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9화
퍼버버벅-!
누군가 걱정의 목소리로 외쳤으나, 염자강은 이 역시 가만두지 않았다.
빠르게 손을 놀려 삼면에서 날아든 강시 두 구를 해치우고, 허공으로 피한 것이다.
하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번엔 강시 열 구가 염자강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든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한 종남파의 무인이 그사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나 염자강을 구하기 위한 이 행위는 곧 그를 부상으로 이끌었다.
푹! 촤악!
“크악……!”
“편 사제!”
그가 찰나의 순간에 미처 염자강이 쳐 내지 못한 강시의 손톱에 긁힌 것이다.
독 중에서도 제법 치명적인 시독인지라 긁힌 부위가 벌써부터 서서히 검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차라리 그저 피부만 긁혔다면 덜했을 테지만, 근육까지 뚫고 들어가 뼈에 닿을 정도였으니 그 속도는 더욱 빨랐다.
독을 해독해 내지 못하면 얼마 가지 못하고 중독되어 죽을 것은 뻔한 일이다.
하나 한시가 바쁜 전장에서 해독을 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염자강의 눈에 난감함이 비쳤다.
위험한 순간에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달려든 사제다.
죽는 걸 마냥 지켜만 볼 수는 없다.
‘……이대로 두면 목숨까지 위험하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왼팔이라는 것. 아직까지 독기는 팔꿈치 이상을 넘어가지 않은 상태였다.
점점 검게 물들어 가는 사제의 왼팔을 바라보던 염자강이 깊은숨을 들이 내쉬었다.
“저, 전 괜찮습…… 크윽!”
“이 악물고 눈 감고 있어라. 내가 지금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방도는 이뿐이구나. 미안하다.”
말을 마친 염자강이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검파를 꽉 쥐고선 검기를 흘려보냄과 동시에 사제의 혈을 몇 군데 짚어 냈다.
그는 염자강의 행동을 보며 그 의미를 깨닫고선 고개를 돌렸다.
염자강의 말대로 방법이 그것뿐이니.
‘……팔 한 짝 잃는 게 목숨을 잃는 것보단 나을 거다.’
염자강은 더 이상의 머뭇거림 없이 검을 휘둘렀다.
서걱!
툭.
“끄으으으윽……!”
그 검은빛처럼 빨랐고, 미리 짚어 놓은 혈 덕분에 피가 사방으로 튀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팔을 잘라 내고서 다시 곧바로 검을 갈무리한 채 주변을 둘러본 염자강은 잠시 어이가 없다는 듯 숨을 내뱉었다.
“허……!”
강시의 숫자는 크게 줄어 있었다.
하나 줄어든 건 강시뿐만이 아니었다.
자그마치 칠백 명에 달하던 종남파의 무인들이 삼분지 이 가까이 줄어든 것이다.
방금 전 사제의 팔을 잘라 내지 않았더라면 저 지면에 싸늘한 주검으로 쓰러진 자들 중 한 명이 되었을 것이다.
‘정녕 저 극악무도한 혈교 놈들을 막을 방도가 없단 말인가!’
처음과는 달리 남은 이들의 눈빛에는 공포가 조금씩 어리기 시작했다.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달려드는 적들은 그야말로 실재하는 광기이자 공포였다.
그때, 그의 곁으로 다가온 것은 종남파의 장문인 포천리(包天理)였다.
“장문인!”
그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안정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안정을 얻을 수 있는 연유는 무엇일까.
무림맹의 지원군?
아직은 일렀다.
이제 겨우 이각이 지났을 뿐이다.
‘설마 그럼……?’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염 사제. 아직 멀쩡히 살아남은 자들은 부상 입은 이들을 데리고 뒤로 빠지도록 하게. 전대의 원로분들께서 직접 나서기로 하셨네.”
염자단의 표정이 밝아졌다.
“좋은 소식이로군요. 알겠습니다.”
종남파 무인들의 발걸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 * *
“음? 갑자기 놈들이 물러납니다.”
조익기의 말대로, 종남파의 무인들이 슬슬 뒤로 빠지고 있다.
“설마 도주는 아니겠지.”
진천후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어쨌건 그는 천성이 피를 보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다. 더불어 전쟁을 즐기는 그에게 적이 아직 끝을 보지도 않았는데 뒤로 빠진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훗날의 귀찮음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럴 리가. 저들이 이곳에서 물러날 곳이 어디 있다고.”
휘가 고개를 내저었다.
‘더 내보내면 내보냈지, 여기서 물러나지는 못할 텐데?’
그들이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을 그 무렵.
종남산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은거고수라도 등장할 셈인가.”
여파달이 눈살을 찌푸리며 멀리 내다보자, 그의 시야에 무언가가 잡혔다.
“은거고수, 아무래도 그게 맞는 듯싶습니다. 교주님.”
* * *
“감히 우리 종남파에 쳐들어온 것도 모자라 소중한 우리 문도들을 죽이려 들다니! 네 이놈들!”
흰 수염에 어딘지 얇실해 보이는 노인과 제법 건장해 보이는 체구를 지닌 노인 한 명.
그리고 마지막으로 손 한쪽이 없는 노인까지 총 세 명이 전장 한가운데 도착했다.
“쓸데없는 이들을 불러냈군. 개미 목숨만도 못한 이들이 괜히 자세 잡기는.”
조도연이 이미 피로 잔뜩 물들어 버린 자신의 애도를 혀로 핥으며 조소를 지었다.
기괴할 만큼 소름 돋는 모습이었다.
“어차피 한 방이면 다 죽을 텐데.”
냉용후 역시 밀리지 않으려는 듯 미묘하게 붉은 선자를 꺼내 들어 허공에 피를 흩뿌렸다.
겉보기엔 그저 낭창한 선자처럼 보이나 그 끝이 예리하고 전체가 쇳덩이로 된 그것은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 간 예리한 병장기였다.
노인들을 가장 선두에서 반긴 건 포천리였다.
“스승님! 오셨습니까? 이리 도움을 요청하게 되어 참으로 면목이 없습니다.”
“허어, 천리 네 말이 진짜였구나, 진짜야. 혈교 놈들이 어찌하여 다시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징하구먼.”
흰 수염을 휘날리는 노인이 말하자, 외팔의 노인이 답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장문…… 아니, 아니지. 크흠! 이미 당대 장문인은 따로 있지. 홍 사형, 설령 혈교가 다시 나타났다고 한들 사칭하는 가짜일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진짜가 맞는 것 같습니다그려.”
그들 역시 어릴 적 혈교대전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던 세대였다.
살면서 혈교의 악귀들을 두 번씩이나 마주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자자, 어찌 되었건 우리가 이리 떠들고 있을 때가 아니네. 천리야, 무림맹에서 사람을 보내기로 했다고?”
“예. 이각 정도만 더 버티면 반드시 도착할 겁니다.”
“쯧, 무림맹 놈들 예나 지금이나 느려터진 건 여전하구나. 아무튼 더는 걱정 말거라. 우리가 최대한 버텨 볼 터이니. 우리 종남파가 무너지는 꼴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보지 못한다.”
그러곤 이내 세 명의 노인이 각자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그 기수식은 곧 종남파의 무인들로 하여금 탄사를 내뱉게 만들었다.
“천하삼십육검(天下三十六劍)!”
은거에 들어가기 직전에 전 장문인인 홍위모(洪瑋眸)는 천하삼십육검의 오의를 깨닫고 완전히 펼칠 수 있는 몇 되지 않는 종남인이었다.
그런 그의 무공을 다시 한번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꿀꺽.
‘어쩌면, 우리 선에서 강시만이라도 다 물리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켜보는 모든 종남인들의 마음에 불이 지펴졌다.
“큭, 첫수는 내주지.”
하나 그러든지 말든지 조도연은 여전히 가소롭다는 표정과 음성으로 그를 도발시켰다.
가장 먼저 튀어 나간 것은 건장한 체구의 전 장로였던 화경홍(花敬鴻)이었다.
“네 이놈! 어린놈이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파밧!
쌔애액-!
화경홍의 검첨이 조도연의 목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하나 그런 모습과는 달리 조도연의 표정은 여전히 여유가 넘쳐흘렀다.
“흐음, 골방의 늙은이라더니 제법 날이 섰군. 그래도 굳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목숨은 보전했을지도 모르는데. 안타깝구나.”
“이, 이놈이!”
작은 도발이었으나 화경홍은 쉽게 넘어갔다.
현역 시절에도 워낙 불과 같은 성격인지라 홍위모와 외팔의 노인인 막봉안(幕琫安) 역시 쉽사리 말리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카가강!
화경홍의 신형이 빛살과도 같이 조도연의 전면으로 날아갔다.
오뢰정인을 날리며 허공에 오색 빛깔이 터져 나왔으나 조도연은 의연한 표정으로 도의 옆면으로 막아 내며 피해 냈다.
“제법이구나.”
잠시 놀라는 듯 보였지만, 정말 찰나일 뿐.
다시 화경홍이 자세를 잡았다.
손가락을 마치 갈고리처럼 구부린 그가 땅을 강하게 박차고 날아올라 조도연의 뒷덜미를 잡아채려던 그때.
조도연이 자신의 거대한 도를 들어 올리더니, 반동을 주어 화경홍의 뱃가죽을 노렸다.
후웅-!
타다닥!
재빠르게 몸을 틀어 도에서 벗어났지만 이번에도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
이번엔 건곤산수(乾坤散手)까지 막힌 것이다.
생각보다 더 단단하고 빠른 적의 손놀림에 놀란 화경홍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설마 자신의 건곤산수를 아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하나 놀란 건 화경홍뿐만이 아니었다.
홍위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허어…… 만만치 않은 놈이로고.”
화경홍은 권법 중에서도 건곤산수의 달인이라 불렸을 만큼 이를 잘 구사해 낸 무인이다. 화경홍은 충격이 제법 컸는지 잠시 멈춰 섰고, 이틈을 놓칠 조도연이 아니었다.
“충격 먹은 건 알겠는데 그러다 죽어, 영감.”
경고등에 불을 켠 조도연이 도를 들고 달려들었다.
화경홍이 곧바로 허리를 틀어 피하는 듯했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조도연이 도를 거둬들이지 않고 곧바로 허공에서 경로를 틀어 화경홍의 목덜미를 지나 어깨를 스친 것이다.
촤아악-!
후두둑.
“크으윽……!”
묵직하고 큰 도는 그대로 화경홍의 어깨를 날카롭게 베어 냈다.
만약 화경홍이 조금이라도 늦게 피해 냈다면 그대로 팔 한 짝이 날아갔을 터.
덕분에 어깨뼈까지 베는 데 그친 조도연이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헉……! 헉……!”
“그러게 한 수라도 내어 줬을 때 제대로 하지 그랬어.”
후우웅-!
화경홍이 혈도를 짚으며 잠시 가쁜 숨을 내뱉자 조도연이 무심한 표정으로 더 이상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날아들었다.
제법 깊게 베인 상처에 움직임이 둔해진 화경홍을 덮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후웅-
허공을 가르는 묵직한 파공음이 화경홍의 정수리를 향했다.
‘이걸 그대로 맞아줄까 보냐! 이놈!’
화경홍은 애당초 물러남을 모르는 자였다.
그대로 검을 돌파해 나가려던 그때.
카가가가각-!
누군가의 검이 그 중간 사이를 갈라놓았다.
‘호오? 검이 제법이로군.’
홍위모의 윗 사형인, 홍위모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위모 네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물러서 있어 주려 했으나, 이제부턴 협공이다.”
쾅!
쩌저저적.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지며 지면이 마치 가뭄이 든 논바닥처럼 갈라져 내렸다.
조도연의 도가 홍위모와 막봉안의 검에 막히면서 땅을 내려찍은 것이다.
엄청난 여파에 먼지가 사방으로 피어올랐다.
“콜록콜록……! 와, 이건 너무하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세 명이 동시에 덤비나?”
불평과는 전혀 상반되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조도연이 땅바닥에 처박힌 도를 뽑아 들었다.
음성은 이미 흥분감에 잔뜩 젖은 듯했다.
“그럼 나도 진짜 이제부터 제대로 한다?”
조도연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