 더 버티자.’
시간은 그리 오래 남지 않았으니.
슬픈 눈을 한 곽철우는 오늘 밤도 잠을 청하기는 그른 듯했다.
* * *
“하하…… 이거 되게 느낌이 이상하네.”
“그러게 말입니다. 형님.”
“뭐, 그래도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니 기분은 좋군.”
오룡일봉과 송운, 그리고 평서란이 다시 만났다.
새벽처럼 집을 떠난 송운과 평서란은 최대한 빠르게 경공을 펼쳤고, 넉넉하게 무림맹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작별을 고하고 헤어진 지 고작 오 주야밖에 흐르지 않은 때였다. 그렇다 보니 당시 헤어질 때의 아쉬움을 토로했던 그들로서는 제법 멋쩍은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하나 어색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매우 중요하고 어려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역시나 팽후영이 가장 먼저 그 일을 입에 담았다.
“삼 주야 후라는 건 모두 알고 계시죠?”
그 한마디에 분위기는 다시 묵직해졌다.
여기 있는 이들 중 누구도 그것을 모르지도, 달가워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 셈이지? 위에서 그렇게 명이 내려왔으니까.”
씁쓸한지 손으로 입술을 훑던 남궁장후가 답했다.
화산파로 돌아간 곽철우가 무사할지는 아직 그들조차 모르는 탓이다.
이번 작전의 난도는 제법 높았다.
오히려 혈교의 꼬리를 쫓을 때보다 더 높을지도 모른다.
화산파라는 거대한 문파 하나를 박살 내야 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더구나 그 안에는 그들의 친우이자 형인 곽철우가 있었다.
무사히 살아 있다면 화산파의 내부 상황을 파악하고 빠르게 움직여 무림맹이 들어가기 직전, 닫힌 화산파의 문을 열어 줄 것이다.
마치 화산파가 무림맹을 배반하고 문을 활짝 열어젖혔던 그때와 같이 말이다.
물론 이번 일은 오룡일봉과 송운만 맡은 일은 아니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무림맹에서 내로라하는 무인들을 대거 대동할 것이다.
특히 그간 화산파의 행동을 눈엣가시처럼 지켜봤던 문파들의 움직임은 더욱 활발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찌하다 화산파 같은 문파가 이런 일을…….”
송운이 고개를 저었다.
전생에서 화산파는 호시탐탐 무림맹주의 자리를 노리기는 하지만 배반을 하진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고,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송운의 말을 듣고 있던 백길이 들고 있던 염주를 굴리며 말했다.
“결국 이 또한 자업자득. 자승자박(自繩自縛)인 셈이지요. 아미타불…….”
“일단 오늘은 다들 쉬는 게 좋겠네요. 며칠간은 되도록 수련도 피해 주세요. 혹여나 사소한 실수에 다치기라도 하면 실전에 그대로 타격이 올 테니까요.”
모두가 팽후영의 말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주억였다.
또다시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는 것은 남궁장후의 몫이었다.
“자자! 기왕 이렇게 된 거 지난번엔 밥 한 끼도 제대로 못하고 갔는데 오늘 저녁이나 다 같이 모여서 먹도록 하죠. 어떻습니까? 형님?”
“어! 장후, 너 말 잘했다. 그렇지 않아도 배가 고파 등가죽과 뱃가죽이 달라붙을 지경이었다. 얼른 가자.”
남궁장후의 말에 동조하며 당무옥이 거들자, 팽후영이 딱 잘라 말했다.
“다들 술은 절대 안 돼요. 아시죠?”
“하아…… 후영이 넌 정말 너무 꽉 막혔구나. 알고 있지? 내 친동생이 너 같았다면 난 숨이 턱턱 막혀서 예전에 말라 죽었을 거다. 꽥.”
“……남궁 오라버니.”
장난기 넘치는 남궁장후의 말에 팽후영이 조용히 읊조렸다. 이내 남궁장후가 못 이긴다는 듯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어찌 되었건 간에 그녀의 판단은 항상 옳았고, 팽후영의 결단력은 오룡일봉에게 꽤 큰 도움이 되어 왔다.
더구나 결국 그녀도 오룡일봉이자 동료다.
미워할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알았다. 알았어. 항복! 항복한다고. 그러니까 딱. 반주로 한 잔만 할게. 자, 형님 가시죠! 제가 이 근처에서 가장 맛있는 객잔을 압니다. 하하!”
“……휴.”
결국 팽후영도 포기한 건지 아니면 은근슬쩍 넘어가 준 건지 모를 한숨을 내뱉고는 고개를 돌렸다.
평서란이 그 모습에 미소 지으며 송운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평서란 역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밝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래요. 가가, 다들 시장할 테니 밥 한술 뜨러 가자고요. 저도 슬슬 배가 고프네요.”
“그렇소? 그럼 장후가 안내하는 곳으로 가 볼까?”
“예이, 형님! 가시지요!”
모두가 식사에 기분이 들뜰 무렵 송운이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조금만 더 버텨 주십시오. 곽 소협. 우리가 곧 가겠습니다.’
아직도 무림에 거세게 불고 있는 혈풍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