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0화
“시…… 신도 찾지…… 못했다?”
음여랑의 목소리가 허탈하게 새어 나왔다.
“그런 것…… 같습니다.”
공대복의 고개가 축 늘어져 땅을 향한다.
어느덧 원래의 젊음을 점점 되찾아 가고 있던 음여랑이 힘없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털썩.
“음 장로님!”
“이런…… 재수가 없으려니까. 재수가 옴이 붙는구나.”
“아무래도 무림맹 놈들이 거둬 간 듯…… 싶습니다.”
“아니다, 아니야. 좋게 생각하자. 어쩌면 죽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느냐? 정말, 정말로! 오라버니의 마지막을 본 게 맞아?”
“대복이가 보았다고…….”
창월랑 역시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다.
여기 있는 셋 모두가 인정해야 하지만 인정하지 못하는 일일 테니 말이다.
힘겹게 호남성에 도착한 셋은 간신히 대략 삼백 명에 달하는 개방도들을 만났고, 서로의 마음을 다시 굳혀야 했다.
다행히도 갈천노가 직접 이끌던 그들은 목숨만큼은 부지할 수 있었고, 결국 개방은 개방끼리 뭉쳐야 산다는 것을 서로가 깨달은 것이다.
잠깐 동안 공대복을 다시 받아들이느냐는 문제로 소란이 일었으나, 장로들이 이미 그를 다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이상 막아설 수는 없었다.
그가 없으면 결국 개방은 개방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타구봉도 없으며, 후개까지 없는 개방이 어찌 개방의 이름을 이어 갈 수 있단 말인가?
결국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며 몸을 추스를 틈을 가질 수 있었다.
몸 상태가 정상을 되찾은 직후 바로 음여랑이 나선 건 편무량의 시신을 되찾아 오는 일이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그의 죽음을 인정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그녀의 마음은 다시 한번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나, 편무량은 사라졌고, 개방은 망망대해의 한가운데에 놓인 신세로 전락했다.
개방의 남은 핵심 인물들이 다 같이 모인 그날 저녁.
“지금이라도 무림맹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공대복의 말에 갈천노가 코웃음 쳤다.
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모두가 지친 이 시점에 공대복의 말은 그야말로 어이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이제 와 우리를 받아 줄 거라 생각하는 게냐?”
“……쉽진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 하면 우리라고 놈들이 반가울 것 같으냐?”
“그것 역시 쉽진 않겠지요.”
공대복이 슬쩍 고개를 들어 음여랑의 표정을 주시한다. 음여랑의 표정 역시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직까지는 별말이 없다.
“그걸 아는 놈이…… 무림맹에 들어가자? 그것도 가장 먼저 무림맹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네가?!”
“살길을 찾아야 합니다. 염치가 없더라도, 치욕스럽더라도 이 많은 방도를 먹여 살릴 방도는 그것뿐이지 않습니까.”
공대복이 계속해서 덤덤하게 말을 이어 나간다.
그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갈천노가 이를 갈았다.
으득.
“아직까지도 개방도들이 멍청하게 네가 반기를 들었다는 사실을 모를 것 같으냐? 그놈들이라고 우리를 살려 둘 것 같아?”
갈천노가 끝없이 딴지를 걸자, 듣고 있던 음여랑이 드디어 무거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끼리 여기서 뭘 어찌해서 먹고 살자고? 이미 우리를 보는 주변 시선이 곱지 않다는 건 천노 너도 잘 알 테지. 그만큼 입소문은 빠르다. 그걸 평생을 지켜봐 온 네놈이 모른다는 말을 하진 않겠지. 당금 우리가 살 수 있는 방법은 대복이 말대로다. 무림맹 역시 이번 혈교와의 대전으로 인해 엄청난 손해를 입은 건 사실이야. 이러한 시기에, 한 손이라도 절실한 것 역시 사실. 그걸 우리가 자처해야지.”
“음 장로님!”
“재수 없어도, 자존심 상해도 그것만이 살길이다. 이 길이 정 싫거든 당금 개방도들 모두를 살릴 다른 길을 모색해 와. 그게 옳다면 거기에 손을 들어 주마.”
“…….”
음여랑의 말에 갈천노가 분하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우선은 제가 혼자 무림맹으로 다녀오겠습니다. 제가 시작한 일이니 제가 매듭을 지어야 마땅한 일. 혈교와의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한 손 거든다면 그들도 마냥 저희 개방을 버려 두진 못할 겁니다. 행여나, 제가 아무런 서신 없이 돌아오지 못하거든…….”
“그 입 닥쳐. 무조건 살아 돌아와.”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쉰 갈천노가 마지막 말을 내뱉곤 자리를 떴다.
* * *
“커흑……!”
“……쿨럭!”
“쿠웨에엑-!”
쨍그랑!
조도연이 선전포고를 날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홍위모와 막봉안, 그리고 화경홍 모두 뿔뿔이 흩어진 채로 땅바닥을 뒹굴었다.
셋 모두 피를 토하고 처음 나섰을 때와 달리 온몸은 상처투성이였다.
셋 중 상태가 가장 나아 보이는 건 홍위모뿐이었다.
하나 이것도 그마저 몸의 곳곳이 파이고 갈라지고 피로 물든 지 오래.
이미 싸움의 판가름이 갈린 듯 보였다.
‘……말도 안 된다.’
포천리와 염자단.
그 외로도 많은 종남파의 무인들이 얼이 빠진 표정으로 정면을 주시했다. 아니, 주시했다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도무지 믿고 싶지 않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리라.
아무리 혈교 놈들이 대단하다고 한들, 설마 원로들까지 무너질 줄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말이 되는 상황인 거야, 애송아.”
염자단의 흔들리는 동공을 확인한 듯 조도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읽어 내린 듯했다.
어느새 그는 염자단의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염자단의 눈에 띈 조도연도 처음처럼 완전히 깔끔한 모습은 아니었다.
제법 군데군데 상처를 입고 피가 묻어 있었다.
단지, 이 정도의 상처로는 자신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듯 굳건히 서 있다는 점이 달랐다.
“이노옴!”
참다못한 염자단이 역정을 내며 소리를 내지르자 조도연의 눈빛이 다시 사납게 변했다.
“아, 정말이지 이번 원정에 나서서 이놈저놈, 살면서 먹을 욕은 다 먹고 있네! 잘 들어라. 나는 아직 젊다. 그리고 귀도 아주 자알 들려. 그러니까, 늙은이들 뒤에 숨은 쥐새끼 주제에 역정만 내지 말고 자신 있으면 나와서 실력으로 붙어. 알겠나?”
무인으로서 치욕적인 말을 들은 염자단의 두 주먹에 힘이 잔뜩 들어가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럼에도 섣불리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을 스스로 분개하고 있었다.
“자아! 이제 어떻게 할……?”
그때, 흥미진진하게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홍예예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끄으으아아아!”
마치 그대로 죽을 것같이 보였던 홍위모가 자신의 남은 내력을 모조리 끌어낸 것이다. 홍위모의 몸 주변으로 번쩍번쩍 하는 빛이 발하기 시작한다.
빛만 발하는 것이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기운이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이는 홍위모만 보여 준 변화가 아니었다.
막봉안과 화경홍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치 태양처럼 온몸으로 빛을 내뿜는 그들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신성(神聖)해 보일 정도였다.
“스, 스승님……?”
순간, 포천리와 홍위모의 눈빛이 마주쳤다.
‘……내…… 마지막…… 선물이니라. 종남파를…… 부탁한다.’
그의 입가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오…… 저 늙은이가 결국 끝까지 발악하네. 그대로 죽은 척했으면 모른 체하고 지나갔을지도 모르는데. 쯧, 제 무덤을 파는군.”
“……쉿.”
여전히 투덜대는 조도연과는 달리, 추이를 지켜보고 있던 냉용후가 서늘한 눈빛을 보냈다.
분명 세 명은 모두 엄청난 내상과 외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이 정도의 힘을 낼 수 있다는 건 단 하나를 뜻했다.
‘……회광반조(回光返照)인가.’
그건, 말 그대로 회광반조다.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스승님!”
“전부 자리를 피해라.”
“크아아!”
콰과과과-!
쿠궁!
진천후가 피하라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홍위모를 중심으로 주변 일대에 기의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 * *
휘오오오-
엄청난 먼지바람이 사방을 휩쓸며 내려앉는 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가장 먼저 시야가 해방된 것은 공손우경이었다.
“콜록콜록…… 젠장…… 콜록! 젠장! 아악! 내 새끼들이!”
쿵쿵!
공손우경이 또다시 괴성을 질러 대며 발을 동동 구른다.
재빠르게 옮겼지만 공손우경 역시 그들을 전부 다 옮길 수는 없었는지 순식간에 서 있던 강시들 수백 구가 폭발에 휩쓸린 탓이다.
또다시 강시들이 허망하게 절반 이상이 사라졌다. 고수들 셋의 죽기 직전 온 힘을 다 쏟아낸 그 무력은 주변을 풍비박산 내기 충분했다.
다만, 세 명의 육체도 모두 폭발한 채 허공 속의 한 줌의 재처럼 사라졌다는 사실이 너무도 가슴 아플 뿐.
“크흑……!”
그 참혹한 모습을 바라보던 포천리가 두 무릎을 꿇은 채 눈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걷고 있는 이 길의 끝을 이룰지도 모른다던 스승님의 차분한 음성이 귓가를 때려 더욱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와…… 어마어마하네?”
휘 역시도 제법 놀랐는지 두 눈이 마치 놀란 토끼처럼 휘둥그레져 있었다. 어찌나 폭발이 컸는지 소매가 찢겨 있었다.
그 역시도 일정 경지에 오른 고수들의 회광반조는 처음 보기에 눈으로 직접 봤음에도 쉬이 믿기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엇이지?”
놀라움을 금치 못하던 진천후가 묻자, 곁에서 옷을 정돈하던 여파달이 답했다.
“아무래도 남은 내공과 선천지기를 전부 폭주시킨 듯싶습니다.”
“그런 것도 무공입니까?”
진천후의 표정이 묘하게 흐트러졌다.
눈앞에서 자신이 아끼는 수하 한 명을 잃은 것이다.
“아닙니다. 해가 지기 직전에 잠시 하늘이 밝아지듯…… 일정 이상의 반열에 오른 고수만 펼칠 수 있는 최후의 발악이지요.”
“무공도 아니라…… 그것참 소름 돋는군요.”
진천후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여파달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 역시도 이런 모습을 직접적으로 목격한 것은 십여 년 전이 마지막이었다.
한데, 이들은 그때보다 훨씬 더 큰 여파를 남기고 사그라졌다.
“그런 힘을 냄으로써 처참히 죽음을 맞이해야 하니, 어찌 보면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동귀어진과 비슷한 것인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는 진천후를 향해 여파달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과는 다르지요. 이건 자신은 무조건 죽으니 말입니다.”
진천후가 그러하냐는 듯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무튼 더는 이곳에 머무를 연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남은 놈들을 처리하고 무림맹으로 향하고 싶은데…….”
“교주님의 뜻대로. 굳이 잔챙이들을 상대하며 힘을 뺄 필요는 없지요.”
진천후의 말에 여파달이 고개를 들었다.
“들은 대로 우리는 모두 이곳을 지나쳐 무림맹으로 향한다!”
“예!”
여파달이 외치자, 다른 혈대들이 각기 자신의 대주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그때.
주륵-
“……아?”
쩌정-
쿵!
조도연이 들고 있던 도가 반으로 금이 가더니, 조도연의 몸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쓰러졌다.
“조 대주!”
쓰러지는 조도연의 반신을 받아 든 냉용후의 눈에 핏발이 섰다.
‘설마, 그사이에 폭주의 여파가 조 대주에게까지 닿은 건가? 그럴 리가!’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던 휘가 무엇을 감지한 듯 그의 동공이 흔들렸다.
‘보지 못했다.’
불신을 담은 눈으로 고개를 돌린 휘. 아니, 모두의 시선 끝에 어느새 등장한 누군가가 서 있었다.
“네놈들이 더 이상 중원에 발을 내디딜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