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6화
“안녕하십니까. 회원 장가의 장남. 장명도라 합니다.”
오랜만에 운양상단에 큰 손님이 들었다.
장명도가 송운의 부탁으로 준비를 끝마치자마자 운양상단으로 향한 것이다.
회원 장가에 속한 약 서른 명 정도 되는 일류고수 스물일곱 명과 세 명의 절정 고수들도 함께였다.
더불어 장명도 역시 절정 고수의 끝에 들어 있으니 송운이 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서신을 받은 작금의 상황에서 그들은 제법 든든한 우군이었다.
아니, 제법 정도를 지나 송운이 상당히 믿을 만한 실력을 지녔다고 하였으니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굳게 믿을 수 있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리 폐를 끼치게 되어 송구합니다.”
양조광이 가장 먼저 나서 고개를 숙이며 그를 반겼다.
장명도가 그 말에 조금 어색했는지 손사래를 치며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하하! 아닙니다. 이거 운이에게 신세를 진 것도 있고 친구 사이에 이 정도 도움도 못 주겠습니까? 다행히 이번 사태에서 저희 안휘성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기도 했고, 사파의 손길도 미치지 않으니 도와주지 않을 연유가 없지요. 더불어 언제고 놈들이 세력을 불려 마수를 뻗칠지 모르니 싹을 자르는 일은 누구든 해야지요. 저야말로 운이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참으로 기분이 좋습니다.”
“그리 생각해 주시니 참으로 고마울 따름이군요. 안으로 드시지요. 먼 길 오시느라 시장하실 텐데 우선은 배를 채우는 것이 응당 순서겠지요.”
꼬르륵…….
그리고 때마침, 장명도의 배 속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살짝 민망해졌는지 장명도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아, 그렇지 않아도 남은 길이 얼마 되지 않아 급하게 오느라 아침을 걸렀더니 배가 고프긴 합니다. 하하! 한데…… 우리 구면이지 않습니까?”
장명도가 유심히 양조광의 얼굴을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조용히 주억였다. 양조광 역시도 분명히 장명도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 공자님의 약혼식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구면이라면 구면이겠지요.”
“역시 제 기억이 맞았군요. 그럼 기왕 이렇게 된 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끼리도 말을 편하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양 단주님께서도 저도 운이와 친구이니 당연히 우리도 서로 친구가 되지 않겠습니까?”
장명도가 조심스럽게 묻자, 양조광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다시 물었다.
“그래도 될는지요?”
양조광의 물음에 장명도의 목소리가 커졌다.
“못 할 게 뭐 있겠어! 앞으로 잘 부탁한다, 조광아.”
말을 끝낸 장명도가 양조광을 향해 거친 손을 내밀었다. 무인답게 굵직하고 단단한 손은 다시 한번 양조광의 마음을 든든하게 해 주었다.
“저…… 아, 나야말로.”
아직은 서로 간의 어색함이 흘렀으나 곧 좋아지리라.
이내 장명도가 양조광의 어깨를 맞잡았다.
“자. 그럼 우리가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뭔가? 친구!”
“일단은 운 공자님이 오시지 못하니…….”
두 사람이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식당으로 향하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 * *
짹짹-
이른 아침.
동도 채 뜨지 못할 무렵.
장원에 송악을 비롯한 송운, 송후, 그리고 홍예령과 평서란이 모두 모였다. 어제보다는 한층 기운이 빠진 모습의 홍예령이 입을 열었다.
“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또 먼 길을 떠나야 한다니……. 하루 정도 더 묵고 가는 건 역시…… 안 되겠지?”
“……어머니.”
서운하면서도 걱정이 가득한 홍예령이 송운의 손을 맞잡았다.
송운이 돌아오고도 며칠간은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탓에 이제 겨우 밥 한 끼 해 주었을 뿐인데, 벌써 가야 한다니 홍예령의 아쉬움은 한층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홍예령을 보며 송운의 마음도 썩 좋지만은 않았다. 자신 역시도 예상치 못했던 명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오랜 시간 동안 집을 떠나 있다 돌아온 만큼 한동안은 집에서 머물 줄 알았거늘, 그 시간이 너무 짧지 않은가?
이럴 줄 알았다면 수련을 좀 미루고서라도 집에 더 빨리 돌아오기 위해 노력했을 터였다.
당금 이 순간만큼은 명을 내린 황궁이 밉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본인이 좋지 않은 표정을 보이면 홍예령은 배로 걱정할 것은 뻔한 일.
자식 된 도리로서 어머니를 걱정시킬 수는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나라도 침착해야지.’
송운이 곧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이번엔 최대한 빨리, 그리고 몸 조심히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니. 그러니 너무 걱정 마세요.”
송운의 말에 서둘러 평서란도 한마디 거들었다.
“어머님. 운 가가께서는 참 강하신 분이니 절대 다칠 일은 없을 거예요. 더불어 저도 늘 함께하니 위험한 일이 생기거든 제가 최대한 힘을 써 보도록 할게요. 그러니 염려 마세요.”
“아니다. 둘이 늘 함께 의지하니 참으로 보기 좋아. 나야말로 어미가 되어 이런 나약한 모습을 보여 미안하구나. 새아가, 너도 항상 몸조심하렴. 내 걱정은 말고. 알겠지?”
송운은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 죄책감이 잠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학사의 가문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만나고 학사의 부인으로서 안전하고 큰 걱정 없는 삶을 살다, 뜬금없이 아들 내외 모두 무인으로 전장을 떠도니 걱정은 더더욱 컸을 터.
만일 자신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학사로서 길을 걸어 나갔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나 이내 송운은 슬쩍 고개를 좌로 내저었다.
‘아니다. 그래도 아는 힘도 힘이지만 육체가 가진 힘도 가족을 지키는 데에는 필요한 법. 힘을 기르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터.’
송운이 홍예령의 손을 다시 맞잡았다.
어머니의 손은 몹시 따뜻했다.
“이번에도 무사히 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테니, 그때도 맛있는 밥 해 주세요. 어머니.”
“그래, 꼭 그러마. 우리 큰아들.”
그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송악이 슬쩍 홍예령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러자 홍예령이 송악의 어깨에 머리를 살포시 기댔다.
“크흠. 네 어미와 가정은 내가 든든히 지키고 있을 테니, 너는 나랏일을 잘 해내고 돌아오거라.”
“조심히 다녀오세요, 형님.”
“그래, 알았다. 후야. 이번에도 어머니, 아버지를 잘 부탁한다. 그럼 이만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다녀올게요. 몸 건강히 계세요. 어머님, 아버님.”
그렇게 다시 송씨 가문의 짧았던 만남이 끝나고 새 여정이 시작되었다.
第三章. 각자가 해야 할 일
툭. 툭.
“철우 녀석은 요즘 어찌 지낸다더냐?”
자신이 앉은 자리에서 의자를 툭툭 치던 양의문이 허공에 대고 물었다.
타닥.
그러자 빈 허공에서 웬 인영 하나가 쏜살같이 떨어져 나왔다.
반쪽짜리 가면을 쓴 사내였다.
“이 주야 전부터 몸의 부상이 점점 낫고 있는지 자고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간을 수련에 매진 중입니다. 휴식을 취할 때도 명상을 하는 것인지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그전에는 방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눈을 가느다랗게 뜬 양의문이 가면 쓴 사내를 향해 재차 물었다.
“흐음…… 그 외, 특별한 증상은 없고?”
“수련과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바깥 외출은 없습니다. 눈에 띄는 이상 행동도 없었습니다.”
으득.
순간, 가면 쓴 사내의 말에 양의문이 이를 갈았다.
당금 직면한 상황이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문제로 인해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거야 작금 우리 화산파 자체가 바깥으로 나서는 일을 금하고 있으니 당연한 거겠지. 크으……! 이런 망할 무림맹 녀석들 같으니라고.”
꿀꺽.
양의문이 으르렁거렸고, 이에 장보흠이 마른침을 삼키며 움찔거렸다.
행여나 양의문의 성격이 폭주해 또 어떤 귀한 물건을 박살 낼까 전전긍긍했기 때문이다.
하나 다행히도 그의 손은 아무것도 쥐지 않았고, 당연히 무언가를 던지지도 않았다.
혈교가 무너지고 화산파와 무림맹은 완전히 척을 진 상황이었다.
호사가들에 의해 화산파는 도리를 저버린 파렴치한으로 그려졌고, 세상 모두가 그들에게 등을 돌린 이때.
그럼에도 아직까지 화산파도 무림맹도 서로 부딪히지 않는 연유는 무엇일까.
그 연유는 몹시 단순했다.
무림맹은 이번 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어 재정비를 하고 있느라 화산파에 큰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화산파 역시 이를 잘 알지만, 그럼에도 무림맹이 보유한 저력을 결코 무시할 수는 없으니 아직까지 두고만 보고 있는 것이었다.
즉, 서로 간을 보고 있는 게 정확했다.
물론 이게 언제까지고 갈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필히 언젠가는 한쪽은 지키기 위해, 한쪽은 빼앗기 위해 피 튀기는 혈전이 벌어질 터.
몇몇은 그냥 잘못을 빌고 수그리고 들어가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그냥 순순히 받아 줄 무림맹이 아니라며 묵살 당했다.
이에 더해 양의문의 노함을 그 자리에서 그대로 받아야만 했다.
한 손이라도 부족한 전시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노기를 받는 게 아니라 모가지가 날아갔을 터다.
어쨌든 그러한 상황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곽철우의 존재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양의문이 질문을 연이었다.
“식사는 주로 누구와 하더냐?”
“대부분 혼자 합니다만, 종종 사형 사제들과도 함께하곤 합니다. 하나 그들도 딱히 곽철우에게 호의적인 태도는 아닌 듯합니다.”
“이상한 낌새나 대화는 없었고?”
“평범한 일상적인 대화뿐이었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만일 뭔가 어긋나는 행동이나 대화가 있었다면 가면 쓴 사내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곽철우보다 무공 단계가 한참 위니 말이다.
벌써 곽철우가 화산파로 기어들어 온 지 칠 주야가 훌쩍 지났다.
만일 뭔가 하려고 했다면 진즉 움직였을 터.
이제야 찝찝한 무언가가 조금은 덜어지는 듯한 기분이 드는 양의문이었다.
‘하면 무림맹에서 죽다 살아 돌아왔다는 말이 사실이란 말인가? 하긴…… 어릴 적 부모를 모두 잃고 아무것도 없는 천애 고아인 자기를 받아 준 것이 이 화산파니, 그 의리를 저버려서는 아니 되지. 아니 돼. 거기다 어찌 되었건 형님의 제자이니…….’
한참을 홀로 고민하던 양의문이 의자를 치던 손가락을 들어 크게 한 번 까딱했다.
결국 곽철우를 향한 의심의 단계를 조금이나마 낮춘 것이다.
“아직까지는 더 지켜보되 수련 같은 것에는 큰 제지를 두지 말도록 해라. 진짜 배반자가 아니라면 결국 그 녀석도 우리 화산파의 힘이 되어 줄 테니. 적당히 몸보신할 정도만 살펴 주라 하거라.”
“예, 알겠습니다. 장문인.”
마지막 대답을 마친 가면 쓴 사내는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무림맹……! 두고 보자.’
양의문의 두 눈에서 번쩍하고 안광이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