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6화
양의문이 서둘러 발걸음을 하고 마침내 문이 열리는 순간.
끼이이이-
만들어진 지 제법 오래되었는지 쇳덩이들이 서로 몸을 긁어 대는 소리가 귓가를 괴롭혔다.
평소였다면 시끄럽다며 귀를 잔뜩 틀어막고 욕지기를 내뱉었을 그지만, 오늘은 그 소리조차도 즐겁게 들려오는 듯했다.
귀를 막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육중한 문이 완전히 열리기를 고대하던 양의문의 눈이 번뜩거리며 빛났다.
쿵-
마침내 문이 완전히 열리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진천후였다.
그저 말없이 서 있기만 하는데도 그의 존재감은 뛰어났다.
파르르-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아날 정도로 말이다.
‘……과연!’
얼굴을 본 것은 단 한 번뿐이었지만 결코 잊기 어려울 만큼 각인이 확실히 된 자였기에 알아보기는 쉬웠다.
진천후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자, 정말 무림맹의 정복이 코앞에 놓인 것 같은 흥분감이 양의문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래서일까.
그간 그에게서 받은 모욕 따위는 이 순간엔 떠오르지 않았다.
“오셨소이까!”
양의문이 진천후를 향해 외쳤다.
반가움이 가득하여 마치 오랜 벗을 마주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런 양의문의 목소리를 듣기는 한 것일까.
진천후는 그를 아주 잠시도 쳐다보지 않고, 정말 말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순식간에 무시당한 양의문의 얼굴이 언제 웃었느냐는 듯 와락 일그러졌다.
‘이이……! 역시나 재수 없는 빌어먹을 새끼 같으니라고!’
이제 곧 천하를 접수하게 될 터이니 너그럽게 이해해 주려 하였건만, 그럼에도 건방진 태도는 여전히 재수가 없지 않은가?
‘안 됩니다. 절대 아니 되십니다. 참으셔야 합니다!’
끊임없이 눈빛으로 외치는 섭위문의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양의문을 향했지만, 그는 그를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양의문의 눈동자 속에, 순간 진천후의 뒤로 엄청나게 많은 대군(大軍)이 들어왔다.
이젠 정말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강시가 대다수를 이룬다. 이내 잔뜩 힘이 들어갔던 양의문의 양 주먹에서 스륵 힘이 풀려 나갔다.
‘……흐으으.’
그제야 섭위문의 긴장감도 함께 녹아내릴 수 있었다.
애당초 진천후라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천하의 양의문을 죽음이라는 공포에 물들게 했다. 저 대군이 없었다 한들, 감히 양의문이 그를 향해 대들려 했을까?
결과는 ‘아니오’였다.
물론 가끔 이성을 잃은 채로 날뛰는 게 주특기인 양의문이었기에 섭위문이 잔뜩 긴장했던 것이나, 다행히도 그런 끔찍한 일은 벌어지지 않게 된 것이다.
까득-
혹여나 진천후를 치게 되더라도, 그 모든 것은 무림맹을 얻고 난 후 행해도 늦지 않을 터.
‘조금만 참자. 조금만 더 참으면 곧 내 세상이 올 터이니……!’
잠시 속으로 심호흡을 천천히 내뱉은 양의문이 들리지 않는 외침을 토해 냈다. 이를 아슬아슬하게 지켜보던 섭위문의 안면이 간신히 살았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겨우 이 정도의 분개심에 대의를 저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때.
섭위문조차 느낀 순간의 묘한 느낌을 모를 리 없는 혈교 측에서 누군가 물어왔다.
“혹,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인가?”
주륵-
날카로운 눈빛과 목소리로 물어 오는 그의 말에 잠시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생각보다 손쉽게 넘길 수 있었다.
“아이고, 아닙니다. 설마 그럴 리 있겠습니까? 있다고 한들 저희가 다 처리할 테니 이런 잡다한 것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보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길은 제가 안내하겠나이다.”
천하의 간신의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第二章. 간두지세(竿頭之勢)
“좋지 못한 소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작금 이보다 더 한 큰일이 어디 있다고?”
“향섬문(向陝門)이…… 열렸다 합니다. 총군사님.”
정보원의 말에 제갈염의 표정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미 향섬문이 거론되는 순간부터 최악의 상황을 머릿속에 쭉 그려 나가기 시작한 제갈염이지만, 충격은 충격이었다.
사천성이든 중경시이든 그게 어디가 되건, 누가 되었건 간에 섬서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성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 성문이 바로 향섬문이다.
근 반백년 전 무림맹에서 만들어진 향섬문은 평상시에는 활짝 열어 두지만, 섬서성 내외로 범죄자가 발생하였거나, 혹은 전투가 생기면 굳게 닫힌다.
혈교와의 대전으로부터 살아남은 무림맹이 가장 먼저 시행한 것 중 하나도 향섬문을 닫는 일이었다.
나가는 쪽으로도, 들어오는 쪽으로도 누군가를 막기에는 최적화된 방향이기 때문이다.
문이 열려 있을 때라면 그 누구도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나, 닫히면 만년한철로 이루어진 성문과 그 위로 잘 벼려진 검과도 같은 상위 무인들이 배치되는 그곳이 이토록 쉽사리 열릴 리가 만무하다.
더더군다나 그곳은 당금 화산파의 최고 무인들이 자리 잡고 지키고 있는 곳이 아니던가?
만일 그 두 세력이 부딪힌다면 못해도 최소 반각은 버텨 주어야 맞는 것이다.
데엥-
그때였다.
제갈염의 뒤통수가 얼얼해진 것은.
“설마…….”
급격하게 눈앞이 캄캄해지던 제갈염의 귓가에 확고하면서도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습니다. 아무래도 화산파가 배반을 한 것 같습니다. 총 군사님.”
쾅-!
“이 어찌……! 빌어먹을.”
결국 가장 최악의 추측이 들어맞은 제갈염의 입에선 절로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평소의 제갈염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욕과 행위였다.
자발적으로 그곳을 지키겠노라 나설 때부터 의심을 했어야, 아니, 이미 자신은 알아챘어야 했다.
알아챌 수 있는 기회는 있었다.
‘하다못해 군사들끼리의 회의에서라도 느꼈어야 했거늘!’
충분히 있었던 시간을 끝없는 의심으로 자신이 놓친 것이다.
제갈염이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주먹을 틀어쥐었다.
“서둘러 가자. 시간이 없다. 어서!”
“예. 총군사님.”
* * *
번쩍.
천의선천기공을 돌리고 있던 송운의 눈이 떠졌다.
‘결국 놈들이 이곳까지 발을 들이게 된 것인가.’
어느샌가부터 기감이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발달한 송운이 어딘지 모를 불안정한 기운을 멀리서부터 느낀 것이다.
강시들은 혼이 없는 자들이라 그저 기운으로 느껴야 하기 때문에 정확히 세는 것은 불가능했으나, 살아 있는 이들은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송운이 조금은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대략 사람만으로도 족히 이백은 되겠군.’
그중에서도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기운 하나가 송운의 심기를 거슬리게 한다.
아마도 그자가 혈교의 교주일 것이다.
그 외로는 비슷한 실력을 오가는 이들이 다섯이 느껴진다. 개중에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이가 초절정 고수의 경지 끝자락에 이르렀다.
‘이들이 오대 혈대주인가.’
어찌 보면 겨우 이백밖에 안 되는 수치라고 볼 수 있으나, 그 다섯을 제외하고도 하나하나가 최소 절정 고수의 반열에 이른 자들이다.
예상은 했으나, 생각보다 혈교의 평균치 무공이 높다.
‘역시 혈교 놈들, 개개인이 모두 어마어마한 전력이구나. ……천지쌍노를 괜히 내보낸 게 아니었어.’
강시를 제외하고 사람으로서 낼 수 있는 전력의 대다수가 절정 고수들 이상이니, 어쩌면 당연했던 것이리라. 그보다 낮은 무공을 지닌 자들이 없으니 말이다.
그런 점을 생각해 보면 사천성이 생각보다 오랫동안 버텨 주었다.
사실 한때는 혹여라도 사천성에서 이 전쟁이 끝나지는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도 가졌었다. 이미 전생에서도 느꼈듯 사천성의 저력은 어마어마하다. 사천성은 마교 대전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낼 만큼 강력한 무인들이 많이 모인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나 역시 그저 바람에 불과했던 것인지, 결국 그곳마저 무너졌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이 사천성을 뚫은 시점에서부터 너무 빠른 시간 안에 섬서성에 발을 들인 것이다.
확실한 건 더 알아봐야 알 터나, 뭔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좋은 상황은 아니나, 이제야 뭐라도 해볼 수 있게 되었다.’
송운이라고 그간 놀고 싶어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 역시 진작 전쟁터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하나 별동대의 급습으로 사방팔방이 뚫리자 급박해져 가는 상황에 황실을 지키라는 명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황명을 받은 이상 송운은 이곳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젠 다르다.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고, 물러나서도 안 된다.
거의 코앞까지 적들이 다가오지 않았던가?
작금, 그들의 전력을 따로 보는 것은 무의미할 터.
툭툭.
일주천을 갈무리 짓고 가부좌를 틀고 있던 자세에서 일어난 송운이 몸을 가볍게 풀었다.
약간의 긴장감이 그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어차피 언젠가는 부딪혀야 했을 이들이다.”
아마도 혈교는 무림맹을 치기 위해 남아있는 모든 전력을 남김없이 다 끌고 왔을 가능성이 높다.
이번 전쟁에서도 지게 된다면 혈교는 완전히 붕괴할 것이니.
가진 모든 걸 쏟아부을 수밖에.
그걸 반대로 생각하면 무림맹 역시 이 전쟁에서 지게 되면 당연히 엄청나게 막대한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물론 당금의 손해도 만만치 않긴 하겠지만 말이다.
이미 무림의 수많은 문파들이 혈교의 손에 박살이 났지 않은가.
잠시 숨을 깊게 들이 내쉰 송운이 한 발자국씩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이 몹시 무거워 보이는 발걸음이었다.
* * *
“……이건 말도 안 돼. 모두가 아는 일 아니야?”
“하……!”
모두가 충격에 빠진 듯 보이는 여섯 명의 사내들과 여인이 각기 서로 몸의 간격을 벌리고 갈라선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자신들의 수준으로는 혈교는 커녕 제법 이름난 악인들과 싸워도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오룡일봉이 꾸준히 수련을 해 오다 다시 세상에 고개를 내민 것이다.
반강제적인 일이었다.
사천성이 뚫렸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어쩔 수 없이 수련을 멈추고 나올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 단순히 사천성이 뚫렸다는 사실보다 진짜 그들이 충격에 빠진 연유는 무림맹의 배반자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들 중 가장 큰 충격에 빠진 것은 당연히 곽철우였다.
오룡일봉 중 그 누구도. 아니, 무림맹의 그 누구도 생각지도 못했던 일일 것이다.
당사자들인 화산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소문은 어찌나 빠른지, 그 짧은 시간 내에도 곽철우는 단숨에 무림맹 내부에서 위기에 몰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곽철우가 화산파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말,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어딘지 모르게 공황 상태로까지 보이는 곽철우의 눈빛이 격하게 흔들렸다.
그와 계속해서 같이 지낸 오룡일봉이라고 해서 별반 다를 건 없어 보이는 듯했다.
화산파의 군사인 양취록과 장로들까지도 모두 그 자취를 감춘 지 이미 몇 시진이 지난 상태라고 한다.
한데 어째서 곽철우는 도망가지 못한 것일까.
오룡일봉의 눈을 피하지 못해서?
혹은 그 역시도 화산파에게 버려진 존재라서?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던 그때,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팽후영이었다.
그녀의 음성은 상황에 비해 비교적 침착하고 냉랭했다. 충격적인 상황임에도 참으로 그녀다운 모습이다.
“아무리 우리와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고 한들, 화산파는 이미 우리에게 등을 돌린 적입니다. 그리고 곽 오라버니…… 는 그 화산파에 속한 제자이고요.”
잠시나마 기대하는 듯 보였던 곽철우의 눈빛이 순식간에 깊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말은 틀린 게 없다.
실제로 그는 작금 화산파의 촉망받는 삼대제자 중 한 명이니.
그런 그를 과연 버리려 했을까?
동정심으로라도 오룡일봉에게 잘 보이게 한 뒤, 화산파의 밀정을 그 안에 심어 두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별별 생각이 오룡일봉의 머릿속을 난잡하게 헤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