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1화
第四章. 추풍낙엽(秋風落葉)
자신의 앞길이 막힌 진천후가 그 앞에 놓인 인물을 빤히 쳐다보았다.
제법 훤칠한 외모에 큰 신장.
거기에 적당한 체구를 지닌 자.
두근두근.
그의 기운을 느낌과 함께 진천후의 심장 박동이 묘하게 빨라지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느껴지는 변화가 당혹스러워, 곧바로 여파달에게 물었다.
“대체 저자는 누구지?”
하나 그 역시도 모른다는 듯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는다.
“저 역시도 처음 보는 자입니다. 다만 추측이 간다면…….”
“송운.”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 준 이는 따로 있었다.
“……?”
“송운이라고. 정신 바짝 차려.”
재빠르게 여파달의 말을 끊고 답한 휘의 얼굴에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한다.
휘를 만나고 난 후 처음 보는 표정이다.
하나 오히려 그것은 진천후에겐 자극제가 된 듯했다. 그러한 기세가 느껴지지 않았더라면 코웃음을 치고 넘겼을 일이나, 진천후 역시 직접 느꼈지 않은가.
‘제대로 붙어 볼 만한 놈이려나.’
진천후가 목을 좌우로 꺾기 시작했다.
* * *
향섬문이 열렸다는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무림맹은 발칵 뒤집어졌다.
회의가 열리고 서둘러 조를 짜서 각기 있어야 할 곳을 배당받았다.
달콤한 단잠에 빠졌던 이도, 목욕을 하고 있던 이도, 늦은 식사를 하고 있던 이들도 있었기에, 급작스러운 소식으로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제대로 잡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 누구도 향섬문이 이리도 쉽게 열릴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탓이다.
무림맹이 출전할 준비가 마무리되는 것에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국 더 이상 이것저것 재고 따질 시간이 없다는 걸 느낀 송운이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이다.
“……많이 늦었나.”
하나 그렇게 달려왔음에도 송운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너무 많은 무인이 목숨을 잃은 후였다. 사방이 전투와 폭발로 인해 바닥이 파이고 나무가 꺾이며 그 고된 흔적을 고스란히 새긴 상태였다.
‘부디 극락왕생하십시오.’
촌각이라도 더 빨리 도착했더라면 방금 전 셋의 자폭만이라도 막을 수 있었으리라.
안타까움에 입 안이 썼으나, 이를 애도하는 건 혈교를 모두 처리한 후에 해도 늦지 않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서는 그편이 더 빠를 터.
해서 모두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린 그때.
송운의 눈에 띈 이가 있었다.
자신을 보자마자 표정이 굳어진 자.
묘하게 낯선 듯 익숙한 상황이었다.
‘나를 아는군.’
그것이 불쾌한 듯 송운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이러한 경험은 이미 몇 차례에 걸쳐 느낀 적이 있는 바다.
당연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때마다 항상 피를 봐야 했었으니까.
이미 많은 무인이 다치고 죽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는데, 내가 모르는 상대방이 나를 안다?
참으로 오랜만에 겪어 보는 일이었다.
그 덕분에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이름이 송운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설마…… 흑야와 혈교가 관련이 있었던 것인가?’
그간 흑야가 감쪽같이 자신들의 몸을 숨겨 근거지조차 알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비견해 보았을 때,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이는 혈교와 비슷한 점이다.
혈교와 함께 손을 맞잡고 흑야가 몸을 숨겼다면 찾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는 일.
파밧-!
잠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송운을 향해 정신 차리라는 듯 붉은 인영이 날아들었다. 살기가 얼마나 피어오르는지, 공격은 모르려야 모를 수 없을 만큼 독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진 모르겠으나, 감히 내 친우를 죽인 죄! 곱게 죽여주진 않으마.”
이를 갈며 온몸에 피를 묻히곤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이는 다름 아닌 냉용후였다.
펄럭-
촤락!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냉용후의 선자가 몸을 힘껏 펼치며 우악스럽게 송운의 목을 파고들었다. 아슬아슬하게 스칠 듯 보이던 선자는 곧 송운의 환성에 의해 완벽히 길이 막혔다.
채채챙-!
선자와 환성이 부딪히자 허공에 불꽃이 튀어 올랐다.
‘역시 그냥 선자가 아니었군.’
팟-!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일 장 이상 멀어진 송운이 냉철하게 냉용후를 주시했다.
“선자를 주 무기로 드는 이라니, 놀랍네.”
“크윽…… 닥쳐라!”
생각보다 높은 송운의 무공에 당황한 냉용후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왼쪽 손목의 옷깃이 깔끔하게 일(一)자로 잘려 나간 것이다.
‘대체 언제……?!’
싸움에 있어서만큼은 이성을 잃지 않았던 냉용후로서는 당황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친우의 복수는 계속할 건가?”
“이…… 개자식!”
파팟!
이미 눈앞에서 처음으로 지인의 죽음을 목격한 그에게 이성이 제대로 남아 있을 리 없다. 그 덕분에 송운의 작은 도발에도 냉용후는 쉽게 넘어갔다.
하나 송운은 코웃음 칠 뿐, 곧장 달려오는 냉용후의 선자를 그대로 맞받아친 채 그의 몸 중앙으로 주먹을 들이밀었다.
퍼억!
가벼운 손짓처럼 보였지만, 주먹에 내력을 담아 내지른 질풍권이다.
무방비 상태에서 직격으로 맞은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커헉……!”
“대주님!”
그 모습에 곁에 있던 악혼혈대원들이 빠르게 냉용후를 감싸며 보호막을 치듯 에워쌌다.
“치…… 워라. 치우라고! 쿨럭!”
악을 쓰며 외치는 그의 말에도 악혼혈대원들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자리를 지켰다.
“그래도 꼴에 따르는 자들이 있다는 건가.”
심기가 불편해진 송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곤 주변을 잠시 둘러봤다.
아직 남은 강시도 많고, 혈교인들도 많다.
이는 쓸데없이 시간 낭비할 틈이 없다는 것과도 같았다. 송운이 무신경한 눈빛으로 말했다.
“시간을 오래 끌 일은 아닌 것 같군. 다 같이 덤벼라.”
“크으……! 모두 쳐라!”
송운의 덤덤하면서도 여유가 넘치는 모습에 분개한 냉용후가 결국 혈대원들을 물리는 것을 포기했다.
“모기 새끼들이 한 번에 덤빈다고 무서울 필요는 없지.”
스릉-
냉용후의 명에 대략 이십여 명 정도 되는 혈대원들이 송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너른 중원을 날뛰면서, 마치 그들의 세상인 것처럼 부수고 찢으며 달려왔던 혈대가 와해당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천하를 공포에 물들였던 모습은 더 이상 없었다.
퍼버버벅-!
퍽!
“크아아악!”
송운이 환성마저도 검초에 집어넣은 후, 오롯이 권법과 각법으로 주변을 휩쓸기 시작한 것이다.
단순한 주먹으로 보기엔 그 위력이 너무도 컸다. 주먹 한 방에 갈비뼈 서너 개가 부러지고, 발길질 한 방에 목이 꺾였다.
그 모습은 마치 휘몰아치는 소용돌이와도 같았다.
그 속에 휘말린 자는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그곳으로 달려드는 혈대원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뜨거운 줄 모르고 불길에 제 몸을 던지는 부나방과 다를 바가 없었다.
모든 건 순식간에 벌어졌다.
채 반 각의 반도 되지 않아 송운의 손끝에 혈대원들이 모조리 목숨을 빼앗겼다.
냉용후의 선자 역시도 찢기고 부서져 이미 원래의 용도를 잃은 지 오래였다. 선자의 주인인 냉용후 역시 멀쩡하고 훤하던 외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인간의 추악한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이미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두들겨 맞은 냉용후는 연신 가쁜 숨과 함께 피를 토해 냈다. 이미 장기가 일부 파괴되고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상태다.
그럼에도 쓰러지지 않는 냉용후의 모습에 송운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단전부터 깨뜨려야겠군.’
무인에게 있어서 목숨을 잃는 것보다 더한 고통은 결국 내력을 모두 잃고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 있다 치더라도 더 이상 누군가를 죽이거나 괴롭히진 못할 터.
냉용후가 휘청이며 송운에게 다가오려던 순간.
송운의 두 눈이 냉철하게 빛났다.
쩌엉-!
“……허어어억……!”
동시에 송운의 주먹이 정확하게 냉용후의 단전을 향해 내려찍었고, 냉용후는 엄청난 고통에 소리조차 제대로 내지르지 못하고 작은 헛숨을 들이켰다.
눈알이 뒤집히고 온몸이 터져 나갈 것 같은 고통이 냉용후의 전신을 휘감았다.
하나 그렇다고 살려 줄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이미 수많은 목숨을 앗아 간 ‘악’이다.
살려 둘 연유나, 동정 따위는 없었다.
다만 더 고통스러움을 느끼게 하기 위하여 걸친 절차였을 뿐.
송운이 마무리로 높게 치켜든 환성을 내려찍으려던 그때, 긴 창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쌔애액-!
날카로우면서도 재빠른 창날에 송운이 허리를 비틀며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고개를 틀어 정면을 직시하자 반백의 노인이 보였다.
“웬 놈인진 모르겠으나, 무인의 단전까지 깨 놓고선 목숨까지 앗아 가는 건 너무하지 않겠느냐? 청년이여.”
여파달이었다.
* * *
“……교주님.”
냉용후의 그 끈질기고 깊은 자존심을 알기에 두고 보고 있던 홍청염이 결국 진천후에게 말을 걸었다.
저대로 내버려 둔다면 분명 중간에 낀 여파달마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직감이 강하게 그를 강타했기 때문이다.
송운은 단둘로 막아설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묘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진천후가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엔 호승심이었으나, 이젠 분노였다.
당연히 이길 것이라 여겼던 싸움에서 갑자기 밀리기 시작했다. 더불어 그중 대주 두 명이 벌써 죽었거나, 죽기 직전에 달했다.
겨우 단 한 명에 의해 자신의 수하들이 마치 바람에 나부껴 나뭇잎이 떨어지듯 목숨을 잃고 있는 것이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이미 이곳을 지나쳐 무림맹에 닿았어야 했다.
한데, 저놈이 도착함으로써 모든 게 망가졌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건 당연했다.
거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재빨리 곁을 둘러봤지만 이미 휘는 사라지고 없었다.
‘사라졌나.’
잠시 아쉬움과 배신감 역시 느꼈지만, 애당초 이는 혈교의 싸움이다.
휘는 애당초 혈교의 사람이 아니니 당연한 것이라 마음을 굳히고선 고개를 내저은 진천후가 다시 홍청염을 바라보았다.
“나가서 도와라. 하나, 결코 죽어선 안 된다.”
“명 받들겠습니다. 교주님.”
“아니! 이번엔 내가 나설게. 재수 없는 무림맹 녀석들. 내 손으로 박살 낼 거야.”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이를 가는 홍예예를 막아선 건, 진천후였다.
“넌…… 아직이다.”
“아직도 아직이에요? 나도 싸우고 싶단 말이야!”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진천후를 향해 외쳤으나, 통하지 않았다.
“네 마음은 알겠지만. 아직 나설 때가 아니다. 홍 대주가 반드시 마무리 지을 것이다.”
아무리 막무가내인 홍예예라고 한들, 교주인 진천후의 명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 말에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한 홍예예가 분하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알겠어요. 오빠, 절대, 절대 죽지 마.”
“다녀오겠습니다. 예예를 부탁드립니다. 교주님.”
진천후가 고개를 한번 까딱했다.
* * *
송운이 눈앞에 서 있는 여파달과 홍청염을 바라보았다.
이미 냉용후는 관심 밖으로 밀린 지 오래였다.
가만히 놔두기만 해도 알아서 죽을 자에게 신경 쓰기엔 앞에 놓인 적들이 너무 많았다.
그때였다.
‘……백 형?!’
찰나의 순간, 송운의 동공에 스치듯 마주친 이의 모습은 분명 송운이 아는 독고백의 모습이었다.
‘형이 이곳에? ……어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