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전생-253화 (253/275)

제253화

“아……? 이봐요. 내 말 듣고 있어요?”

잠시 넋을 잃은 황보운룡의 정신을 일깨운 건 송하의 음성이었다. 넋이 나간 듯 보이는 그의 표정은 누가 봐도 이상할 만했다.

“아, 미안합니다. 잠시 딴생각을 했습니다.”

“치이…… 됐어요. 어쨌든 이, 이번 건 못 본 척해 줘요. ……나, 나도 여자라고요.”

제법 민망했는지 어느새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송하가 황급히 고개를 획 돌렸다.

그 모습에 황보운룡은 별다른 수식어 없이 그저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이미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께 여인의 비밀은 지켜 주는 것이라고 배웠다.

당연한 것이다.

“물론입니다.”

“자, 그럼 다시 먹던 걸 재개해 볼까요? 일도 배가 불러야 하는 법이니까!”

황보운룡의 확고한 대답에 만족했는지 다시 해맑게 송하가 웃었다.

제법 하늘이 어둑해져 가고 있었지만, 송하의 모습은 마치 햇살처럼 밝아 보였다.

‘……착각이겠지.’

그렇게 오늘의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 * *

늦은 밤.

벌써 자시를 훌쩍 넘긴 시간임에도 양조광의 서재는 불이 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양조광의 생활인지라 주변에서 이상하게 느끼는 자는 없었다.

도리어 양조광 서재의 불이 일찍 꺼진 날을 하인들은 더 불안해했다. 어지간히 몸이 좋지 않지 않은 이상 자리를 쉽게 비우는 분이 아니라는 걸 이미 오래전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즉, 불이 일찍 꺼지는 날은 양조광의 건강과 직결되는 사항이었다. 특별한 손님이 오는 날을 제외하고 말이다.

“단주님.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우선은 운 공자님께서 돌아오셨으니, 며칠 더 지켜봐야 하겠지. 곧바로 움직이기에는 이제 막 회복해서 돌아오신 길인데…… 너무 가혹한 처사구나. 가족들과도 응당 회포를 푸실 시간 정도는 드려야겠지.”

양조광이 붓놀림을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위강은 어딘지 모르게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낀 것처럼 보였다.

“하오나…… 당장 내일입니다. 놈들이 뭘 하려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위강은 잔뜩 걱정되는 표정과 말투였지만, 양조광은 서두르지 않았다.

위강의 말뜻이 무엇인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하나 아무리 운양상단이 송운의 휘하에 들어가 있다고 한들, 모든 것을 송운에게 의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오랜 시간을 타지에서 싸워야 했고, 정신까지 잃었다가 이제야 겨우 가족의 품에 돌아온 송운의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

당장 그들의 무력만으로는 해결이 되기 힘든 일도 크게 없지 않은가. 더불어 이미 이 위치에 오는 동안에도 자신은 끊임없이 송운의 도움을 많이 받아 왔다.

송운에게 목숨을 빚졌고, 상단 표사들의 무공 역시 송운이 직접 창안해 낸 것이다.

애당초 운양상단은 송운을 돕기 위해 만든 것이지, 그의 도움을 받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제는 제대로 그 길을 걸어갈 때가 된 것이다.

“그래서 송하 아가씨와 황보 소협이 가 있지 않으냐. 그 정도 정보쯤은 충분히 알아내 오실 게다. 너무 걱정 말거라. 그분들도 무공이 뒤처지진 않으시는 분들이시니.”

양조광의 말에 선뜻 반박을 하지 못한 위강이 울상을 지었다. 그걸 모른다고 하기엔 위강이 한동안 그들과 대련을 했던 기억이 너무도 생생했기 때문이리라.

확실히 송하도, 황보운룡도 모두 뛰어난 무인이다.

하나, 위강이 걱정되는 면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맞는 말씀이지만…… 자칫 잘못하여 아가씨께 큰일이 생길까 걱정이에요.”

태원상가 주변에 위험이 도사리는 것도 사실이지만, 위강이 말한 것은 바로 송하가 성질을 참지 못하여 불의를 보고 나서진 않을지 하는 우려였다.

“아무리 천방지축이라고 하신들, 송 공자님이 관여되시면 제법 자제하시는 분이 아니더냐? 송 공자님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지는 되도록 지켜만 보라고 말씀드려 놓았으니 큰일은 없겠지.”

“그것 역시…… 에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송 공자님께서 들으시면 당장 뛰어오실 텐데…….”

“벌집을 굳이 들쑤시지 않는다면 당장 큰일이 나지는 않을 터. 더군다나 조 소협과 적 소협께서도 그 근처에 계시니 무슨 일이 생기거든 도움을 주실 거다. 강아, 공자께서 사(師)는 지나치고, 상(商)은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셨느니라. 결국 과유불급인 셈이지.”

양조광의 말에 할 말을 잃은 위강이 잠시 입을 꾹 다문 채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위강의 고뇌가 끝이 나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아. 아무래도…… 그렇겠죠? 태원상가 놈들이 워낙 성격이 더러워서 제가 마음이 너무 급급했나 봅니다.”

위강을 보며 양조광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차를 한잔 우려냈다.

쪼르륵.

“아니다. 누구든 걱정할 만도 하지. 하나, 강이 너는 나이에 맞지 않는 걱정과 생각이 너무 깊다. 때로는 아이다운 모습도 보여다오. 우선 차라도 한잔 들거라. 마음이 불안할 때는 따뜻한 차 한 잔이 제격이니.”

“예…… 단주님.”

결국 위강이 패(敗)를 외쳤다.

양조광의 승이었다.

* * *

이제는 찬 가을의 바람이 불어오는 밤.

어느 이름 모를 마을 주변 일대를 걷던 한 사내가 걸음을 멈춰 섰다.

“아…….”

“혹, 어디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사내의 곁에 있던 여인이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반면 여인의 표정은 점점 불안감으로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불편한 것이라.’

사는 데 불편한 것은 그 무엇도 없었다.

귀찮은 게 있다면 제거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까지도 전부 다 가질 수 있으니 불편할 게 무에 있을까.

‘너무도 평화롭군.’

늘 지내던 곳에서 나와 발길 닿는 대로 세상을 구경하는 것도 제법 재밌었지만, 그것도 이제 슬슬 지겨워지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도 충분히 피를 즐겼다고 생각했거늘 오산이었다.

아직도 그는 피에 굶주렸고, 목이 말랐다.

사내가 새빨간 입술을 혀로 축인 뒤, 앞으로 향했던 고개를 뒤로 돌렸다.

익숙한 얼굴.

독고백이었다.

“역시 심심하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십여 년간 열심히 씨를 뿌려 두었던 혈교가 허망하게 무너졌다. 그에겐 제법 큰 부분을 차지하던 즐거움이 사라진 것이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송운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처음엔 신경도 쓰지 않았던 별로 시작해, 작금 그 어떠한 것보다도 비약적인 발전을 보인 송운이다. 그의 놀라운 성장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독고백의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그것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리라.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로 인해 심심해진 것과는 또 다른 별개의 일.

“하아…… 심심해. 심심하다.”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며 마을 주변을 맴돌기를 반각이 조금 못 되게 흘렀을까.

마치 뭐 마려운 개처럼 정신없이 빙빙 돌며 움직이던 그가 마침내 제자리에 우뚝 섰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그거, 다시 움직여야겠어.”

그리 말을 하는 독고백의 눈빛이 번뜩였다.

딱히 주어는 없었지만, 곁에 서 있던 여인은 거의 본능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는 오랫동안 독고백의 곁에서 살아남은 비결이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느리면 그는 가차 없이 목을 베었으니까.

휘이익-!

독고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인이 입으로 휘파람 소리를 냈다.

타닥.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그림자가 허공에서 나타났다.

신장은 육 척을 거뜬히 넘으며, 머리는 군데군데 세었고, 그럼에도 아직까지 옷을 뚫고 육중한 근육을 유지하고 있는 자.

그가 지면에 착지하기 무섭게 배복하며 독고백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암영(暗影). 주군을 뵙습니다.”

독고백을 따르는 이 중에 얼마 되지 않는 제법 거대한 체구의 소유자였다.

“그래, 암영. 오랜만이구나. 잘 지냈느냐?”

“주군께서도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암영의 안부에 독고백이 양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뭐, 보다시피? 너무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라는 것 빼고는 멀쩡하지.”

꿀꺽.

이전까지만 해도 독고백의 어떤 질의에도 감정이 크게 동요하지 않던 암영이 처음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 말 속에 담긴 의미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독고백의 말에 반응하는 이는 곁에 서 있던 여인과 암영뿐이었다.

그 외의 시녀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듣고도 못 들은 척,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것이 그들의 철칙이니까.

그것 역시도 살아남는 비결이었다.

‘……드디어 다시 움직일 때가 된 것인가.’

암영이 어떤 생각을 하든지 상관없다는 듯 독고백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손가락 끝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몸은 좀 어떠하지? 아직도 옛 명성에 비견할 정도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그저 퇴물일 뿐이지요. 하나 그럼에도 저를 이리 다시 불러 주셔서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주군.”

암영의 낮은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독고백이 코웃음 쳤다. 누구보다 자신의 곁에 오래 있었던 그가 정말 몰랐을까?

집요하게 쫓아오는 이들을 피해, 잠시 흑야를 더 깊고 어두운 곳으로 숨겨 두었을 뿐이다.

그뿐일까?

독고백의 성정상 다시 찾지 않을 장난감이었다면 애당초 그를 살려 두지도 않았을 터.

그걸 잘 아는 암영이 여태 태만하게 몸을 굴렸을 리 없다. 무엇보다 전투가 있어야 스스로가 존재한다고 믿는 이다. 언제든지 잘 벼려진 검날처럼 그의 몸은 겉으로 언뜻 보았음에도 여전히 단단했다.

한참 동안 암영을 주시하던 독고백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꿈틀댔다.

“쿡쿡. 네놈도 젊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어. 나이를 먹더니 이젠 능구렁이가 다 되었구나. 예전 같았다면 하지 않았을 말도 술술 내뱉는 걸 보아하니…… 어차피 내가 언제든 다시 부를 거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을 텐데 말이야.”

“……과찬이십니다.”

“지금 당장 산서성으로 출발해라.”

암영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의 말은 아주 짧고 간결했다.

“산서성이라시면……?”

그의 질의에 독고백의 입가에 큰 미소가 피어올랐다.

“다시 움직일 때가 되지 않았느냐? 이 정도 쉬었으면 다시 재개해야지. 언제까지 놀고먹을 줄 알았나?”

독고백의 말에 암영의 머리가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몸집이 큰 만큼 달에 비친 그림자 역시 컸지만, 그 어느 때보다 고요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주군! 명만 내리십시오.”

그제야 독고백이 만족의 표정을 지었다.

“이제 잠에서 깰 시간이 되었다. 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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