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4화
모두가 술에 절어 승전을 만끽한 야심한 새벽.
“으음…… 무울……. 무…… 으아악!”
밤새도록 먹고 마신 갈증에 물을 찾던 무인 하나가 기겁하는 비명과 함께 눈을 떴다. 잠결에 내뻗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질척한 느낌과 코로 스며드는 비릿한 향은 그의 곁에서 자고 있던 동료 무인의 피였다. 술에 취하지 않았다면 이 정도로 늦게 알아채진 않았으리라. 뒤늦게 뜬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단 한 번의 방심이 결국 크나큰 실수로 이어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면,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이미 무인의 주변으로는 사방이 죽은 자들로 가득한 채,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끄아아악!”
콰앙-!
“장문인! 적이 쳐들어왔습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청성파의 막사는 제법 많은 무인이 술을 마신 탓에 그 피해는 점점 커지고 있는 추세였다. 재빠르게 몸을 일으킨 제갈세가들이 진법을 시전해 나갔지만, 어쩐 일인지 절반은 통하고 절반은 통하지 않았다.
제갈세가 중 누군가가 제갈기를 향해 잔뜩 당황한 음성으로 외쳤다.
“자…… 장로님! 몇몇 강시에게 진법이 통하지 않습니다!”
“…….”
“장로님!”
다급하게 제갈기를 부르는 제갈세가인의 목소리는 점점 불안감에 차오르고 있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전황이 좋지 않은 쪽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탓이다. 더불어 시간은 점점 흘렀고, 진법을 뛰어넘은 강시들 몇몇이 제갈세가를 향해 흉악한 모습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하나 제갈기 역시도 당혹스러운 점은 마찬가지였다.
불과 몇 주야 전까지만 해도 굳건히 통하던 진법이다. 잘 통하던 진법이 갑작스럽게 막히는 데에는 필히 연유가 있을 터다.
제갈기가 눈을 부릅뜨고 전투의 중심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좀 전보다 더욱 밝아진 제갈기의 시야에 지금껏 봐 왔던 강시들과 묘하게 다른 신형이 포착됐다.
‘설마…….’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제갈기가 상단전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자 닫혀 있던 상단전이 조금 열리면서 자다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조금은 멍하던 머릿속이 다시 상쾌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불과 방금 전까지도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제갈기의 안면이 난감하다 못해 끝내 좌절로 물들었다. 주먹을 꽉 쥐고 머리를 굴리던 제갈기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낸 것이다.
‘설마 그사이 숨어 지내며 새로운 강시를 만들어 냈단 말인가?’
가정은 현실로 다가왔고, 그걸 지켜보고 있던 제갈기의 입가가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곳에서 모두가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점점 압박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제갈기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최악인 상황이라고 해서 이렇게 두 손, 두 발 다 들고 당하기만 할 수는 없는 법.
‘적어도 이곳에 있는 혈라 강시만큼은 우리 손으로 모두 박살을 내야 한다. 모두가 죽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그것이 바로 제갈세가가 파견된 가장 궁극의 이유다.
번뜩-!
다시 정신을 차린 제갈기의 흐릿하던 동공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진법을 펼치고 있는 제갈세가인들을 향해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끝까지 경건했다.
“우선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자신이 위치한 자리를 지키도록 하라!”
“예!”
휘와의 대화를 마친 진천후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때마침 홍예예의 손이 간신히 붙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며칠 쉬면 완벽하게 붙을 수 있다는 공손우경의 말에 홍예예를 지킬 이들 몇몇을 놔두고 재출전을 명했다.
당연히 자신도 함께 하겠다며 반발할 줄 알았던 홍예예가 생각보다 쉽게 설득된 덕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줄일 수 있었다.
적의 허점을 간파해 냈는데 이곳에 머물고 있을 틈 따위는 없었다. 당장이라도 자신의 조부를 병들어 죽게 하고 혈교를 벼랑 끝까지 내몰아 넣은 무림맹을 처단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것이 지금껏 진천후가 살아온 원동력이었으니.
제갈기의 생각대로 진천후는 진법에 광독 강시가 통하는지를 실험하기 위해 혈라강시와 함께 절반을 섞어 내보냈다.
자칫 잘못하면 강시를 모두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손우경이 결사반대하였으나 교주의 명은 절대적이었다.
그렇게 내보낸 실험은 보기 좋게 성공했고, 곁에서 덜덜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억누르며 걱정하듯 바라보던 공손우경의 눈빛에 희열이 가득 들어찼다.
“여, 역시 내 강시다! 잘한다, 내 새끼들!”
전장, 아니 거의 대학살에 가까운 전투의 중심 속에서 신이 난 듯 날아다니며 자신의 도를 휘두르던 조도연이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그려졌다.
청성파 무인들의 눈에는 마치 지옥에서 빠져나온 악귀처럼 보인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교주님, 어찌할까요?”
조도연이 안간힘을 쓰며 막고 있는 제갈세가를 가리켰다.
“본래 계획했던 대로 시행하라. 최대한 빠르게 이곳을 지나간다.”
“명 받잡겠습니다.”
달포 하고도 칠 주야의 시간이 흐른 당금.
마침내 혈교가 사천성을 뚫고 지나갈 때였다.
* * *
햇볕이 내리쬐는 전장의 한가운데.
여위와 홍청염이 서로를 바라봤다.
“기어코 이곳을 뚫고 지나가야 하겠소?”
여위가 줄 수 있는 마지막 자비다.
홍청염은 말없이 눈빛을 보내 왔다.
물론 그의 의지는 더할 나위 없이 확고해 보였다.
“절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구려.”
곁에서 이를 보고 있던 당천립이 여위에게 조용히 읊조렸다.
여위가 고개를 돌려 뒤를 둘러보았다.
아직까지도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못한 이들이 대다수다. 그나마 이 주야 동안 잘 먹고 잘 쉰 덕에 이만큼이나마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긴 아미파 무인들의 눈에는 여전히 여위를 향한 확고한 믿음이 보였다.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믿음!
그래서 더 눈에 밟혔다.
다시 한번 여위의 고개가 돌아간다.
이번엔 적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인간보단 강시가 더 많은 적의 기세는 아주 흉흉하고 칙칙했다.
마치 세상 모든 악의 어둠을 잡아먹은 듯 말이다.
“반드시 이 싸움은 이겨야 합니다.”
그것은 곧 여위의 바람.
아니 여기 있는 모두의 바람이다.
그것이 혈교가 아닌 그보다 더 악독한 무리일지라도.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오. 나도 동감하는 바요.”
“모두 죽지 말거라. 반드시! 살아서 함께하자꾸나.”
여위가 자신의 검파를 굳게 거머쥐었다.
* * *
여위의 말을 시작으로 다시 전개된 전투는 금세 피로 붉어졌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홍청염이 여위에게 달라붙었고, 그 둘의 검은 점차 격해지고 있었다. 하나 여위의 검에는 그것이 있었고, 홍청염의 검에는 그것이 없었다.
망설임이라는 무서운 마음이.
쐐애액-!
카가가각-!
“하악…… 크흡……!”
퍼엉!
어깨를 파고들어 오는 홍청염의 검을 간신히 막아 낸 여위가 작게 뭉친 장력을 날렸으나 이는 허사였다.
벌써 세 군데나 베인 그녀의 무복은 피로 흥건했다.
물론 그동안 홍청염이라고 단 한 번의 상처도 입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여위 쪽이 좀 더 심각해 보였다.
그런 여위가 그나마 버티고 서 있을 수 있는 연유는 아마도 정신력이리라.
타닷-!
홍청염이 아쉬움을 토로한 채 결국 한 발자국 물러선 후, 여위를 무표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당금이라도 도망가려 한다면 잡지는 않겠다.”
“……이 한 몸 바쳐 중원의 평화를…… 일굴 수 있다면 결코 죽음을 마다하지 않을 것…… 이오. 크윽…….”
숨을 가쁘게 들이마시면서도 목숨을 내놓겠다고 하는 이 여인이 홍청염은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본디 인간이란 그렇게 스스로의 목숨이 가장 중요한 이기적인 자들이 아니던가?
홍청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으로 이상한 무인이로군. 어째서지?”
실제로도 홍청염의 검이 닿은 수많은 무인이 그러했다. 여태 전쟁을 누비며 검을 맞대 온 자들은 모두 그의 모습에 기겁을 하고 도망가기 급급했다.
물론 도망가겠다며 자신의 병장기를 뿌리친 채 달아나는 그들의 등 뒤에 검을 꽂고 그 반응을 즐겼다.
여위 역시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살려 줄 생각은 일 할도 없었다. 더불어 자신의 여동생의 손목을 벤 자다.
한데 여위는 끝까지 발악을 멈추지 않는다.
홍청염은 계속해서 검초를 주고받으면서도 그에 대한 궁금증을 풀지 못했다.
‘아미파의 장문인이라서?’
하나 어딘가의 수장이라는 연유로 버티고 있다고 보기에는 전에 보았던 수많은 수장은 목숨이 위급해지자 자리를 피해 꽁무니 빠지게 도망가기 바빴다.
계속해서 궁금증이 풀리지 않아 물었지만 여위의 답변은 끝내 들려오지 않았다.
홍청염이 문득 하늘을 바라보았고, 제법 시간이 흘렀음을 직감했다.
“끝을 내야겠군.”
* * *
스륵.
절망적인 눈빛을 한, 정보원이 참혹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무슨 일인가?”
조금 불안한 감정이 없잖아 있었지만, 제갈염은 차분하게 물었다.
막상 그의 앞에 서자 잠시나마 머뭇거리던 정보원은 그 천근과도 같이 무거워진 입을 열어야만 했다.
전하기 힘들지만 최대한 빠르게 사실을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천성이…… 뚫렸다 합니다.”
“……뭐라?!”
제갈염의 자다 깬 목소리가 갈라졌다.
계속되는 밤샘에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러 들어온 침소에서 들은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설마하니 사천성마저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밀릴 줄이야!
다른 곳에 비해 오래 버티긴 했으나, 그뿐이다.
결국 패한 것이다.
그 말인즉 아미파와 사천당문, 그리고 청성파가 모두 당했다는 말이다.
“사태는 어느 정도더냐?”
“그것이…….”
쿵.
“총군사님!”
침상에서 일어나려던 제갈염이 다리에 힘이 풀린 채 쓰러지자, 정보원이 빠르게 그를 부축하려 들었다.
하나 제갈염은 손을 내저었다.
“나는 괜찮으니 어서 말해 보거라, 어서!”
사천성이 뚫리면 이곳 섬서성까지 오는 건 순식간이다.
이미 세 문파가 다 뚫렸는데 이곳까지 오는 길목을 지킬 이가 대체 누가 있다는 말인가.
“……약 세 시진 전에 고헌현과 흥문현이 뚫렸으며, 두 시진 전에 도성현과 목리현이 뚫린 것 같습니다. 청성파는 거의 전멸이고, 아미파의 장문인은 그 자리에서 즉사. 그리고 사천당문의 장문인은 행방불명이라 합니다.”
정보원이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제갈염의 두뇌가 빠르게 두뇌를 굴러갔다.
이미 정예 무인들은 최전방에서 모두 전사했을 터다. 그들이 오는 길에 다른 무인들을 마주했다 하더라도 이미 탄력을 받기 시작한 혈교의 무인들은 그조차도 쉽게 뚫고 이곳까지 달려오리라.
‘두 시진과 세 시진.’
사천성과 섬서성은 코앞이다.
그 정도 시간이라면 이미 충분히 섬서성까지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당장, 당장 송 소협을 부르거라. 아니, 장로들을 모두 부르고 맹주님께도 이 사실을 알리도록.”
“그리하겠습니다.”
정보원이 나간 지 일각이나 지났을까.
옷을 갈아입는 내내 어찌 처리해야 할지, 상황을 어찌 꾸려야 할지 생각하던 제갈염에게 또 다른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