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전생-237화 (237/275)

제237화

자칫 잘못하면 곽철우는 오늘 이곳에서 친우들의 손에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를 일이다.

오룡일봉 중 곽철우가 가장 강하다고 한들, 이젠 모두가 제법 비등한 실력을 지녔기에 오룡일봉이 동시에 덤빈다면 승패는 확실할 수 없었다.

다시 그들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온 천하가 시끄러운 반면, 이곳만큼은 고요했다.

마치 세상의 모든 무음(無音)을 이곳 안에 모아 놓은 것 같았다.

오룡일봉 중 그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딱. 딱.

백길이 침체된 표정으로 염주를 굴리는 소리만이 그들의 주변을 맴돌 뿐.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지 일각도 채 흐르지 않았는데 마치 영겁의 시간이 흐른 것만 같이 느껴졌다.

아랫니로 윗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팽후영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입에서 나온 말은 그야말로 파격적인 언사였다.

“……곽 오라버니가 결정하세요. 화산파를 택할 것인지, 아니면 무림맹을 택할 것인지. 그렇지 않고서는 이곳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내보낼 수 없어요. 만일 화산파를 택하신다면…… 결코 살려 보내 드리진 않을 겁니다.”

쾅!

“팽후영! 너 어찌 말을 그리해!”

긴박한 상황인 만큼 더 중요한 사안이다.

허투루 지나갈 수 없는 것이다.

여태껏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이 고고했던 팽후영의 목소리가 아주 미세하게나마 흔들렸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당무옥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어쨌거나 지금까지의 의리를 생각해서라도 죽인다는 단어를 함부로 입에 담았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리라.

이를 잠재운 것은 곽철우였다.

“……진정하거라. 영령이 말이 옳다.”

“혀, 형님……!”

이 중 곽철우와 가장 인연이 깊은 남궁장후가 결국 고개를 돌렸다.

어찌되었건 이들이 오룡일봉으로서 서로 오랜 시간 동안 형제자매처럼 자라 오긴 하였으나, 결국은 모두가 다 다른 문파의 일원이 아니던가. 어쩌면 이번 일이 오룡일봉의 끝이 되는 기점이 될지도 모르는 셈이었다.

이제 더는 촉망받던 어린아이가 아닌, 어엿한 나이를 먹은 성인이니까.

“잠시만……. 잠시만 내게 시간을 다오.”

이를 끝으로 곽철우의 눈과 입이 굳게 닫혔다.

오룡일봉이라고 딱히 다를 바는 없었다.

“……오래는 못 기다려 드려요.”

팽후영의 말이 야속하다고 느낄 새도 없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받은 곽철우가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평생을 먹고 자며 무공의 가르침을 준 화산파가 무림맹에 반기를 들었다.

이것은 엄연한 역모다.

이전 장문인인 양의조가 살아 있었다면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오롯이 화산파를 위해 살았고, 화산파에 해가 될 일이라면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양의조는 시작은 부모님의 복수를 위해 힘을 길렀으나, 결국 자신이 짊어지게 된 화산파를 위해, 그리고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그들을 용서하고 이해했다.

그런 양의조의 손에 길러진 곽철우로서는 양의문이 너무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스승님께서 살아계셨다면 결코 이런 결과를 원하지 않으셨을 거다. 도대체 왜……!’

어릴 적부터 양의문의 성정을 직접 눈으로 보며 자라 왔음에도, 설령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찌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가 이리도 다를 수 있단 말인가?

‘스승님……! 저는 어찌하면 좋습니까? 이미 삐뚤어져 버린 화산파를 택해야 합니까? 아니면 저라도 화산파의 옳은 방향을 바로잡아야 합니까……?’

하나 이미 저세상으로 떠난 양의조가 답할 리는 없는 일.

“젠장, 젠장! 이게 뭔 개소리야, 정말!”

콰앙-!

남궁장후가 결국 화를 이기지 못하고 문을 박찼다.

그와 동시에, 곽철우가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 * *

“이곳이 바로 무림맹 본단이 있는 섬서성인가.”

무심한 목소리로 진천후가 주변을 신기한 듯 둘러보자 여파달이 냉큼 답했다.

“그렇습니다. 교주님.”

그러곤 속 시원하게 뻥 뚫린 섬서성의 성문, 향섬문을 바라봤다.

여파달의 온몸에는 소름이 돋아났다.

‘무림맹, 이 노련한 놈들. 설마 그사이에 이런 걸 만들어 둘 줄이야.’

딱 보아도 엄청나게 거대한 문 전체가 만년한철로 이루어져 있는 탓에 그 문을 순수한 무력으로 뚫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더불어 높이도 높고 그 위로는 뾰족하고 단단한 철 가시들이 빽빽이 돋아나 있어, 밟고 올라서는 것 역시 힘들어 보였다.

만일 화산파가 문을 열어 주지 않았더라면 서안까지 가는 데 꽤나 많은 귀찮음을 감수해야 했으리라.

“제법이군. 무림맹 녀석들.”

순수하게 감탄을 내뱉은 그를 향해 여파달이 조심스럽게 말을 흘렸다.

“교주님. 저희가 여기까지 손쉽게 뚫고 오긴 하였으나, 이곳은 무림맹 본단이 있는 곳인 만큼 조심하시는 것이 좋으리라 판단됩니다. 오랜 세월 동안 무림맹 놈들도 많이 성장했을 겁니다. 하오니, 섬서성에 발을 들인 이상 놈들이 판단을 내리고 대응할 시간을 갖지 못하도록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아아, 여 대주는 너무 노파심이 많아. 그래 봤자 이 좁은 섬서성에서 뭘 어찌한다고 그래? 쥐새끼처럼 무서워서 덜덜 떨며 이딴 무식한 철문 뒤에서 몸이나 웅크리고 숨어 있던 놈들 아니야?”

여파달의 말에 한심하다는 듯 받아친 건 조도연이었다.

조도연은 스스로 내뱉은 말과는 달리 자신의 애도를 손에 굳게 쥐고 있었다.

촤르륵.

“……그 주둥아리. 조심해라.”

이에 심기가 불편한 듯 결국 참지 못하고 냉용후가 자신의 선자를 펼치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들떠 보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긴장한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평소였다면 이쯤 해서 나섰을 홍예예다.

귓가에 무엇이든 들려올 때가 되었음에도 아무런 뒷말이 없자 진천후의 시선이 슬쩍 그녀를 향했다.

‘……역시 아직은 무리인가.’

고개를 돌리자 홍예예는 여전히 식은땀이 온몸에 흘러내려 작은 몸을 덮고 있던 옷이 전부 젖은 채 홍청염의 등에 업혀 죽은 듯 잠을 자고 있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한눈에 보아도 아직까지 영 몸이 좋지 않은 모습이다.

잘렸던 손목이 조금씩 붙어 가곤 있지만 그 여파로 온몸에 독이 잔뜩 올라 열이 펄펄 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공손우경도 의원은 아니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다고 했다.

더구나 여위에게 제대로 맞은 한 방은 의외로 내상까지 입게 만들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무림맹 녀석들. 갈가리 찢어발겨 주겠다.’

가장 아끼던 수하인 홍예예가 앓고 있으니 아무리 냉정한 그라고 한들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리라.

덕분에 무림맹을 향한 원한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그 대가는 이번 원정(遠征)을 통해 톡톡히 치르게 할 것이다.

“왁!”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그때.

진천후의 곁에 휘가 나타났다.

“오셨습니까.”

이젠 제법 휘를 반기는 여파달이다.

그런 그와는 정반대로 진천후의 반응은 싸했다.

“……왔으면 손이라도 거들든, 그럴 거 아니라면 조용히 빠져 있든 해.”

“와, 오늘따라 더 냉정하네. 설마…… 저 꼬마 아가씨 때문에?”

휘가 능글맞게 손과 눈빛으로 홍예예를 가리키자, 진천후의 눈빛이 사납게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알면 닥쳐라.”

그러자 마치 상처받은 짐승처럼 휘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이고…… 닥치라니, 친우한테 너무하는 거 아니야? 내 여린 가슴에 상처를 내다니…… 흑흑. 그래도 제법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칙칙한 사내는 연정을 품은 여인보다 못하다는 건가? 이래 봬도 나 제법 예쁜 편인데.”

“휘!”

진천후가 목소리에 내공을 실을 만큼 역정을 내자, 점점 더 흥미롭다는 듯 휘의 눈가가 언제 눈물을 비쳤냐는 듯 반짝거리며 호선을 그려 냈다.

“뭐, 아니면 말고……. 거참 아니면 아니라고 말로 하면 되지, 굳이 내공까지 실어 낼 필요는 없잖아? 아이고, 내 귀야.”

이정도로는 결코 그에게 티끌 한 점 상흔을 남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홍청염이 손끝을 검파에 슬며시 올려두었다.

하나 그때.

휘가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하며 품 안에서 둥근 환 알 한 개를 꺼내 들자, 진천후와 홍청염의 시선이 묘하게 그 끝을 향했다. 휘가 지금껏 들고 왔던 것들은 허투루 쓰였던 것이 단 하나도 없었던 만큼, 이번에도 역시 신경이 쓰인 것이다.

“……그건 뭐지?”

묘한 약재의 향이 솔솔 나는 그것을 진천후가 모를 리가 없다. 본인은 그다지 관심 없다는 투로 말했지만, 진천후의 눈빛이 달라졌음을 재빠르게 잡아낸 휘가 무심하게 말을 흘렸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친우한테는 주고 싶지 않은 거. 그게 친우보다 여인에게 마음이 더 쏠릴 사람이라면 더더욱.”

“……휘.”

이번엔 마치 어린애를 달래듯 어르는 목소리다.

어딘지 모르게 휘의 감정을 자극시키는 눈빛이 동반되었다. 그리고 휘는 유독 이 눈빛에 약했다.

‘아아- 은근히 사람 약해지게 하는 데는 뭐 있다니까. 명색이 혈교의 교주씩이나 되는 사내놈이 말이지.’

휘는 속으로 짜증인지 뭔지 모를 무언가를 내며 시선을 흘겨보지만 결국 그의 참패다.

“……쳇. 알았어, 알았다고! 정말이지 넌 이상해. 못 당하겠어. 어째 점점 갈수록 나만 당하는 기분이란 말이지.”

더는 못 버티겠다는 듯 휘가 진천후에게 환을 건네주었다.

타악-!

정확하게 낚아 챈, 진천후가 환을 잡은 손바닥을 조심스레 폈다. 일전에 보았던 귀마병을 만들게 해 주는 환과는 다른, 고운 흙색 빛을 띠고 있었다.

“홍 단주에게 먹여 봐. 효과가 제법 있을 거야.”

“효과?”

“절단 상처를 입은 이들이 먹으면 좋은 거야. 아니, 뭐…… 그냥 누구든 이 정도 약이면 죽기 직전의 상처라도 금방 회복할 수 있을 테지만. 저거 진짜 진귀한 건데…… 에라 모르겠다! 너 가져.”

“설마…… 귀마병과 관련된 환은 아니겠지.”

환이라는 사실 때문인지 진천후에게서 아주 눈꼽만큼이나마 남은 의심이 스쳐 지나갔고, 이를 놓칠 리 없는 휘다.

“야!”

결국 참지 못한 휘가 소리를 내질렀다.

그 탓에 모든 혈대의 이목을 받아야 했지만 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설마 친우한테 그딴 장난을 칠까 봐!? 에라이, 됐어. 먹이기 싫으면 이리 내놔! 그게 얼마나 귀한 건데!”

그가 노발대발하자 진천후가 작게 피식거렸다.

그리곤 곧장 환을 든 채, 홍예예에게 다가갔다.

이미 휘와 진천후의 행동을 모두 지켜보던 홍청염으로서는 교주인 진천후를 더더욱 막을 필요가 없었다.

하나 그런 그의 의도와는 달리 거의 반 기절하다시피 보이는 홍예예가 도무지 씹어 삼킬 기색을 보이지 않자, 아예 진천후가 자신의 입에 넣어 씹기 시작했다.

이를 바라보고 있던 휘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으이그. 급했네, 급했어.’

으적으적.

“투.”

그러곤 다시 뱉어 홍예예의 입가에 물과 함께 흘러 넣어 주자, 홍예예가 자연스럽게 꿀꺽 삼켜 냈다.

마지막 한 조각까지 마저 입에 들어가자 변화가 일기 시작한 건 정말이지 순식간이었다.

퉁퉁 부어올랐던 홍예예의 손목이 다시 얇실해지면서, 동시에 희멀겋던 그녀의 얼굴에도 혈색이 눈에 띄게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

그녀의 변화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고통에 소리 지르는 거 외엔 오랫동안 말을 안 한 탓에 마른 목소리긴 했지만, 홍예예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덕분에 안색이 밝아진 것은 진천후뿐만이 아니라 홍청염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장 홍예예를 아끼는 두 사람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터다.

“정말이지, 너 친구한테 그러는 거 아니다? 그거 내가 목숨걸고 어렵게 구해 온 거라고.”

“……미안, 하다.”

띄엄띄엄 들려오는 모기보다 더 작은 소리에 휘의 동공이 잠시나마 화등잔만 해졌다.

“뭐라고?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못 들었으면 말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