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전생-233화 (233/275)

제233화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어오는 진천후의 모습에 휘가 절로 앓는 소리를 냈다.

“끙……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아마 그사이에 무림맹 위쪽 지방에 있는 무인들도 사천성으로 내려올 텐데? 무림맹 놈들도 작금에 와서는 제법 무공이 높은 무인들을 데리고 있다고.”

특히나 재야의 고수.

혹여나 스스로 몸을 숨긴 전대 고수들이라도 튀어나오는 때엔, 상황이 역전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당연히 전투는 진천후가 이길 테지만, 혹시 모르는 상황에는 늘 대비해야 한다고 배웠다. 휘는 그것이 조금 걱정이 되는 것이다.

“하나 무작정 쳐들어가기엔 제갈세가 놈들이 쓰고 있는 진법이 까다롭고 아직 제대로 파악도 되지 않은 상태이지 않은가.”

“세상에! 진천후. 언제부터 네가 강시의 힘만 믿었다고? 네가 당장 나서서 전장만 휩쓸어도 다 죽어날 텐데? 하아…… 하나 말해 주자면, 저 진법은 사람에겐 통하지 않아. 오롯이 혼이 없이 주술로 인해 움직이는, 그것도 혈라강시들에게만 통하는 진법이라고.”

“그 말 사실인가?”

대충 흘기듯 듣는 것 같던 진천후가 두 눈을 빛냈다.

“아직도 내 말을 못 믿어? 우리 주군께서 직접 말씀해 주신 거라고! 주군께선 거짓말은 안 하셔.”

길길이 날뛰며 말하는 휘의 말에 진천후가 잠시 입을 닫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당금 이렇게 버리고 있는 시간이 아쉬운 때다.

휘의 말이 진천후의 뇌리에 강하게 박혔다.

‘내가 언제부터 불가능에 두려워했지?’

애당초 혈교가 다시 일어난 것도 불가능할 거라 여겨진 일이었다.

이내 진천후에게서 망설임이 사라졌다.

“……고맙다.”

“으, 그 말 참 듣기 힘들다. 아아, 난 당장이라도 이 싸움이 재개되었으면 좋겠어. 전장은 언제나 희열이…….”

“그러도록 하지.”

“뭐?”

순간 휘가 자신의 뭔가를 잘못 들었다는 듯 귀를 후벼 팠다.

그런 그의 행동의 의미를 알아챈 것인지 진천후가 다시 한번 말했다.

그것도 잔뜩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전투를 재기하겠다.”

* * *

사기가 바짝 오른 청성파의 무인들은 그날 밤도 그야말로 축제에 가까웠다.

계속해서 가장 크게 발목을 잡고 있던 강시들이 꼼짝도 못 하고 있으니 두려울 것이 무에 있단 말인가.

분명 전투가 지속되는 전장에서 술은 금지되어 있다.

하나 이미 한층 소강상태에 접어든 전투 상태를 보아, 시원하게 술 한잔 걸쳤으면 좋겠다는 의견들이 묘하게 무리를 이루기 시작한 것이다.

다들 어차피 강시만 막아 내면 혈교의 무인들을 제압하는 건 순식간 아니냐며 다들 기고만장해져 있는 상태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하게 생떼를 부리는 건 다름 아닌 이사흠이었다.

평소 술을 가까이 하는 이사흠이다.

벌써 전쟁이 시작된 후 달포가 넘도록 제대로 된 술을 입에 대지 못한 그가 판단하기로 이보다 더 좋은 시기는 없다. 이번이 지나면 또 언제 술을 마실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이기면 되긴 하겠지만, 그건 이기고 난 후 승리의 술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어제보다 더욱 강경하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아이고, 장문인! 애들 사기 좀 올려 보려는 심산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하나 사흠아. 아직은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게 아니지 않느냐. 제갈세가인들 역시도 아직 술은 무리라는 이야기를 전해 왔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될 터인데, 어찌 이를 그리 못 참는 게야.”

“허어, 오늘따라 왜 이러십니까. 아까 혈교 놈들이 바짝 꼬리를 말고 숨어 들어간 것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이게 다! 제가 이룬 성과입니다. 하오니 애들과 함께 술 한 잔 정도는 허락해 주시지요. 장문인.”

그런 그의 모습 속에서 이제는 완전히 깨달을 수 있었다.

백무량이 알던 예전의 이사흠은 없다.

작금은 오롯이 자신의 잇속만 채우고 놀기 바쁜 한량일 뿐.

자꾸 꼬드기려는 이사흠과 아직까지는 굳건히 반대하고 있는 독비량 사이에서 보다 못한 백무량이 한 수 거들었다.

“이 사숙님. 전쟁 중에 술은 금지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어허! 네놈이 낄 자리가 아니다. 자랑스러운 우리 청성파 무인들의 사기를 올리려 하는 자리이거늘. 어찌 네가 여기에 끼는 게냐?”

하나 이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백무량이 비록 무림맹에서 군사의 위치에 올라 있지만, 결국 자신의 본문인 청성파, 그것도 장문인의 사제인 이사흠에게 백무량은 아직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일 뿐인 것이다.

잠시 표정을 굳혔던 이사흠이 다시 독비량을 향했다.

그러곤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들었다.

“자자, 사형. 자고로 사내라면 술과 고기는 기본이 아니겠습니까? 많이도 풀지 않습니다. 그저 술 세 동이면 됩니다.”

계속되는 청에, 처음엔 안 된다며 말리던 독비량도 슬슬 거절하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한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결코 먼저 꺾지 않는 그의 아집을 알기에, 차라리 세 동이를 내주고 여기서 끝을 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 독비량이었다.

“후우…… 결코 세 동이 이상은 아니 된다. 알겠느냐? 그리고 경비를 서는 자들에게는…….”

“절대로 경계를 서는 자들에게는 술을 먹이지 않겠습니다. 압니다. 알지요. 알고마다요! 크하하하! 역시 우리 사형이십니다! 배포가 이리도 크시고 은혜가 하해와 같으니 이 어찌 청성파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끝끝내 이어진 줄다리기의 승자는 이사흠이었다.

“자자, 다들 축배를 들자!”

“와아아-!”

결국 밤새 경계 태세를 갖추어야 할 인원들을 제외한 모두에게 다량의 술이 풀렸다. 대략 두 시진쯤이 지났을 때는 단 세 동이만 풀겠다던 이사흠의 약조는 새카맣게 사라지고, 어느덧 열 동이에 가까운 술이 쌓여 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다들 한 말술 하는 무인들이다.

술에 갈증을 느낀 이들이 비단 이사흠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전체적으로 승전보를 움켜쥐었음에도 어딘지 모르게 침체되어 있던 무인들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는 사실이었다.

이를 보고 있자니 이사흠의 판단도 마냥 나쁜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독비량이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긴장을 하고 있었던 듯싶다. 하니 무량이 너도 오늘 밤만큼은 편히 있거라.”

“알겠습니다. 가주님.”

음주가 시작된 이후로 백무량의 표정이 밝지 못하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독비량이 이를 달랬지만 잠시뿐이었다.

잠깐이나마 억지로 미소 짓던 백무량이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다시 심각해졌다.

그리고 속으로 그의 인생에 있어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던 누군가를 찾아 고요히 외칠 뿐이었다.

‘……부디 오늘 밤만큼은 무사히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천지신명이시여.’

* * *

제갈세가의 도움으로 전장의 승률을 확신하기 시작한 청성파인 반면.

아미파는 사천당문이 합세함으로써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다행스럽게도 생각보다 홍예예와 홍청염이 이끌고 온 강시들의 숫자가 많지 않아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각종 독 무기로 무장한 사천당문이 혈교의 혈대와 맞섰고, 무력이 강한 아미파가 오롯이 강시들만 전담한 것이다.

아무리 혈교의 혈대가 강하다고 한들, 독으로는 천하에 따라올 자가 없는 사천당문의 장문인과 장로들이 직접 나선 전투에서 완연히 버텨 내는 것은 무리였으리라.

“놈들의 무력이 생각보다 세오.”

탁-

간단한 죽과 말린 육포로 식사를 마친 당천립이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곤란하다는 듯 말을 곱씹었다. 더 많은 전쟁 식량이 당도했지만, 한가하게 고기를 뜯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이에 여위 역시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큭.’

순간, 여위가 자신도 모르게 왼쪽 어깨를 감싸 쥐었다.

이 주야 전.

홍청염과의 비무에서 입은 왼쪽 어깨의 찰과상이 욱신거린 것이다.

아주 찰나의 순간 베인 상처지만 결코 그 깊이가 가볍지 않았다.

제법 효험이 강하다는 아미파의 금창약을 사용해 봤으나 쉽사리 나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치 불에 덴 듯 화끈거리는 상처는 벌써 이 주야째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런 상처를 입어 본 게 과연 얼마만이던가.’

고통과 함께 그날의 급박하던 상황이 여위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한참 동안 검을 섞던 여위와 홍청염의 사이로 사천당문의 무인이 날린 작은 독침이 파고들었다.

그 틈을 타 잠시 검을 바로 쥐려던 여위를 홍청염이 덮쳤다.

여위의 손놀림 역시 경이로웠으나, 홍청염은 한 술 더했다.

피가 튀기는 건 역시 순식간이었다.

‘처음 보았던 그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냉정을 잃었다. 마치 피에 이성을 잃은 듯 보이면서도 상대의 아주 미세한 허점조차도 놓치지 않았어. 흔한 마인들이 휘두르는 검과는 그 무게가 다르다.’

역시나 홍청염의 검은 살검 중에서도 살검이었다.

‘어쩌면 살성(殺性)을 타고났을지도…….’

그런 자가 살성까지 타고났다면 그야말로 재앙이다.

아니, 이미 혈교가 중원에 고개를 들이민 이상 당금 이곳은 지옥과도 같았다.

여위가 입술 끝을 살짝 깨물었다.

“여 장문. 괜찮소?”

여위의 안색이 영 좋지 못하자 당천립이 짐짓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당금은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홍예예가 자리를 비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홍청염…… 그자를 막을 방법이 필요해요. 그자의 무위가 상당히 높습니다. 뿐만 아니라 혈대 역시 하나하나가 강합니다. 과연 광서성이 단숨에 밀린 연유를 알 것 같더군요.”

작금 중원의 여 무인들을 통틀어 가장 높은 무위를 자랑하는 여위다. 물론 남 무인들 사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여 무인이라면 누구든 여위를 동경할 만큼 말이다. 그런 그녀가 완전히 승기를 잡지 못하고 무승부를 냈다.

또, 여위의 입에서 이러한 이야기까지 나왔다?

‘여 장로가 홍청염을 잡지 못하면, 우리에겐 어쩌면 승산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무위는 결코 얕볼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아는 당천립으로서는 조금 당혹스럽기도 했다. 또한 동시에 결코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당천립이 입가에 쓴 미소를 담아냈다.

비록 싸움에 무공이 전부는 아니나, 무공으로 따지자면 자신보다 여위가 한 수 앞선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역시 그자를 쉽게 보내 주면 안 되었던 게구려.”

“결코 살려 두어서는 안 될 자입니다. 현세에 도움이 되지 못할 겁니다.”

늘 손속에 여유를 두던 여위 역시 이번만큼은 살생을 입에 올릴 정도로 위험한 자.

그런 자를 상대하려면 어찌 해야 할까.

당천립이 최악의 상황을 가장해 보며 머리를 굴렸다.

다행이라면 아직 지난 전투에서 사천당문이 가장 자랑하는 암기들은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일까.

‘놈들이 금강불괴가 아니길 간절히 바라야겠군.’

어떻게든 사천성의 문을 열어 주고 싶지 않다.

이곳은 사천당가와 아미파, 그리고 청성파가 오랫동안 가꿔 온 터전이며, 소중한 가족들이 사는 곳이다.

더불어 오랜 시간 동안 명문 문파로 자리를 잡아 온 그들로서는 혈교에게 졌다는 오점을 남기고 싶지도 않았다.

“우리도 최대한 힘을 내 보겠소이다. 다음 전투에서는 반드시 그 끝을 낼 수 있도록 말이오.”

두 장문인의 더욱 단단해진 눈빛이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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