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4화
第二章. 혈사련
어두워진 밤.
둥그렇게 만들어진 탁상 앞에는 총 네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형상 자체는 위용을 내비치기엔 훌륭했으나 퀴퀴한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몇 번 정도로 닦는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을 만큼 말이다.
세월이 흘렀음을 눈으로 직접 보여 주고 있었다.
“혈사련이 붕괴된 지 벌써 이십 년이나 흘렀나.”
그 탁상 위로 무거운 음성이 내려앉았다.
“후!”
장신에 우락부락한 인상을 지닌 사내가 탁상의 먼지를 불어 낸 후, 빈자리에 걸터앉았다.
마치 그 자리가 원래 그의 것이었던 양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자신의 신장만 한 도를 걸친 그는 혈사련의 기둥이었던 네 개의 문파 중 맹호궁(猛虎宮)의 궁주 용두염라(龍頭閻羅) 정구살(丁九殺)의 장자인 정무봉(丁武奉)이었다.
그가 앉자 나머지 세 명도 차례대로 자리에 착석했다.
“그간 정파 놈들의 기에 눌려 제대로 어깨 한번 펴 보지 못하고 산 세월이지. 빌어먹을, 와해되어 뿔뿔이 흩어지던 우리 집안을 놈들이 끝까지 쫓아와 준 덕분에 내 큰형님께서 돌아가셨다.”
쾅!
누군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온몸으로 불만을 내비쳤다. 두 번째 의자에 걸터앉은 중년의 사내였다.
네 개 문파 중 칠성파(七成派)의 장문인 표리신검(瓢離神劍) 추운방(秋雲房)의 차남 추일공(秋壹公).
이십여 년 전 혈사련이 붕괴되면서 뿔뿔이 흩어졌던 이들은 이제야 다시 어느 정도 재기할 기틀을 마련했다.
이대에 걸친 고난 끝에 얻은 결과물이었다.
하나,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는 일은 욕망이라는 공동의 이익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터.
때마침 중원에는 혈교가 들이닥쳤고, 사파가 어찌 굴러가는지 따위는 정파의 관심 밖인 상황이었다.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었다.
한데,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누군가 그것을 알아채고 하남성의 소림사에 손을 뻗쳐 방해를 놓았다.
설상가상으로 몇 주야 전에 혈교의 교주가 죽었다는 소문이 이 근방에 파다하게 퍼졌다.
이대로 가다간 다시 정파가 정신을 차린 후 무인들을 보내올 것이고, 그리되면 운신이 더 까다로워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리라.
하여 이를 어찌할 것인가 회의를 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그런 분위기의 산통을 깨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무봉과 추일공의 대화에 낀 것은 훨씬 더 젊은 목소리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끼리 집안 싸움하다 개판 난 거지. 안 그런가? 정파에 의해서 깨진 것도 아니잖아?”
손에 쥔 단검을 휙휙 돌리던 사내가 비꼬듯 내뱉었다.
네 문파 중 천검문(天劍門)의 문주 천검옹(天劍翁) 곽필(郭馝)의 손자 곽태보(郭泰保)였다.
딱 보아도 귀공자 같은 느낌의 그는 실제로도 수많은 여인을 울린 화화공자로 유명했다.
물론, 사파답게 눈에 거슬리는 이들은 여인일지라도 거침없이 베어 젖히는 성미였다.
곽필이 남긴 혈육이라곤 곽태보 혼자뿐인지라 어쩔 수 없이 천검문의 계보를 잇고 있었으나, 그는 늘 사혈련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술과 여인, 놀이보다 재미가 없다는 게 그 연유였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의 취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며 말이다.
그럼에도 그가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은 할아버지인 곽필이 죽기 직전 곽태보에게 가문을 이끌어 달라 부탁했기 때문이다.
생전 곽필이 자신을 끔찍하게 예뻐하셨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껄렁한 태도의 곽태보가 다른 이들의 마음에 들 리 없는 법.
“놈! 네놈 따위가 함부로 말할 일이 아니다!”
쿵-!
정무봉은 심기가 크게 거슬렸는지 곽태보의 눈앞에 자신의 도를 들이댔다.
부리부리한 눈을 부릅뜬 정무봉의 기세는 어지간한 인물이라도 절로 움츠러들 법했다.
“워, 자칫하면 같은 편도 죽일 기센데? 아저씨?”
하지만, 곽태보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오히려 그를 조롱하는 말만 골라서 툭툭 내던졌다.
기세등등한 정무봉의 표정이 굳어졌고, 곧이어 분노로 일그러졌다.
“이…… 이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자식이……! 네놈은 혈사련의 수치다!”
후웅-!
정무봉이 도로 곽태보의 머리를 내려찍을 듯 매섭게 휘두른 그때.
탁!
한 여인이 그를 막아섰다.
“……헛!”
순식간에 손목이 잡혀 당황한 눈빛의 정무봉이 서둘러 손을 빼냈지만, 이미 분위기는 뒤바뀐 후였다.
애당초 진심으로 죽이려고 뻗은 손속이 아니었기에 붙잡기가 더 쉬웠겠지만,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정무봉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지만, 신경 쓰는 이는 추일공 단 한 명뿐이었다.
‘이…… 계집년이! 고수라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크으……!’
정무봉이 당황하건 말건 상관하지 않고 여인은 차가운 눈초리를 한 채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려는 건가? 어리석군. 나이를 헛먹었어. 대체 언제까지 새파랗게 어린아이의 말장난에 넘어갈 거냐? 정무봉.”
냉랭한 목소리가 그를 질타했다.
혈사련에 속했던 문파 중 유일하게 적자(嫡子)도 서자도 없는 집안.
철혈냉가(鐵血冷家)의 가주 철혈장귀(鐵血掌鬼) 냉공소(冷空宵)의 외동딸 냉가혜(冷加慧).
그녀를 여인이라고 얕보았던 이들 중 그 누구도 지금껏 살아남지 못했을 만큼 무공이 뛰어났다.
사실 처음 냉가혜가 태어났을 당시만 해도 냉공소는 딸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그 뒤로 자식이 들어서지 않았으나, 부부 사이가 워낙 좋았기에 그는 다른 여인을 더 품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냉가혜가 무공을 익힐 나이가 되자, 어지간한 사내놈들보다 월등한 재능과 실력을 지녔다는 걸 깨달은 뒤에는 누구보다 기뻐했다.
냉가혜에게 적당한 짝을 지어 주고, 그 사이에서 난 아들에게 문파의 무공을 전수해 주면 된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냉가혜는 태어날 적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냉공소를 실망시켜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제법 예쁘장하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철혈이라는 이름이 그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냉혈한이었다.
냉공소의 예상보다 조금 더 늦게 결혼을 하긴 했지만, 벌써 세 살배기와 한 살배기 아들도 두고 있는 몸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갖지 못한 아들을 무려 둘이나 낳은 딸이기에 냉공소는 냉가혜에 모든 것을 줄 만큼 그녀를 아끼고 있었다.
그런 냉가혜가 정무봉을 향해 눈을 번뜩이며 읊조렸다.
“우리끼리 싸울 시간 따위는 없다.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혈교가 무너졌다는 건 너희들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냉기를 풀풀 날리는 냉가혜의 말에 곽태보가 능글맞게 고개를 주억였다.
냉가혜의 행동은 나름대로 이들 사이에서 대장 노릇을 하고 있던 정무봉에겐 치욕적으로 느껴졌지만 딱히 반박할 만한 구석이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이렇게 사소한 시비로 분열했다간 또다시 외부의 압력과 내부의 의견 충돌로 예전의 혈사련처럼 붕괴될 테니 말이다.
까득.
정무봉은 자존심이 폭삭 내려앉는 기분이었지만, 다행히도 그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젠장, 있는 대로 설레발은 다 떨어 놓고 이렇게 쉽게 무너질 줄 누가 알았겠나? 대체 그 송운이란 놈은 어떤 괴물이기에 이리도 혈교를 쉽게…….”
“송운이 어떤 놈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우리와 그놈은 다른 길을 걸을 테니까. 계속해서 혈사련을 지키고 싶다면 쓸데없는 데 심력 낭비하지 말고,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 나갈지. 그것만 걱정해라.”
“맞는 말씀입니다, 가혜 누님.”
곽태보가 냉가혜를 향해 눈을 깜빡였고, 그녀는 콧방귀를 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 냉대를 예상한 것처럼 곽태보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 쉬운 여자는 아니군. 생각보다 이쪽 일이 재밌을지도……?’
* * *
독고백과의 독대를 마치고 암영이 자신에 거처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소리 소문 없이 암영의 곁에 누군가 다가왔다.
검은 그림자의 정체는 바로 낙월추였다.
제법 오랜 시간 동안 낙월추를 보지 못했던 탓에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으나, 암영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어쩐 일이냐. 한동안 몸을 사린다고 들었다.”
“스승님께서 직접 움직이셨는데 저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제자의 도리가 아닌 줄 압니다.”
늘 장난기를 머금던 낙월추의 표정이 오늘따라 유독 진지했다.
암영을 불러들인 만큼 독고백이 제법 큰일을 벌이려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탓이리라.
“흐음…… 하면 이번 일은 네가 맡아 볼 테냐?”
“제가 감히 맡아도 되겠습니까?”
“이놈 보게? 내 공이라도 빼앗아 갈까 봐 걱정이 되는 게냐? 아니면 혹여 일을 맡다 실수라도 할까 두려워 몸을 사리려고 미리 수를 쓰는 게냐?”
“아이고…… 스승님도 참. 말씀을 서운하게 하시는 건 여전하시군요.”
평소의 암영이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기에 맞받아치던 낙월추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자 암영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마치 자신이 더 서운하다는 듯 말이다.
“쯧, 그렇게 서운했으면 진작 얼굴 한 번쯤은 비췄어야지. 하나밖에 없는 제자 놈이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모르고 전전긍긍하게 만들어 놓고 말은 참으로 뻔뻔하구나, 이놈아.”
“물론 그건 제가 잘못한 게 맞긴 하지만…… 오늘따라 스승님 같지 않으시군요.”
“그러니 얼굴 좀 펴라. 평소에 하지 않던 말을 하려니 온몸이 쑤신다. 네놈만 심란한 줄 아느냐? 흑야를 다시 움직이라 하실 줄이야…… 오랜만에 몸을 좀 제대로 써야 할 듯싶구나.”
“흑야를 말입니까?”
암영의 말에 낙월추의 음성이 일순간 커졌다.
“그렇다.”
“……이번 일만 성공하신다면 분명 주군께서 스승님은 놔주실 겁니다.”
암영이 낙월추의 말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허허……! 과연 그러하실까?”
“원래 성공한 수하를 더 예뻐하시는 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거야 당연한 이치이니 두말할 것 없겠지……. 하나, 그분은 쉽게 만족하지 않는 분이다. 무엇보다 일전의 일이 실패하지 않았느냐. 그 배에 달하는 성과를 가져오길 바라실 게다.”
“그럼에도 제게 이 일을 맡기시려는 연유는 뭡니까?”
낙월추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나 같은 늙은이보다는 젊은 네가 공을 세우는 편이 훨씬 이득이니까. 나도 이참에 제자 덕 좀 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