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0화
송하가 신이 난 채로 방을 빠져나가기 무섭게, 양조광이 휘파람을 불었다.
타악-!
얼마 지나지 않아 양조광의 앞에 위강이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강아, 지금 바로 황보 소협을 좀 모셔 오너라. 긴히 할 말이 있다고.”
“네, 알겠습니다. 단주님!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 * *
송운이 깨어난 후 일 주야가 더 흘렀다.
전쟁이 끝난 날로부턴 팔 주야가 흐른 시간이었다.
무림맹은 오히려 전쟁 중일 때보다 더더욱 바빠지기 시작했다. 소극적으로 나왔던 이전과 달리 이제는 본격적으로 수습에 나섰기 때문이다.
혈교와의 전쟁을 끝냈다고 해서 모든 일이 끝난 건 당연히 아니었다.
첫째로 많은 무림 문파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봉문의 위기에 처한 문파도 제법 많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각 문파의 무리를 이어받은 장문인과 장로들이 살아남았다는 점일 터나, 앞으로 그들이 무림에 재기하기 위해선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할 것이다.
한동안 무림의 혼돈은 계속될 터.
그러는 와중에도 화산파는 꿋꿋하게 입장 표명을 하지 않은 채로 문을 닫고 있으니 서로에 대한 경계가 강화된 상태였다.
더불어 혈교와의 전쟁에선 강시를 다루는 공손우경이 사라졌으며, 가장 중요한 진천후의 시신이 사라졌다.
시신은 분명 공손우경이 가져갔을 가능성이 컸다.
공손우경이 강시를 만들어 낸 자이기에 이번 전쟁처럼 또다시 생길지 모를 후환을 단절하기 위하여 그를 추적할 새로운 단이 꾸려졌다.
하나 이는 단지 무림맹만의 일은 아니었다.
황궁 역시 곳곳에 피해를 입은 백성들을 위해 복구 작업에 돌입해야 한다. 많은 장수들과 병사들이 죽었기에, 전사한 이들의 가족들에게 줄 위로문과 위로금도 준비해야 한다.
그렇게 모두가 바쁠 무렵, 송운은 그사이 스스로의 몸 상태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쓰러지기 전에 비해서 훨씬 몸이 가볍고, 내공이 모이는 속도가 더 빨라진 것이다.
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송운이 조심스레 주변의 기를 운용해 보았다.
웅-
허공에 날리는 기들이 송운의 단전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주변과 하나로 일체된 것이다.
하나 송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더…… 더 많이.’
단순히 주변에 널린 기만 가져오는 것만이 아닌, 그들이 지닌 기를 쥐어 짜내는 게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모이는 속도가 빨라질 수밖에.
그뿐이랴?
고유의 기가 가지고 있는 무형의 형태를 송운의 의지대로 조금씩 변형시키는 것 역시 가능해졌다.
예를 들자면 허공에 내공으로 만든 검을 만들어 내는 게 가능해진 것이다. 아직은 미약하나 계속해서 연마하게 된다면 더 선명하고 오랜 지속이 가능해질 터.
‘정녕…… 이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누군가 말해 주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두근두근.
생각만으로도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묘하게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서 다시 눈을 감은 채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무의식의 공간에서는 느끼고만 있었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결론이 나는 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현경!
드디어 조화경의 벽을 뚫고 현경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다른 이들은 느끼지 못했을 테지만 송운은 진천후와 맞부딪히던 순간 생과 사를 빠르게 오갔다.
그대로 송운은 무의식에 빠져들었고, 그곳에서 결국 새 벽을 부숴 냈다.
무인으로서 이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때, 누군가 송운의 어깨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가가,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세요?”
“아, 아니오. 잠시 딴생각을 좀 했구려. 그간 마음고생이 많았소. 란 매.”
단둘만이 남은 공간에서 송운이 평서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미안함이 베인 송운의 표정에 평서란이 미소 지었다.
“당연히 깨어나실 거라고 믿었어요. 늘 그러셨듯이요.”
“허어…… 늘 그랬다니 더 미안해지는구려.”
“후후. 알고 계시다면 다행이고요.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아,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송운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평서란이 답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우리는 돌아가면 돼요. 아직 무림맹에 남은 일이 있어, 마무리 짓기 위해서 조금 더 머무른 것뿐이라고 알고 계실 거예요. 가가. 이제 우리 집으로 돌아가요.”
“당연히 그래야겠지. 우리가 무림맹에 더는 남아 있을 연유가 없으니 말이오. 빠르게 작별 인사를 마치고 와야겠구려.”
“그럼 그사이에 전 떠날 채비를 할게요.”
아직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지만, 길고 긴 여정을 끝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송운은 황궁으로 돌아가기 전, 그간 함께했던 이들을 한 명, 한 명 직접 대면했다. 만남은 결코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 테지만, 이번에 황궁으로 돌아가면 언제 이곳으로 올 수 있을지는 그 역시 미지수였으니 말이다.
이미 백능과 제갈염은 맨 처음으로 보고 왔기에, 이젠 오룡일봉만 만나면 모든 일정은 끝이었다.
백길은 불자답게 입가에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이라. 돌아가시는 길 무사 귀환하시기 바랍니다.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백길 스님.”
그중에서도 남궁장후와 당무옥이 유독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다음번엔 저희가 북경으로 찾아가겠습니다. 형님.”
“언제든지 환영이지. 오게 되면 꼭 연락해.”
“……꼭 다시 봅시다. 대주.”
“음, 이거 누가 보면 내가 죽으러 가는 줄 알겠습니다. 하하.”
“아니, 뭐 딱히 그런 뜻은 아닌데…… 아, 아무튼! 조심히 가시라고요.”
우물쭈물하는 당무옥을 뒤로하고 송운이 계속해서 주변을 훑었다.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탓이다.
‘한데 곽 소협이 보이질 않는구나.’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이번 전쟁에서 화산파는 무림맹에 등을 돌렸다.
화산파는 그의 본문이니 마냥 모른 척할 수는 없는 일일 터.
하면 그 역시도 배신자란 말인가?
그렇다고 멋대로 단정 짓기는 이르다. 직접 묻고 싶었지만, 혹여나 오룡일봉의 아픈 곳을 찌르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에 물으려던 행위를 그만두었다.
이제 이곳의 일은 그들의 방식으로 해결해야 할 터.
여러 마음을 고스란히 머금은 채, 송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 길은 멀고, 자신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이 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혹여라도 무슨 일이 있거든 언제든지 서신 하십시오. 만사 제쳐두고 바로 달려오겠습니다.”
“황궁으로 가시면 또다시 바쁜 몸이 아니십니까. 그간 감사했습니다, 송 소협. 부디 가시는 길 몸조심하십시오. 아직 무림의 전쟁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모두가 아쉬움의 여운에 젖어 있을 무렵, 팽후영이 날카롭게 날이 선 목소리로 작별 인사 겸 조언을 날렸다.
“물론 송 소협의 실력이시라면 무난히 지나가실 테지만요.”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나 매섭진 않았다.
팽후영은 본디 정을 쉽게 주지 않는다. 그건 그간 송운이 팽후영을 지켜보고 내린 결론이다.
지금의 말은 그녀 나름의 헤어짐의 인사법인 듯했다.
“팽 소저께서도 잘 지내십시오. 그럼 정말 가보겠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인 송운이 뒤돌아섰다.
펄럭-
송운의 옷깃을 서늘한 바람이 스치며 지나갔다.
‘……바람이 제법 차군.’
추위를 느끼진 않지만 차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아직은 추운 봄이었다. 그리고 당금은 어느덧 가을의 쌀쌀한 바람이 일고 있지 않은가.
치열했던 지난 몇 달간의 기억이 바람과 함께 송운의 뇌리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 * *
“왜! 어째서 안 된다는 것이야!”
쾅!
쩌저적. 쿵.
분노에 젖은 목소리와 함께 물건이 박살 나는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벌써 오늘만 세 번째 부서진 탁상이었다.
‘아……! 저건 진짜 비싼 것인데! 크흑…….’
쓰라린 마음을 부여잡고 장보흠이 입을 열었다.
“아, 아무래도 역시 저희 일이 장주들의 귀에 닿은 모양입니다. 정보가 워낙 빠른 자들인지라…….”
“설마 당금 내가 그걸 몰라서 묻는다고 생각하는 게냐? 그런 걸 해결하라고 놔둔 게 네놈 아니더냐! 전장이 아니고 뒷길을 뚫어서라도 돈을 빌려 오란 말이다! 네놈들 정녕 싹 다 죽고 싶은 게야?!”
쿵!
더는 염의문의 화를 누그러뜨릴 수 없다고 판단을 내렸는지 장보흠이 맨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염의문은 높은 무공에 올라선 자다. 잘못하면 장보흠이라고 해서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송구합니다. 장문인!”
“후욱, 후욱……! 이리 머리를 쓸 줄을 몰라서야. 쯔쯧. 아무리 무인은 검만 잘 다루면 된다고 한들, 이건 무식이 도를 지나치지 않았더냐? 이리 무능한 자들을 데리고 있었으니…… 허! 꼴도 보기 싫으니 썩 꺼져라!”
“예. 장문인!”
그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가려던 그때, 염의문이 또다시 장보흠을 불러 세웠다.
“거기, 잠깐! 멈춰 서라.”
‘왜, 또 뭘 어쩌시려고…… 끄응!’
하나 그는 속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서글서글한 눈매를 한 채 몸을 틀어 염의문 쪽으로 향했다.
“예, 예. 말씀하시지요.”
“이자는 훗날 두 배로 쳐줄 테니 이번엔 반드시 돈을 빌려 오거라. 안되면…… 죽여서라도 채워 와.”
말을 마친 염의문이 품 안에서 천에 쌓인 무언가를 던졌다.
탱그르르르. 깡!
그가 던진 물건은 그대로 땅을 한참을 구르다 장보흠의 발 앞에 부딪히고 나서야 멈추었다.
구르면서 흐트러진 천 내부의 물건이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반짝.
‘이건……?’
순간 장보흠의 눈빛이 번쩍였다.
재화를 담당하는 그인 만큼, 물건을 알아보는 눈썰미는 제법이었다.
굳이 듣지 않아도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타구봉?”
“어차피 우리에겐 이미 쓸모없는 것이다. 하나 놈들에겐 목숨보다 귀중한 것이지. 다들 개방이 어마어마한 돈을 주고서라도 반드시 되찾으려 할 것이란 것쯤은 알고 있을 게다.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라면 제법 값어치를 높게 매기겠지. 혹여라도 터무니없는 금액을 부르면 도로 가져오도록.”
“송구하오나 장문인. 터무니없는 금액은 얼마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끄응…… 이런 것까지도 내가 일일이 말을 해 줘야 하다니. 금 오백 냥. 그 이하는 안 된다.”
“그, 금 오백 냥! 쿨럭!”
“그놈을 붙여 주마. 그러니 잔말 말고 다녀오거라. 명심하거라. 금 오백 냥 이상이다.”
염의문의 동공에 표독스러움이 묻어났다.
* * *
무림맹을 벗어나기 무섭게 최대한 빠르게 달리던 송운은 곧 평서란에게 맞추어 속도를 줄였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힘을 썼지만, 눈치 빠른 평서란이 못 알아챘을 리는 없었다.
“하아…… 그사이 더 느셨네요.”
“그런가? 하하. 내 누워 있던 며칠 동안 기력이 솟구친 모양이오.”
“으음, 그 말 정말 믿어도 되나요? 그렇다고 지긴 싫어요. 다시 속력 내세요. 따라갈게요. 아니면 내기라도 하실래요?”
“정말 괜찮겠소?”
“후후. 저도 이래 봬도 제법 실력이 좋다고요. 설마 그사이에 잊으신 건 아니겠죠? 가가?”
“그럴 리가. 하나 걱정이 돼서…….”
“전 괜찮으니까 내기해요. 누가 먼저 북경에 도착하는지요.”
평서란의 얼굴을 돌아보니 진심인 듯했다.
물론 오랜만에 가는 집이니만큼 평서란 역시 빠르게 가고 싶은 마음도 한몫했으리라.
송운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알겠소. 그럼, 나도 속력 좀 내 볼까? 북경에서 보도록 하지.”
두 사람 모두 그 말을 기점으로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마치 지금까지는 장난이라도 쳤다는 듯이.
그렇게 둘의 신형이 공중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