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2화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인 후, 다시 앞을 보았을 땐 독고백은 없었다.
두 번 세 번,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주변을 훑어보아도 독고백으로 보이는 이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환영인가.’
만일 환영이었다면 어찌하여 전투 도중 독고백의 모습이 보였단 말인가?
“전투 도중에 한눈을 파는 건 대체 무슨 자신감이지?”
송운이 속으로 허탈해 하고 있을 무렵.
그의 의식 속에서 잠시 사라졌던 자들이 스스로 적막을 깨고 존재를 드러냈다.
정확히 송운의 심장을 겨냥한 잘 벼려진 검의 일격이었다.
‘정신 차리자, 운아. 이곳은 전장의 한복판이다.’
송운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마치 한 마리의 미꾸라지처럼 몸을 틀어 피해 냈다.
팡-!
동시에 가벼운 파공음과 함께 자연스럽게 검을 바닥으로 흘리게 만들었다.
홍청염은 미처 검을 거둬들일 새도 없이, 반항 한번 해 보지 못한 채 지면으로 곤두박질쳤다.
홍청염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혈마오검(血魔五劍) 중 혈궁천(血弓天)의 일부인 만큼 그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콰과과광-!
검이 지면과 맞닿자 이미 파일 대로 파인 땅이 다시 한번 몸부림치며 커다란 굉음을 내질렀다.
곧바로 몸을 일으켜 먼지를 털어 낸 후, 홍청염이 정면을 직시했다.
‘……여유롭군.’
몸의 균형을 잃고 휘청거린 자신과는 달리, 습격당한 쪽인 송운의 안면에는 여전히 무표정만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일까.
홍청염은 후끈하게 공기를 데워 버릴 만큼 뜨거운 태양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온몸에 오한이 돌며 머리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머리카락까지 쭈뼛 설 정도였다.
생전 진천후와의 대련을 제외하고 처음 겪어 보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피해 냈다.’
아주 미세한 스침 따위도 없었다. 당황해서 쳐 낸 것도 아니었다. 분명 그는 자신의 검격보다 더 빨리 손끝을 제어하고 있었다.
완벽하게 자신이 밀린 것이다.
만일 이 한 방에 모든 걸 걸었다면…….
차마 그 뒷말을 잇지 못한 채 짧고 깊은 한숨을 허공에 내뱉었다.
홍청염의 결후(結喉)가 한번 꿀렁였다.
‘죽더라도 저놈만큼은 죽이고 죽는다.’
그제야 홍청염은 송운의 눈을 똑바로 보고 다시 검을 제대로 움켜쥘 수 있었다.
한발 뒤로 물러난 홍청염이 여파달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읊조렸다.
“……재수가 없으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여나 그리된다면…… 예예와 교주님을 부탁드립니다.”
“흘흘…… 늙은이에게 이리 작게 말해도 되는 겐가? 가는귀란 말일세. 쯧, 스스로의 죽음을 판단하며 이리 덤덤하다니. 홍 대주다워. 다른 사람도 아닌 자네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이야.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구먼. 하나 이번만큼은 홍 대주답지만 정말 홍 대주답지 못했네.”
“말장난을 주고받고자 한 말이 아닌 거, 아시지 않습니까.”
묘하게 재촉하는 듯한 홍청염의 음성에 얇게 째진 여파달의 두 눈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알지. 알고 있네.”
송운이라는 무인이 누군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당금 그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언제 무림맹에 이런 거대한 그릇이 담겼는고?’
비록 혈교가 한 번 무림맹에 패한 적이 있으나, 무림맹을 높게 쳐준 적은 없다. 한데 눈앞에 놓인 젊은 무인은 다르다. 어쩌면 정말로 홍청염의 말대로 이 자리에서 혈교가 무너진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이날이 오기를 다들 얼마나 염원하였던가!
이제 무림맹이 무너지는 게 코앞인 상황이다.
‘결코 무너지지 않게 할 것이야.’
여파달이 재빠르게 머리를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최선의 선택은 과연 무엇일지.
‘강시를 끌어들여야 하나?’
하나 이는 곧 포기했다.
이미 온몸이 무기처럼 사용되는 송운을 본 그다.
각 혈대원들 역시도 무공의 차이가 큰 만큼, 도움을 주기보다는 죽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강시의 손톱이 송운에게 얼마나 큰 위협이 될 수 있을까?
‘차라리 그것보단 우리 둘이서 직접 나서는 게 더 현명할 것이야.’
만일 강시들이 말려들면 홍청염과 여파달에게도 자칫 독이 닿을 수 있어 위험하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판단을 내린 여파달이 조용히 읊조렸다.
“자네가 진다면 나 역시 마찬가지일 게야. 자넨 누가 뭐라 해도 혈교 최고의 검이 아닌가?”
“……여 대주님.”
“내 말 끝까지 듣게. 이번만큼은 합공으로 가야 하네. 자존심 따위는 버리게. 그렇지 않고선 자네의 말대로 이번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쥐는 건 힘들지도 모를 테니. 이번 전투는 혈교의 존폐를 둔, 반드시 이겨야 하는 전투일세. 이미 너무 많은 전력을 잃었어. 이번이 아니면 다음은 없네.”
“……알겠습니다.”
결국 홍청염이 고개를 작게 주억였다.
* * *
“이름이 송운이라고?”
여파달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송운에게 다가왔다.
“대화는 다 끝냈나?”
송운의 표정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껄껄! 이거 이거, 생각 이외의 물건이로고! 그래. 네가 시간을 벌어 준 덕택에 다행히도 이야기를 끝낼 수 있었지.”
“그거 다행이로군.”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나? 내 자네의 무공을 높이 사 친히 무림맹 무인들을 만나거든 전해 주지. 그 정도의 호의는 베풀 줄 아는 사람일세.”
“그딴 농 주고받을 시간 따윈 없을 것 같군.”
후웅-!
말을 끝내기 무섭게 이번엔 송운이 먼저 여파달을 향해 정권을 내질렀다.
하나 권법 중에서도 가장 단순한 형태에다, 이미 여러 차례 송운의 질풍권을 지켜본 여파달로서는 손쉽게 피해 낼 수 있었다.
송운도 공격의 목적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여파달을 은연중에 도발시킨 것이었다.
노련하게 간파해 낸 여파달이 고개를 슬쩍 내저으며 미소를 내비쳤다.
“호오? 창과 싸우는데 권법이라…… 스스로의 무공에 대한 자긍심이 높은 자로고! 그럼 어디 한번 얼마나 실력이 뛰어난지 보자꾸나!”
파박!
제법 차분히 말을 이어 나가던 여파달이 땅을 박차 올랐다.
휘이이잉-!
가볍게 내던진 말과는 달리, 붉은 기운으로 둘둘 말린 창이 허공에 소용돌이를 그리며 송운의 복부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목이군.’
송운이 먼저 그 궤도를 꿰뚫어 보았고, 손목과 팔목을 꺾어 창을 휘감으며 곧장 역공으로 여파달의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대로 여파달의 결후를 치고 들어가자 이번엔 여파달이 뒤로 몸을 내뺐다.
후웅-!
그 공격을 맞받아치기 무섭게 곧바로 여파달과 송운의 벌어진 틈 사이에 홍청염의 검이 파고들었다. 홍청염과 여파달이 서로의 공격이 끊이지 않도록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달려들고 있는 셈이었다.
“하앗!”
쐐애액!
카가가각-!
쾅!
계속되는 기의 파동과 엄청난 격전으로 인해 셋의 주변이 풍비박산 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마치 무엇엔가 홀린 듯 혈교도, 종남파도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셋의 전투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염자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딘지 모르게 송운이 뒤로 밀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착각일까.
그럼에도 송운은 아직까지도 검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아니, 실제로 송운이 이곳에 도착해 내보인 것들은 거의 대다수가 검을 사용하지 않는 무공이었다.
이쯤 되니 마음속의 불안감이 싹트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닌 듯했다.
‘설마…… 검이 주 무공이 아닌 것인가?!’
누가 보아도 창과 검. 그 사이에 낀 권각법의 전투는 아슬아슬한 줄다리기와도 같아 보이기 마련이다. 순수한 외공만을 익히는 것은 이미 꽤 오랜 시간 전부터 무인들에게 조금씩 무시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덕분에 지켜보고 있던 종남인들의 손에 땀이 절로 쥐어졌다.
이미 앞에서 엄청난 무공으로 주변을 휩쓸었다.
한데 저렇게 대단한 무공을 지니고 있음에도 진다면, 정말로 모든 희망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침묵의 시간 속에서 서로 몇 초식이 오갔을까.
찰나의 순간, 묵묵히 무표정으로 답하던 송운의 입가에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송운이 허리에 차고 있던 환성이 뽑혔다.
그 많은 무인 중, 검이 뽑히는 순간을 본 사람은 진천후뿐이었다.
하나 그조차도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기에 반응을 하는 데는 한발 늦었다.
정말로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쩌엉!
서걱-
‘? 이럴…… 수는……?’
툭.
푸슈슈슉-!
빛보다 빠르게 움직인 환성의 몸체에 핏물이 물들며 누군가의 살과 근육, 그리고 뼈가 잘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 몸이 위아래로 나뉜 둘은 자신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눈빛을 한 채, 두 눈을 부릅뜨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최후의 단말마 한번 내지르지 못한, 두 악인의 최후였다.
“……오빠아-!!”
발만 동동 구르며 지켜보던 홍예예가 뛰쳐나간 것도 바로 그 직후였다. 절대로 지지 않을 것이라 자신만만했던 홍청염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 * *
“으아아아아! 송우운! 이 찢어 죽일 자식!”
“귀를 막거라! 어서!”
눈앞에서 순식간에 아끼던 수하 넷을 잃어버린 진천후가 악에 받친 괴성을 내질렀다. 오대혈대 중 벌써 네 혈대주가 죽은 것이다.
염자단과 포천리 등등의 인물들이 주변을 향해 외쳤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 있던 종남파 무인들이 일제히 귀를 틀어막았으나, 이미 늦은 이가 제법 많았다.
털썩.
순간적으로 뿜어져 나온 엄청난 살기와 내기가 담긴 괴성은, 이성을 잃어 귀를 막지 못한 홍예예에게도 순간적으로 제자리에 주저앉을 만큼 충격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크아악!”
“내, 내 귀…… 내 귀가……!”
고막이 터지고 귀에서 피와 고름이 터져 나왔다.
“감히, 감히! 나의 혈교를 무너뜨리려 해? 하찮은 벌레만도 못한 놈 주제에!”
스스로의 분노를 감당하지 못하고 눈이 충혈되다 못해 피눈물이 흘러나오는 진천후를 바라보며, 송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모습이 안쓰럽다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혈교가 짓밟고 지나온 자리에서, 그보다 더한 고통을 받았을 수많은 사람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진천후는 악중악(惡中惡)이었다.
“……이미 그렇게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
제자리에 선 채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진천후가 공손우경을 향해 이를 바득 갈며 읊조렸다.
“강시를 모두 풀어라. 이 싸움은 우리 혈교가 반드시 이길 것이다.”
“……그리하겠습니다. 교주님. 반…… 이불사…….”
공손우경이 입으로 주문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일제히 멈춰 있던 강시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 쿵-!
처음만은 못하나 강시들이 움직이는 소리는 전장을 깊게 울렸다.
“검을 잡아라. 모두 전투태세로!”
아직 멀쩡한 종남파 무인들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검을 움켜잡았다.
어쩌면 삶의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를 그때.
세상은 아직 무림맹의 편이었는지, 어느새 무림맹의 무인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송 소협! 괜찮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