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전생-249화 (249/275)

제249화

번쩍!

어두컴컴하기만 했던 그의 세상에 조금씩 빛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송운은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움찔거리며 손으로 빛을 가렸다.

‘……음.’

너무 오랜만에 빛을 본 탓에 몹시 눈이 부신 것도 아주 잠시.

송운은 금세 빛에 다시 적응했다.

원래부터 많은 시간을 어둠보다 빛에 적응해 온 그이기에 당연한 이치였다. 그리고 빛이 주는 포근함은 송운의 전신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듯했다.

이미 일전에도 겪어 본 적이 있는 현상이니 그다지 놀랍거나 두렵진 않았다.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건 곧, 일어날 것이라는 뜻이다.

‘이제 정말 깨어날 때가 된 것 같구나.’

송운이 조심스레 자신의 왼손을 조금씩 오므렸다 폈다를 반복했다. 그러자 여태껏 자신이 이 공간 속에서 움직였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방금 전 빛을 손으로 가렸을 때와는 전혀 다른 신경이었다. 무의식 세상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어둠보다는 빛이 더욱더 커져 갈 무렵.

송운의 귓가에 커다란 음성이 들려왔다.

“우…… 우, 움직입니다!”

어찌나 우렁찬지 귀가 일순간 멍해질 지경이다.

‘누군지 참 목청 한번 크군.’

양쪽 귀를 막고 싶을 만큼 말이다.

* * *

누군가가 송운을 가리키며 소리 질렀다.

동시에 송운의 주변에 잔뜩 모여들었던 장로들의 동공이 점점 확장됐다. 절대로 깨지 않을 것만 같던 송운의 육체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드디어 깨어나는구먼.”

“다행입니다. 정말 기적처럼 딱 맞춰서 일어나는군요.”

제갈염이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송운을 중심으로 이 너른 공간에 생명의 충만함이 절로 주변에 일파만파 퍼지기 시작한다.

참으로 신기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다들 이상한 느낌에 웅성거리고 있을 무렵.

평서란이 곧바로 송운의 오른쪽 손을 잡았다.

그녀 역시 그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송운이 깨어나고 있다는 것을.

‘조금만 더 힘내세요. 가가.’

모두가 숨을 죽인 그때.

송운의 눈이 번쩍 뜨였다.

“가가!”

“란…… 매?”

눈을 완전히 뜬 송운이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아 메마른 듯한 목소리로 평서란을 불렀다.

“네. 저예요. 운 가가. 정신이 좀 드세요?”

“……그렇소. 여기는 어디요?”

평서란은 혹여나 이제 막 깨어난 송운이 알아듣지 못할까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그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무림맹 내부예요. 쓰러지신 후 곧장 이곳으로 모셔 온 거예요.”

“허참……! 이럴 거면 진즉 일어날 것이지! 쯧!”

“가세나!”

“일어났구만, 일어났어.”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장로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송운이 눈까지 뜬 마당에 이곳에서 더 얻을 것도, 구경할 거리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방을 꽉 차게 메우고 있던 이들이 순식간에 빠지자 안에는 극히 소수만이 남아 있었다.

송운은 주변의 기운을 싹 한번 훑은 후, 몸을 천천히 일으키기 시작했다.

“가가, 아직은 누워 계시는 게…….”

“괜찮소. 너무 오랫동안 누워 있었더니 온몸이 다 뻐근하구려.”

“정말, 괜찮으신 거죠?”

“정말 괜찮소. 더 빨리 깨지 못해 미안하오. 란 매.”

송운이 살포시 평서란의 두 손을 잡아 주었다.

불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은 듯 누워 있기만 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쌩쌩한 모습이다.

“아니에요. 당금이라도 깨셨으니 그걸로 됐어요.”

“내가 누워 있은 지 얼마나 지났지?”

“오늘로 딱 칠 주야일세.”

“아, 총군사님.”

이번에 답한 건 평서란이 아닌 제갈염이었다.

‘칠 주야라……. 생각보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얼마 흐르지 않았군.’

송운은 속으로 시간을 곱씹어 보았다.

분명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더 많은 시간이 흘렀다고 믿고 있었다.

한데 겨우 칠 주야다.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제 욕심으로 인해 많은 이들을 곤란하게 만든 건 아닌지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제갈염의 뒤에서 백능이 다가왔다.

“깨어나 줘서 정말로 고맙소이다. 그리고 또…… 미안하오. 송 소협에게 모든 걸 떠맡긴 것 같아서 말이오. 원하는 게 있다면 무림맹의 이름을 걸고 무엇이든 하나를 들어주겠소.”

“과한 처사십니다. 무림맹의 일이 아니라 중원의 일이었지 않습니까? 맹주님. 마음만 받겠습니다.”

“허허……! 자네는 참으로 된 사람이구려. 일단은 쉬도록 자리를 피해 주지. 다들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맹주님.”

“감사합니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 * *

쾅!

누군가의 등장으로 인해 조용하던 양조광의 방 안이 시끄러워졌다.

양조광의 찻잔에 차를 따르고 있던 시녀가 놀란 채 문을 바라보자 익숙한 얼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송하였다.

“아가씨.”

위풍당당한 표정으로 들어온 송하가 양조광의 앞에 자리 잡았다.

“차를 내올까요?”

“아니, 괜찮아. 아…… 저기 미안한데 자리 좀 비켜 줄래?”

송하의 말에 머뭇거리던 시녀를 향해 양조광이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드르륵.

탁.

시녀가 물러나기 무섭게, 송하가 본론을 꺼내 들었다.

“조광 오빠, 이번 일은 우리가 나설게.”

“……?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번 전쟁에서는 정말 손 놓은 채 아무것도 돕지 못했다고. 알잖아.”

장난기 묻은 얼굴이 제법 진지하게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나 그쪽의 일은 아직 완전히 파악도 되기 전입니다. 그런 위험한 곳으로 아가씨를 보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양조광이 조곤조곤 타이르는 말투로 말했지만, 송하는 굳게 맹세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위험하다는 사실은 나도 알아. 하지만 무인이 언제까지 안전한 곳만을 찾아다닐 수는 없는 거잖아. 나도 오빠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줘.”

“……아가씨.”

“나 더 이상 옛날의 코 찔찔이 어린애가 아니라 이제 곧 열여덟이야. 언제까지 큰오빠 밑에서 보호만 받고 있을 수는 없잖아? 오빠는 항상 우리 때문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는 거 이젠 다 알아. 더 이상 짐만 되고 싶지 않아.”

“아가씨가 짐이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누가 그런 말을 합니까?”

“주변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이.”

“……아가씨.”

“조광 오빠. 어리다고 해서 다 모르는 건 아니야. 어릴 때부터 오빠는 늘 우리를 지키려다 다쳤어. 그리고…… 이번 역시도 마찬가지잖아.”

잠시 주먹을 쥔 채 바닥을 쳐다보며 머뭇거리던 송하가 마지막 말을 이었을 때, 양조광은 마치 머리에 망치를 얻어맞은 듯 띵해졌다.

아직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진실이었다.

심지어는 황궁에조차도.

그날 송운이 쓰러지는 걸 직접 목격한 이는 극히 극소수였다. 전쟁인지라 원체 정신이 없기도 했고, 쓰러지기 무섭게 평서란이 경공을 펼쳐 무림맹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다만 양조광과 송운이 특별한 사이임을 익히 알고 있던 제갈염이 양조광에게만 몰래 귀띔하여, 양측이 입을 맞춘 상태였다.

한데 이미 송하는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했다.

아니, 확실히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 아신 겁니까?”

“약 오 주야 전에 무림맹에서 온 서신을 봤어. 미안. 보려고 봤던 건 아니었어. 진작 말을 했어야 했는데…… 근데 오빠가…… 오빠가 또…….”

당당했던 음성이 미세하게 떨려오는 송하의 양어깨를 양조광이 꽉 붙잡았다. 여태 속으로 말도 못 하고 앓았을 생각을 하니, 마음 한편이 짠해 왔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크게 다치신 곳도 없고 의원이 단지 의식을 잃으신 것뿐이라 했습니다.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테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그 말…… 정말이지?”

“당연하지요. 저는 아가씨에게 거짓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응…… 알고 있어.”

쪼르륵.

힘없이 축 늘어지는 송하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양조광이 옆에 있던 찻잔 하나를 더 꺼내 들어 차를 따라 낸 후, 송하에게 건네주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약간 식은 감은 있었지만 아직 따뜻한 온기는 충분했다.

덕분에 불안정하던 송하의 마음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한데 우리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송하가 안정을 찾는 것을 지켜보던 양조광이 물었다.

송하가 우리라고 할 만한 이는 뻔히 눈에 보였지만, 확실히 하기 위해 한 번 더 물어본 것이었다.

이내 송하가 작게 말했다.

“……황보 소협.”

양조광의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황보 소협께서 직접 말씀하신 겁니까?”

“응! 나보다 뛰어난 황보 소협이랑 함께하면 위험도 좀 줄어들지 않을까? 혹시라도 큰일이 생긴다면 바로 보고할게. 응?”

양조광의 질문에 송하의 얼굴이 아주 찰나의 순간, 발그레해졌다 사라졌다.

최근 둘의 사이가 급격하게 진전했다는 사실은 운양 상단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소식이다.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시간을 둘은 함께 보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수련 시간이 가장 많긴 했지만 말이다.

이를 모른다면 간첩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정작 본인들만 모른다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송하는 좀 전의 우울한 모습과는 달리 마치 천군만마를 등에 업은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게다가 당금 우리 운양 상단 측 무인이 모자라는데 돈을 굳이 더 들여서 용병을 구하는 것보다 우리가 나서는 게 낫지 않을까? 어린애도 아닌데 이제 나도 밥값은 해야지! 황보 소협도 그렇다고 했고.”

확실히 송하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적돈과 조총.

서사와 우곤이 직접 발로 뛰고 있긴 하지만, 산서성 전체를 다 둘러보기에는 그 손이 너무도 부족한 실정이었다.

더구나 운양 상단은 말 그대로 상단이다.

언제까지 산서성만 지켜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더구나 이런 중요한 일을 해내기에는 되도록 돈에 마음이 움직이는 자들보다는 확실한 우군이 마음이 놓이는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결국 양조광은 송하의 제안을 거절하기 어려운 위치에 놓인 것이다.

‘확실히 황보 소협이 함께 다닌다면 마음을 좀 더 놓을 수 있을 테지…….’

송운 다음으로 천하 무림 대회에서 가장 활약을 보인 자.

송운이 송하를 맡길 정도로 믿음직한 자.

그게 바로 황보운룡이다.

반은 포기한 표정, 나머지 반은 웃는 표정이 된 양조광이 고개를 주억였다.

결국 송하를 이기지 못한 것이다.

하나 그것과는 별개로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숨은 어쩔 수 없는 듯했다.

“하아…… 알겠습니다.”

“정말?! 정말이지? 무르기 없기야?”

양조광의 허락이 떨어지자 송하는 마치 당과를 한 줌 쥐어 문 아이처럼 신나서 팔짝팔짝 뛰어 댔다.

“대신 약조 하나 해 주십시오.”

“알겠어. 말만 해!”

이미 들뜬 송하로서는 약조 하나가 무에 대수냐는 듯 양조광을 주시했다.

“송 공자님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지는 최대한 몸을 사리셔야 합니다. 싸움은 최대한 피하시고 그쪽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 힘써 주십시오.”

말과는 달리 조금 긴장한 듯 보였던 송하가 양조광의 말을 다 듣고 난 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알았어. 그건 절대 걱정하지 마!”

너무 당찬 그녀의 모습에 양조광이 작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걱정이 절대 되지만…… 믿어 보겠습니다. 송하 아가씨.’

그리곤 한동안 많은 업무와 걱정으로 시달렸던 양조광의 얼굴에 자그마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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