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7화
“……형님.”
“쉬이- 조용히 하거라! 다 들리겠다!”
하나, 말리는 목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아무래도 형님 목소리가 더 큰 것 같은데요.’
적돈은 전혀 조용히 말하는 음성이 아닌 것 같은 조총을 한심한 듯 보며, 지방에 파묻혀 거의 보이지 않는 목을 아주 짧게 좌우로 내저었다. 거의 눈에 띄지 않아 쉽게 알아채지 못할 법함에도 불구하고 조총은 이를 곧바로 눈치챘다.
“막내, 너! 방금 나 한심하다고 생각했지?!”
아주 작은 행동이었지만 평소 말수가 많지 않은 적돈이기에 이미 그의 행동만을 보고 생각을 파악하는 데는 도가 튼 조총이다.
물론 적돈이 말수가 적은 게 결코 얌전한 성격이어서는 아니다. 단지 말을 많이 하게 되면 지방이 소모되고 금세 배가 꺼지니 그것이 싫어 말을 아끼는 것뿐이다.
누군가 이 이유를 듣는다면 한없이 어이없어질 테지만, 적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럴 리가요.”
적돈이 완강히 거부하니 더는 조총도 캐지 못했다.
게다가 작금의 중요도는 적돈이 자신을 비웃었느냐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다. 수사에 착수하여 상황을 보고하는 것이 주요 핵심이었다.
잠시 노닥거리던 스스로를 발견한 조총이 다시 정면을 주시했다.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조총을 보내라 했겠지만, 미세한 소리 하나까지 담아 듣는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우렁차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는 듯했다.
아니, 어쩌면 평생 알지 못하고 죽으리라.
그런 그의 행동은 여실히 드러났다.
“한데…… 아무래도 오늘따라 저놈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그렇지 않느냐? 아우야?”
그 모습에 적돈이 다시 한번 고개를 내저었다. 이를 놓칠 조총이 아니었다.
“너, 너 임마. 하늘 같은 형님에게 그러는 거 아니……! 읍!”
“……쉿.”
조총이 발끈한 채 적돈의 목에 팔을 걸려던 순간이었다.
적돈이 무언가 눈치챘는지 조총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남은 한 손으로는 자신들이 바라보지 않던 반대편을 가리켰다.
덕분에 짭조름한 맛이 입안에 잔뜩 녹아들었지만, 조총은 뭐라 불만 한번 내뿜지 못하고 앞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초상집에서 들리는 익숙한 곡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이고오! 어르신!”
“어르신!”
“아, 아버지이이! 정신 차리십쇼! 흐어어헝! 아버지이!!”
“여봐라! 담당 의원 놈을 당장 데리고 와 모가지를 내려쳐라!!”
“예!”
그랬다.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말 듯 함에도 불구하고 꽤나 오랫동안 버티던 오사달이 결국 눈을 감은 것이다. 그간 사파들이 눈에 띄게 활동을 하지 못했던 연유도 오사달이 아직까지 숨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오사달이 죽었으니, 이쪽의 앞날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사파와 손을 잡고 어떻게든 자신들의 상권을 되찾으려 발버둥 칠 것이다.
조총과 적돈의 마음에 좋지 않은 불안감이 동시에 싹텄다.
‘……놈들이 움직인다.’
적돈과 조총의 임무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적돈아, 네가 발이 빠르니 먼저 가서 소식을 전하거라. 어서!”
* * *
‘……하아암.’
어느새 이 생활에 완벽하게 적응한 송운이 하품과 함께 한껏 기지개를 켰다. 딱히 잠을 자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졸려서는 아니었다. 그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인간의 몸에 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나마 특이한 점이라면 이곳에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하품 소리조차도 속으로만 들려오는 정도라는 사실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도 이제는 적응이 된 상태였다. 오히려 눈이 보이지 않으니 마음이 점점 더 가다듬어진다는 생각이 드는 건 마냥 착각은 아니리라.
송운이 일주천을 돌렸다.
어느 정도 시간 감각을 세우기 위해 나름대로 고안해 낸 순서였다. 따로 잠을 자지 않으니 하루 열두 시진을 전부 고스란히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효율을 내기 위함도 있었다.
물구나무를 선 채로 일주천을 끝낸 송운의 얼굴이 밝아졌다.
‘음…… 선천지기가 생각보다 빨리 모였구나.’
요 며칠 동안 심상 수련에 정신이 온통 팔려 선천지기가 얼마나 모였는지 잊고 있었다. 한데 오늘 확인해 본 결과, 이전보다 모이는 속도가 조금 더 붙은 듯했다.
이 정도라면 곧 이곳을 벗어나게 될지도 모른다.
분명 좋은 소식이건만 어찌 된 일인지 송운은 약간의 입맛을 다셨다.
‘음…… 막상 벗어날 때가 다가오니 뭔가 섭섭하네.’
불과 첫날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는데, 수련과 수련을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아쉬움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이 공간에서 송운이 유일하게 쉬는 시간은 반 각뿐이었다. 그조차도 육체적인 힘듦보다는 정신적으로 피로해지기 때문에 쉬는 것이었다.
실제로 수련의 효과가 점점 불어나고 있으니, 아쉽지 않다면 거짓이리라.
‘하지만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겠지.’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부모님을 뵙지 못했다.
무림맹은 전쟁이 끝났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했을 터. 황궁에도 이 사실은 전해질 것이고, 가족들에게도 역시 마찬가지다.
한데 이렇게 드러누워 찾아가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지 않은가.
굳이 시간을 세지 못했더라도 이제는 마음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이 깨어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슬슬 준비해야 할 때임을 말이다.
송운의 기운이 조금씩 꿈틀대기 시작했다.
* * *
“벌써 하루 절반이 지났구나.”
제갈염의 말에 백능이 하늘 중천에 떠 있는 해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초가을에 접하고 있는 하늘은 청명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언제 피바람이 불었었냐는 듯 순수하고 깨끗해 보였다.
그 모습에 백능이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맹주의 자리까지 차마 비울 수 없어 전쟁에 전면으로 나서지 못한 것이 끝끝내 그에게는 한이자, 짐이었다.
그런 전쟁의 마무리를 지어 준 것은 다름 아닌 송운이다.
저 밝은 하늘을 다시 볼 수 있게 해 준 가장 중요한 인물인 것이다.
또한 앞으로 황궁과의 협상에서 중요한 시점이 되어 주기도 할 것이며,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 사람이기도 했다.
때문에 송운을 무사히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은 그 누구보다 간절했다.
“허어…… 정녕 깨지 않으려 하는 것인가. 이리도 하늘이 무심했단 말인가.”
백능도 태어나 지금껏 한 번도 하늘을 원망해 본 적이 없다고는 하지 못한다.
하나 지금처럼 이토록 원망스러운 적도 없었다.
원수는 잊어도 은혜는 잊지 말라던, 이제는 까마득한 스승님의 옛 말씀을 가슴에 새겼다.
“아직 젊은 만큼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날 겁니다. 아직 여섯 시진은 더 남았지 않습니까.”
“그래 주길 바랄 뿐이지.”
“우선은 화산파를 어찌해야 할지 논의해 보시는 게 좋으실 듯합니다.”
화산파라는 이름이 나오기 무섭게, 방금 전까지 감성에 젖어 있던 백능의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다.
그것에 철저하지 못했던 지난날의 자신을 돌이켜 본다면 이제라도 바로잡아야 할 터.
싸늘하게 식은 백능의 눈빛이 허공을 찔렀다.
“……할 일은 늘 산더미구먼. 아니지, 전쟁이 끝나고 나니 더한 것 같구먼. 무림맹이 이토록 타락하고 있는 동안 나는 그저 외면만 하고 있었던 듯싶으이.”
“아닙니다. 맹주님께서는 그간 참으로 훌륭히 이 무림맹을 이끌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백능의 허탈한 음성에 제갈염이 아니라고 부정했으나, 이미 그의 표정은 참으로 어두웠다.
백능은 곧 말을 돌렸다.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다른 쪽으로 전환시키기 위함이었다.
“화산파와 접촉했던 타 문파나 세가는 없었는가?”
“아직은 좀 더 알아봐야 할 터나…… 지금까지 알아본 바로는 화산파의 무력에 의해 개방이 당했던 듯싶습니다. 전 개방 방주께서 그날 밤, 급작스럽게 살해당하신 것 역시 화산파의 짓이라는 정보가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그게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제갈염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했던 것과 꼭 들어맞았다.
‘역시…… 그것의 배후가 화산파였단 말인가. 허어……! 그토록 아니길 바랐거늘…….’
이에 백능은 떨리는 마음을 누른 채 차분히 고개를 주억였다. 화산파가 배신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라면 모를까, 제갈염의 말대로 작금의 상황에서는 그게 가장 이해가 가기 쉬웠으니 말이다.
그 외로도 수많은 문파와 세가들을 떠올렸지만, 화산파의 처단이 최우선일 것이다. 적어도 그들은 공동의 적 앞에서만큼은 한편에서 싸운 자들이니 말이다.
반면 화산파는 달랐다.
적과 손을 잡았고, 그것도 모자라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들어 냈다.
개방과 무림맹은 엄연한 공생 관계이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중립을 지켜 왔던 개방이, 이제 와서 무림맹을 배반할 연유가 무엇이 있었을까.
게다가 급작스럽게 맞이한 전 개방 방주 공이추의 죽음도 석연찮은 부분이 많았다.
공이추는 무림의 무인들 사이에서도 제법 많은 추대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원한 관계에 있어서 죽임을 당했을 리는 없었다.
누구 하나 알아주지 못하고 홀로 죽음을 맞이했을 옛 친우를 떠올리니 입가에 저절로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더불어 몇 해 전 먼저 세상을 등진 화산파의 전대 문주가 눈앞에 떠올랐다. 그가 있었다면 절대로 이런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을 터였다.
돌이켜 보니 백능과 오랜 세월을 함께한 전우이자 친우들의 대다수는 이미 그의 곁을 떠난 상태였다.
‘내가 너무 세상을 오래 살았구나. 이젠 때가 되었어.’
생각을 가다듬은 백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증거는 있는가?”
“증거는 아직 찾지 못하였으나 공대복의 입에서 직접 전해 들은 말이니 어느 정도 신빙성은 있습니다. 물론 그를 완전히 믿는다는 건 어려울 터나…….”
제갈염의 말을 가로막은 건 백능이었다.
“됐네. 괜찮아. 대복이 녀석이 이 상황까지 와서 거짓말을 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네. 자신의 스승인 방주의 죽음을 더럽힐 정도로 못난 놈은 아니야.”
“그렇습니까.”
제갈염의 입가에도 고소가 번졌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전해 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한참을 고민하는 듯 보였던 제갈염이 마침내 입을 뗐다.
“전쟁이 끝나기 전까진 서로 살기 위해 합심했으나, 이제는 이를 숨기고 있던 자들도 속내를 드러낼 것 같습니다. 봉문에 들어갈 문파들도 제법 될 테니 말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쩌면 무림맹이…… 분열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걱정이 앞섭니다.”
하나 뜻밖의 말이 백능의 입에서 들려왔다.
허심탄회하게 들려오는 그의 말은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와해시킬 걸세. 내 손으로 직접 말이야. 이제는 그럴 때가 된 것 같으이.”
“……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갈염의 두 눈이 화등잔보다 더 커졌다.
온 평생을 전부 무림맹에 바쳤던 그가, 자신의 의지로 무림맹의 와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은 것이다.
당혹스러운 제갈염과 달리 백능의 목소리는 덤덤하기만 했다.
“말 그대로일세.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는가? 이미 무림맹은 썩을 대로 썩었지. 악취 나는 물을 깨끗하게 되돌릴 방법은 고인 물을 흐르게 하는 것뿐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