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전생-235화 (235/275)

제235화

“……쿨럭.”

전장의 한복판에 쓰러진 여인이 한 움큼 검붉은 피를 토해 냈다.

불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은 듯 보였던 여인의 첫 미동이었다.

이미 여인의 온몸은 만신창이로 피 칠갑을 한 채 성한 곳이 없어 보였고, 사방이 초토화된 것을 보아 좀 전까지 엄청난 사투가 있었음을 몸소 보여 주고 있었다.

만일 아주 작게나마 소리를 내고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죽은 시신 중 하나라고 착각했을 만한 처참한 광경이었다.

한데 어딘지 모르게 여인의 주변은 무언가 정돈되어 보였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한참 동안 숨을 고르는 데 집중하던 여인이 아주 힘겹게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작은 행동조차도 버거워 보였지만 그 행위를 멈추진 않았다.

“……결국, 다 끝난…… 것인가…….”

그랬다.

여인은 바로 여위였다.

여위가 이 꼴이 되기 직전의, 마지막 기억을 더듬어 봤다.

그러자 당시의 기억이 서서히 눈앞에 펼쳐졌다.

‘그래, 그 사내. ……홍청염과의 동귀어진을 노렸지.’

‘끝을 내야 한다. 이대론 다 허망이 죽는다.’

상상 이상의 무력을 자랑하던 홍청염과의 마지막 수를 두기로 결심한 여위가 내공을 모두 끌어 올렸다.

이대로는 더 버티는 건 어렵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결국 적진으로 몸을 날린 여위가 아군에게 소리쳤다.

“모두 피하시오! 소승에게서 최대한 멀리-!”

남은 내공마저도 목소리에 퍼부어 마지막으로 내지른 여위의 목소리에 일제히 모두의 동작이 멈추더니 이내 모두 일사불란하게 멀리 몸을 던졌다.

그녀의 몸이 거대한 기파로 울렁이는 것을 본 것이다.

콰과과과-!

꽈광!

엄청난 굉음과 함께 주변의 엄청난 소용돌이가 그녀의 눈과 귀를 뒤덮었다.

후우웅-!

“그으어어……!”

“크, 크아악!”

까드득-

‘……됐다.’

여위가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일격필살을 날렸다. 그 결과 주변의 땅이 파이고 온갖 사물들이 휘말려 박살이 났다. 죽지 않고 영원불멸의 삶을 살 것 같던 강시들 수십, 수백 구 역시 완전한 안식을 맞이했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기파의 소용돌이였다.

근방에 살아있는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모두가 휘말렸다면 결코 원상태를 보존할 수 없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과연 그녀의 명성은 결코 허위 같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데, 여위는 보았다.

모래바람을 뒤집어쓰긴 하였으나, 멀쩡한 그의 모습을.

‘역시…… 저자는 안 되는 것인가…….’

모든 기력을 잃은 여위의 눈이 흐릿하게 감겨온다.

“네 무위는 잘 보았다.”

자신의 모든 걸 끌어냈으나, 끝끝내 홍청염은 잡을 수 없었다. 쓰러지기 직전의 그녀의 모습을 보며 유유히 빠져나가던 홍청염의 눈빛이 잊히지가 않는다.

‘어차피 놔둬도 알아서 죽을 자.’

그가 보기에 여위는 그저 생명의 불씨가 희미하게 남은 꺼져가는 등불일 뿐이었다.

굳이 죽여주는 수고를 해 줄 필요도, 쉽게 목숨을 앗아갈 여유도 느끼지 못한 탓에 그저 스쳐 지나간 것이다. 거의 시신을 바라보는 듯 응시하던 그의 눈빛은 여위가 생전 느껴 보지 못했던 무력감에 빠지게 만들었다.

순간 온몸에 힘이 빳빳하게 들어갔지만, 여위의 생각대로 몸은 반응해 주지 않았다.

부르르.

‘……허.’

아주 자그마한 진동으로 끝이 난 자신의 몸을 바라보던 여위가 속으로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털끝 하나 자의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군데군데 뼈가 부러지고 인대는 늘어날 대로 늘어났다. 단전에 있던 내공도 끝까지 바닥났으며, 선천지기마저 일부 사용된 상태다.

이런 최악의 몸 상태로 무언가를 기대하는 건 너무도 큰 바람일까.

가만히 두면 몇 시진, 혹은 몇 주야를 채 넘기지 못하고 죽을 육신이라는 소리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송장이로구나.’

죽음이 온다고 해도 의연할 자신이 있었던 여위다.

한데 어딘지 모르게 아쉬움이 자꾸만 마음속에 들끓는다.

이는 어떠한 속세에 대한 미련일까?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내놓은 비기였다.

한데도 놈을 이기지 못하고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잠시 생각해 보니 결국 홍청염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지 못한 한이다.

승려가 이루지 못한 살생의 한을 지다니.

이는 참으로 한심할 노릇이다.

아니, 애당초 승려가 죽음에 의연하지 못하고 욕심을 품은 것이지 않은가.

그간 자신이 해 온 수련은 죄다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 봤자 어차피 곧 죽을 목숨이다.

“……젠…… 장.”

그 때문인지 여위의 입에서는 평생 담아 보지 못한, 그녀의 평생 최고의 욕이 튀어나왔다. 마른 목소리에 가끔씩 울컥 차오르는 핏물이 그녀의 모가지를 움켜쥔다.

그때였다.

제법 익숙한 목소리가 여위의 귓가에 들려온 것은.

“이거 놀랍구려.”

“……?!”

쉽게 떠지지 않던 눈이 순간 놀라움에 번뜩 뜨였다.

“너무 놀라지 마시오. 나도 정신을 차린 것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여위의 생각이 맞았다.

희미해진 눈동자 속으로 비친 것은 당천립이었다.

“당…… 가주……?”

쪼르륵-

힘겹게 메마른 여위의 입가에 당천립이 무언가를 흘려 넣었다.

“맞으니 더는 입을 열지 마시오. 여 장문은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몸이오. 살고 싶다면 굳이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소이다. 후우- 탕약을 달여 낼 기구는 없고, 단지 이 근방에 널린 기력 회복에 좋은 약초를 찾아 빻은 것이니 조금 힘들더라도 다 삼켜 내시오. 그 효과는 떨어져도 당장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보다는 좋을 것이오.”

당천립 특유의 묵직한 음성이 여위의 귓가에 하나하나 어렸다. 결국 당천립이 작금, 자신을 살려 내려는 것이다.

사천당가는 독에 특화된 가문이다.

독초는 곧 초(草)다.

또한 영약에 사용되는 약초도 곧 초다.

약초라고 불리는 것들도 그 양을 조절하지 못한다면 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라 해독약 역시도 수많은 초가 사용된다.

이는 사천당가가 약초의 달인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소리다. 어지간한 의원보다 약초를 잘 다룬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터.

더불어 당금 이곳은 그들의 앞마당과도 다름없는 사천성의 한가운데이다.

‘함께 있던 자가 사천당가의 당문인이라는 사실에 기뻐해야 하는가…….’

힘겹게 파르르 떨리는 눈가를 안간힘을 다해 뜨고 있던 여위의 눈꺼풀이 그제야 가라앉았다.

잠시나마 긴장했던 몸이 다시 풀린 탓이다.

탁, 탁, 탁!

이런 여위의 마음을 아는지, 당천립이 곁에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빻아 내면서 말을 멈추지 않았다. 단지 그의 목소리에는 씁쓸함과 안타까움,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불안감과 화 등등이 잔뜩 섞여 묻어 나오고 있을 뿐.

몸 상태가 최악인 여위가 들어도 그 모든 감정이 다 전해져 왔다.

“……운이 좋아 살았소. 아마 여 장문의 외침이 아니었더라면, 그 폭발에 휘말려 죽었을지도 모르지.”

“……미안…… 합니다.”

“됐소. 그런 사과 듣겠다고 꺼낸 이야기는 아니었으니. 되레 여 장문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이미 그 자리에서 모두 다 의미 없이 전멸했을 것이외다.”

여위의 불안감을 해소시켜 주려 하는 것인지.

혹은 본인의 불안감을 해소시켜 보려 하는 것인지.

이도 저도 아니라면 무엇인지 모를 그의 말은 계속되었다.

“다행이라면 여 장문의 무공에 전쟁에 나왔던 대다수의 강시가 휘말려 죽었다는 사실과 이미 혈교는 모두 떠났다는 점이며, 불행이라면 남은 이들 중에 산 자는 몇 없다는 것이오.”

그 말인즉슨, 당천립은 전멸이 아니라고는 하였으나 아미파든 사천당문이든 거의 전멸에 가깝다는 것이다.

뚝-

이내 여위의 야윈 볼 가를 따라 불투명한 액체가 타고 흘러내렸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알면서도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마음이리라.

여위가 조금은 나아진 목소리로 작게 읊조렸다.

“……아미…… 타불…….”

아미파의 장로로서 죽어 간 이들을 향한 염불이었다.

‘부디 이 불쌍한 중생들을 구원해주소서.’

* * *

그 시각.

화산파에 몸을 웅크린 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양의문에게도 소식이 닿은 건 순식간이었다.

“장문인! 드, 드, 드디어……!”

꿀꺽.

“숨넘어가겠다. 천천히 말해 보도록 해라.”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식사 시간이다.

전쟁 통에도 끼니마다 진수성찬을 차려 먹는 것을 멈추지 않은 양의문으로서는 섭위문의 숨이 넘어가는 것을 걱정한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여 자신의 식사 시간을 방해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을 은연중에 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 말에 감명받은 듯 보이는 섭위문의 모습에 양의문이 혀를 절로 내둘렀다.

‘저놈은 머리는 좋은데 쓸데없는 곳에서 눈치가 안 좋단 말이지.’

하나 양의문의 예상과는 달리, 섭위문의 입에서 나온 것은 그의 두 눈을 희번덕거리게 만들 만큼 엄청난 말이었다. 그것도 그냥 놀란 것만이 아니라 입에 막 집어넣은 고깃덩이 한 개를 단숨에 꿀떡 삼킬 정도로 놀라운 소식이었다.

“마침내 혈교에 의해 사천성이 완전히 뚫렸다 합니다! 장문인!”

“……뭐, 뭐라?! 그 말이 정녕 사실이냐!”

끼익-

쿠웅!

철퍽-!

그 큰 덩이를 삼켰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양의문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덕분에 양의문이 앉아 있던 의자가 바닥에 쓰러지고, 황제의 밥상에도 간혹 올라올 법한 진귀한 반찬이 담긴 식기가 흔들리며 바닥에 떨어졌지만, 이미 이는 그의 관심사에서 벗어난 듯했다.

두근두근.

양의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오기 시작한다.

온 전신이 떨리고 세차게 뛰는 심장 박동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진다.

“제가 어느 안전(案前)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그 어느 때보다 확고한 음성이 차 있었다.

섭위문의 말대로다.

그가 이런 중대한 사항으로 농을 치기엔 그는 너무도 심적으로도 신(身)적으로도 나약한 존재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양의문이니.

부르르-

순간, 양의문의 전신에 소름이 끼쳐 왔다.

“오오, 드디어 그들이 오는가!”

그간 혈교에게 받았던 치욕 따위는 생각나지 않는 듯 양의문의 마음에는 반가운 마음이 잔뜩 일기 시작했다.

번쩍!

동시에 양의문의 두 눈에 탐욕스럽고도 더러운 검은 안광이 비쳤다.

이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순간이란 말인가.

더 빨리 치고 들어올 줄 알았던 혈교가 사천성에서 지체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양의문의 마음은 매 순간순간이 곤혹이었다. 설마 이러다 혈교가 사천성을 뚫지 못하고 이대로 자신이 꿈꿔 왔던 모든 것이 끝이 나는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하기 바빴던 시간이 눈앞을 훑고 지나 간다.

진천후를 알게 되고, 태어나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알았다.

하나 두려움도 잠시일 뿐.

무림맹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희열감에 두려움은 묻혔다. 그 이후의 날들은 매일매일이 이때가 오기만을 기다려 온 시간이었다.

한데 드디어 혈교가 가장 걱정되었던 사천성의 벽을 뚫었다.

이제 더는 이렇게 마음 졸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제 무림맹 본단으로까지의 남은 관문이라고는 오롯이 이 섬서성의 벽뿐이다.

무림맹의 최고 무인들이 있으면 무엇하랴?

그 섬서성의 벽은 그 누구의 손도 아닌 자신의 손아귀에 단단히 쥐어져 있는 것을!

혈교가 중원에서 움직인 이래, 그 어느 때보다 더 쉽고 빠르게 무혈입성으로 지나가게 될 것이다.

이는 결국 오랜 염원 끝에 다다른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이 주체 못 할 정도로 끓어오르는 흥분과 희열을 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훗날 이 사실을 알아챌 때쯤 백능, 그리고 제갈염 그놈이 나를 믿었다는 것에 대해 꽤나 속이 쓰리겠지. 크흐흐흐!’

짝-!

“아니지.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문! 그래, 당장 문을 열 준비를 하거라. 나도 채비를 하고 나갈 터이니! 무림맹 놈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느니라!”

“예, 장문인! 그리 이르겠습니다.”

섭위문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신난 목소리로 양의문의 말에 답했다.

이제 곧 그들의 세상이 올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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