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8화
“하오나, 맹주님. 완전히 와해시킨다면 곳곳에서 크고 작은 반발이 터져 나올 겁니다. 게다가 아직 화산파의 일도 처리가 되지 않은 상태가 아닙니까?”
걱정이 가득 담긴 제갈염이 그를 만류했다.
단순히 총군사라는 직책을 잃기 싫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어차피 제갈염은 결국 제갈세가의 사람이다. 돌아갈 곳은 얼마든지 있었다. 정말로, 진심으로 백능을 따르기 때문에 걱정하는 것이다.
그 역시 무림맹의 개편을 누구보다 바라던 이들 중 한 명이었으니 말이다.
백능이 자신의 눈앞에 놓인 사과 하나를 들어 올리더니, 그 사과를 반으로 쪼개 버렸다.
와그작!
“보았는가? 이미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드러낸 시기에 더는 억지로 붙어서 서로의 내면을 가린 채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을 뿐일세. 자네 말대로 이번에 많은 걸 듣고 고민해 보았지. 하나 이것만큼 명확한 답은 없더구먼. 썩은 부위를 도려내려고 마음먹고 보니 절반 이상이 썩어 버렸으니…… 도려내려면 결국 이렇게 반으로 쪼개지기 마련이야. 진즉에 했어야 할 일을 내가 너무 어리석었어…… 참으로 어리석었네.”
백능의 눈가가 지난날의 회상으로 젖어 들었다.
“……맹주님.”
“허허, 이거 늙으니 괜한 주책만 느는구먼. 자네 앞에서 이런 추한 모습을 보일 줄이야.”
백능이 쪼갠 사과를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제법 오랜 세월을 그의 곁에서 일했으나, 백능에게서는 처음 보는 나약해진 모습이었다.
같아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나도 잘 알고 있네. 비록 이 늙은이에게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으나 당장 하겠다는 말은 아니야. 일의 마무리가 되면 곧바로 진행될 수 있도록 조금씩 준비를 해 주게. 그토록 오랜 세월을 무림맹에 바쳤건만, 이제 내 곁에서 믿을 만한 이는 자네밖에 없는 것 같구먼.”
한참을 말없이 서 있던 제갈염은 결국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그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무림맹이다.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참으로 고맙네.”
* * *
“이 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X발! 닥쳐라! 망할 개자식들 같으니라고. 큰소리 떵떵 치더니 잘하는 꼴이군!”
지금 상황에선 화산파야말로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토사구팽을 당했다면 당장 달려가 멱살이라도 쥐고 흔들어 볼 테지만, 그의 분노의 대상은 이미 모두 죽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히 혈교가 이길 것이라 믿고 있었는데, 너무도 어이없게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 더 몸을 사렸을 것이다. 아니, 하다못해 끄나풀이라도 만들어 두었을 터.
과도한 자신감이 일을 그르친 것이다.
“대체 송운이라는 새끼는 뭐 하는 자식이기에 혈교를 이리 몽땅 박살을 내놓느냔 말이다!”
쾅!
우지끈!
결국 분노에 찬 양의문이 눈앞에 있던 탁자를 주먹으로 내려찍었다.
두꺼운 나무에 겉면은 번쩍번쩍 빛나는 옻으로 칠해져 있었으며, 중간중간 새겨진 특이한 문양에 순금이 박혀 있었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탁자가 부서지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누군가의 속이 잔뜩 쓰려 왔다.
‘저 멀리 색목인들에게서 들여온 비, 비싼 탁자이거늘……!’
화산파의 곳간인 재화수전(財貨數殿)의 전주인 장보흠(張甫欽)이었다.
장보흠은 양의문의 행위에 안절부절못하며 난감한 눈빛을 머금었다. 이미 이번 일로 인해 제법 많은 재화가 소비된 화산파였다.
그뿐이랴?
내일이라도 당장 무림에서 매장을 당하게 생긴 판국에 물건을 부수다니!
무림의 공적이 되면 어지간한 전장들은 모두 발길을 끊어 버릴 것이다.
애당초 돈을 빌릴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그곳엔 무림맹에서 파견된 무인들이 있을 테니 함부로 가서 깽판을 놓을 수도 없다.
그리되면 당장 돈을 융통할 만한 곳은 뒷돈을 빌려주는 이들밖에 남지 않게 된다.
하나 그들이 돈을 쉬이 내주지 않는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장보흠이다.
그것은 아무리 화산파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배신자라는 오명(汚名)을 입은 상태로는 더더욱 말이다. 반드시 뭔가 큰 조건을 걸 테고, 이율 역시 어떻게든 더 잡아먹으려 용을 쓸 테니까.
만만치 않을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화산파는 여전히 많은 무인을 데리고 있으나, 대외적으론 날개 잃고 땅에 떨어진 신세.
이빨 빠진 호랑이에게 처우가 별반 다를 건 없으리라.
그렇다면 당연히 재물 하나하나 아껴야 할 시기가 아닌가?
도대체 장문인이라는 자가 제정신인 것인가?
속으로 질문을 한 지 얼마 가지 않아 그는 양의문 몰래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아니지. 제정신이실 리가 없지.’
실상 믿고 있던 혈교가 완전히 박살이 났다.
이미 향섬문을 열어 준 것이 화산파의 소행이라는 사실은 전 무림에 일파만파 퍼진 상태였다.
계획한 대로라면 화산파는 혈교가 무림맹을 완전히 밀어버릴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가 그걸 냉큼 한입에 삼키는 것이었다.
한데 그런 혈교가 풍비박산 났으니 이젠 닭 쫓던 개보다 못한 신세가 된 것이다.
장보흠이 그래도 저 불똥이 모조리 자신에게 튀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그때.
양의문이 그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너!”
“예, 예……?! 딸꾹!”
“뭔 생각을 했기에 이리 놀라는 것이냐?”
“아닙니다! 말씀하시지요, 장문인.”
장보흠이 손뼉을 마주치며 비굴하게 웃기 시작했다.
* * *
조용하던 운양상단에 토실토실한 무언가가 굴러 들어왔다. 적돈이었다.
그는 곧바로 양조광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단주님, 접니다.”
“들어오십시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오늘도 어김없이 서류를 검토 중이던 양조광과 마주할 수 있었다.
“태원상가의 가주 오사달께서 오늘 오초에 운명하셨습니다.”
“……!”
평소와 같던 양조광의 안면 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납치되었던 날 이후로 딱 한 번 더 얼굴을 본 사이긴 하나, 그의 성품을 제법 높이 샀던 양조광이다.
‘이런……! 결국 오사달 어르신께서 돌아가셨단 말인가.’
오사달의 죽음은 제법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그간 오사달이 있어 오사총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던 것이다. 한데 이제는 가주이던 오사달이 죽었으니, 당연히 소가주던 오사총이 가주가 된다.
산서성에 있는 사파들이 이번 일로 인해 날개를 단 듯 활개를 치게 될 것이 눈에 선했다.
현재 산서성을 제외한 다른 하북성과 하남성에 있는 사파들은 이번 중원과 혈교의 싸움을 틈타 이미 그 움직임을 활발히 보이고 있다.
하북성에선 황궁의 눈길을 피해 뒷골목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물론 뒷골목에 눈이 밝은 서사가 나서서 선수를 치고 있으나, 이익을 우선으로 두고 하루하루를 먹고 사는 그들에게 어디까지 먹힐지는 의문이다.
사파가 아주 적은 금액이라도 쥐여 주며 일거리를 던져 주고, 부려 먹기 시작한다면 막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또한 운양상단과 회원장가가 직접 나서서 조금씩 제제하고 있는 상황이긴 하나, 산서성까지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면 더 버거운 일이 될 터.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하남성에는 소림사가 굳건히 버텨 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무림맹주가 직접 나서서 명을 전하기도 했고, 소림사 역시 자신들의 영역에서 사파가 돌아다니는 걸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 그것만으론 역시 부족하구나.’
사파 중에서도 일부 무위가 높은 이들이 서서히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치 이때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이 말이다.
양조광의 머릿속에 좋지 않은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오사총이 보호를 명목으로 사파에게 부탁을 하고, 사파는 처음에는 음식을, 그다음엔 돈을, 종국에는 오사총에게 상권을 빼앗을 것이다. 멍청한 오사총은 분명 절반을 내주겠다고 할 테지.’
어느 순간 규모가 커져 버린 사파에게 태원상가가 잡아먹힐 것이다.
그리된다면 태원상가에게서 약조한 산서성 절반의 상권 역시 다시 빼앗기게 되는 셈이다.
단순한 걱정이면 좋을 테지만, 그쯤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양조광이 미간을 찌푸렸다.
송운이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받아 온 선물이자 대가를 다시 빼앗길 수는 없는 법.
“상황이 썩 좋지 않군요.”
“어찌할까요?”
평소라면 밥을 찾기 바쁠 적돈도 오늘만큼은 진지했다.
“조 소협께선 어디 계십니까?”
“아마 그곳에서 대기 중 일 겁니다.”
그곳이라 함은 태원상가 근처일 터.
“아직 송 공자께서 돌아오지 못하셨습니다. 그사이 우리는 이 일을 최대한 막아야 합니다. 적 소협께서 먼저 출발하시면 곧장 저희 표사들도 보내 놓겠습니다. 사파들이 크기 전에 처리해야 합니다.”
이에 적돈이 두꺼운 목을 주억였다.
“알겠습니다, 단주님.”
“부탁드리겠습니다.”
쿵.
그렇게 두 사람의 눈빛이 서로 오갔고 적돈은 순식간에 다시 본인의 육중한 몸을 움직여 뛰기 시작했다. 표사들도 따라가지 못하는 속력이다.
멀어져 가는 적돈을 향해 바라보며 양조광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부디 송 공자님께서 오실 때까지만 이라도 버텨 주세요.’
* * *
무림맹의 중심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웅성웅성.
그 속에는 백능도 있었고, 제갈염도 있었다. 평서란은 여전히 송운의 곁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 외로도 많은 장로들이 얼굴을 비쳤다.
대부분 장로가 속으로 외치고 있는 말은 하나같이 ‘어서 되돌려 보내자’였다. 본디 환자의 안정을 취하기 위해 아무나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었으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소란 속에서 누군가 크게 외쳤다.
“이제 곧 자정입니다!”
아직까지도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듯 송운은 고요했다. 작은 손가락의 미동조차 없었다.
그저 사람이라면 응당 해야 할 호흡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얼굴은 너무도 평안해 보였다.
‘어서 일어나세요, 운 가가.’
이제 일각 후면 약속했던 자정이다.
“……쯧, 영웅이 되면 뭐 하는가? 일어나질 못하는데.”
“그러게 말일세. 몸엔 이상이 없다는데 어찌 깨질 못해? 혹시 우리 무림맹을 모두 엿 먹이려고 이러는 건 아닌지 이젠 심히 의심스럽네. 에잉.”
태연한 척 송운의 곁에 서 있었지만, 사람들의 이기적인 목소리가 평서란의 심장을 쿡쿡 찔러 댔다. 물론 아닌 이들도 있었지만, 좋은 말보단 나쁜 말이 먼저 귀에 닿는 게 사람 마음이 아닌가.
‘일어나실 거야. 이 자리에서, 반드시.’
평서란이 이를 꽉 깨물었다.
“……이곳은 환자가 있는 곳입니다. 소란을 일으키실 거라면 나가서 기다리세요.”
“허어, 거참! 내 입 가지고 말도 못 하나 그래?”
“크흠…… 이거 무서워서 원!”
황궁의 사람인 만큼 대놓고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평서란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평 소저의 말이 맞습니다. 모두 자중하시고 기다리시지요.”
결국 그 꼴을 보다 못한 제갈염이 나서서 한마디 거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점점 흐르고 있었다.
정말 자정까지는 코앞이었다.
그리고 그때.
꿈틀.
“……어어?”
누군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벅벅 비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