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전생-232화 (232/275)

제232화

“허…… 이놈아. 네 눈엔 내가 괜찮아 보이느냐?”

음여랑이 어이없다는 듯 한숨과 함께 말을 토해 냈다.

그 말은 곧이곧대로 공대복의 심장에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지만, 차라리 그 아픔이 나았다. 좀 전처럼 계속해서 음여랑이 따뜻하게 대했더라면 되레 그의 마음이 편치 않았을 테니까.

“……아닙니다.”

“대복아, 내 하나만 묻자.”

“말씀하십시오, 음 장로님.”

“방주님이 돌아가신 건 알고 있느냐?”

쿵-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음여랑의 입에서 흘러나온 물음에 심장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역시…… 알고 계셨구나.’

당연했다.

멀쩡했던 방주가 사라졌는데 모를 리 없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개방이 어떻게 돌아섰는지도 이제야 제대로 감이 왔다.

자신의 신변과 전 방주 공이추의 죽음.

그리고 놈들이 공이추를 죽이고 갈취한 타구봉으로 개방을 뒤흔들어 놓은 것이리라.

공대복이 다시 한번 주먹으로 스스로의 가슴을 내려쳤다.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창월랑이 더욱더 숨을 죽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만 더 물어보자.”

공대복이 고개를 주억이자, 거침없던 음여랑의 목소리가 떨려 오기 시작했다.

“방주님을…… 후.”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천금처럼 무겁고, 마음은 더더욱 무거웠다.

‘제발.’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는 만큼 음여랑이 크게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한 뒤, 간절한 마음을 담아 힘겹게 질의를 끝맺었다.

“……방주님을 돌아가시게 한 게 혹시 너냐?”

“아닙니다. 그건 정말로! 제가 아닙니다. 그건…….”

“그럼 됐다.”

“예?”

“네가 아니라면 되었다는 말이다. 이만 가자. 배가 고프다.”

“……우선은 호남성에 들어오기도 했고, 무엇보다 무림맹의 시선이 모두 혈교가 있는 사천성으로 몰렸을 겁니다. 그러니 지금부턴 몸을 추스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두 분 모두 몸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음여랑의 말뜻을 단박에 알아들은 공대복이 다시 당면한 상황으로 돌아왔다.

그의 말이 맞는다.

어찌 되었건 살 사람은 사는 게 먼저다.

창월랑 역시 아직까지는 젊은 패기로 이를 악물며 버티고 있으나, 상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긴장을 푸는 순간, 가장 먼저 쓰러질 것은 음여랑이 아니라 창월랑일 것이다.

그때,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창월랑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네 말을 어찌 믿고? 놈들이 시켰느냐? 지금이라도 가서 다시 붙어 꼬드겨 보라고?”

비꼬듯 말하는 창월랑의 목소리가 차갑다.

공대복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장로임에도 불구하고 공대복과 나이가 크게 차이 나지 않아 제법 가깝게 지내 왔던 두 사람이다.

한데 창월랑의 두 눈에는 그를 향한 원망이 가득했다.

그간 쌓아 온 정은 모두 이미 사라진 것일까.

늘 웃어 주던 창월랑의 푸근한 얼굴은 씻은 듯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당귀를 한가득 입가에 넣고 씹은 것처럼 입안이 떨떠름했다.

하나, 공대복은 창월랑을 욕할 처지가 아니었다.

이 모든 게 스스로 자처한 결과였으니까.

개방이 협박받을 당시 가장 반발이 심했던 이들 중 한 명이 바로 창월랑이었다.

음여랑 역시 완전히 밉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애당초 이 사태에 이른 근원이 공대복이었으니, 좋게만 보이지 않는 것이리라.

인과응보.

‘당연한 대가다.’

마음을 가다듬은 공대복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려 창월랑의 눈을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원망, 슬픔, 배신감 등등의 갖가지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자신이 겪지 않은 사건들을 다 겪고 왔을 그에게 공대복이 할 수 있는 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단 한 마디였지만, 공대복의 말에선 진심이 묵직하게 느껴져 왔다.

“이…… 개자식!”

창월랑의 주먹이 굳게 쥐어졌고 코앞까지 날아오자, 공대복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정도의 배신감을 안겨 줬는데 이깟 주먹 한 방 맞지 못할 연유가 무어란 말인가.

몸을 맡기듯 힘을 뺀 공대복이 고개를 틀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미 얼굴을 강타했어야 할 주먹이 느낌조차 없자, 이상함을 느낀 공대복이 슬그머니 감았던 두 눈을 떴다.

‘……?’

한데, 공대복의 시선 끝에는 창월랑이 없었다.

“차, 창 장로님?”

“아래다.”

음여랑의 어이없어하는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공대복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그제야 창월랑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결국 온몸에 힘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은 것이다.

‘……젠장.’

공대복이 죽도록 미웠지만, 주먹질조차 마음껏 할 수 없었다.

얼굴을 보면 꼭 한 방 제대로 먹여 주리라 다짐했던 그인데도, 얼굴 코앞까지 갔던 주먹은 제멋대로 멈추고 말았다.

아니, 그의 마음속에 작게나마 남겨진 연민이 그를 막아 세운 것이리라.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둘 사이에 묘한 공기가 흐를 무렵.

“아아, 그만하면 됐다. 젊은 놈들이라고 아직 다툴 힘이 남아도는 게냐? 에잉, 혼을 내더라도 나중에 내면 되는 게지. 그 힘 아껴 둬라. 이 늙은이가 배고파 돌아가시겠다, 이놈들아!”

“아, 죄송합니다. 하면 다시 제 등에 업히시는 게…….”

창월랑이 다시 앉은 자세로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그 모습은 아까보다 더욱 위태로워 보였다.

“아닙니다. 제가 업겠습니다. 창 장로님께서도 보기보다 몸이 많이 상하셨으니, 조금이라도 멀쩡한 제가 업는 게 낫습니다.”

“됐다. 내가 널 어떻게 믿고 음 장로님을 맡긴단 말이냐?”

둘이 서로 번갈아 가며 업기를 자청하자, 결국 민망해졌는지 당사자인 음여랑이 고개를 휙 돌리며 외쳤다.

“이…… 썩을 놈들! 누가 들으면 내가 두 다리라도 잃은 줄 알겠구나! 나도 멀쩡한 내 발로 걸을 것이야!”

“하, 하오나…….”

“흥! 하오나는 무슨 하오나? 두 놈 다 시끄럽다! 가자, 갈 길이 멀다. 가는 길에 이놈의 뱃가죽부터 채우든가 해야겠다. 앞장이나 서거라.”

“알겠습니다.”

창월랑과 공대복이 동시에 답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어쩐지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에 공대복의 입가에 아주 작지만 미소가 걸렸다.

* * *

혈교가 몸을 사리자 급박하게 돌아가던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이 소식은 하룻밤 사이 중원 곳곳으로 퍼져 나갔고, 중원인들 모두가 기쁨에 젖어 들었다.

계속되는 지독한 패배는 그 작은 승리 하나도 감사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사천성과 조금 떨어진 몇몇 지역은 집집마다 걸어 잠갔던 문을 열고, 황궁 병사들과 무인들에게 직접 음식을 해 주기도 했다.

하나, 아직까지 완전히 기뻐하기엔 일렀다.

혈교가 전쟁을 포기하고 물러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아주 작은 승리 하나일 뿐이었다.

“홍 대주의 손이 잘렸다고?”

진천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탓에 보고하는 내내 조익기가 눈알을 사방으로 굴리며, 그의 심리 상태를 살피기 바빴다.

가뜩이나 양쪽 전선에서 다 밀린 것도 모자라, 아끼던 수하가 부상을 입었으니 그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요는 자신이 얼마나 그의 기분을 잘 맞추어 답하느냐였다.

늘 곁에서 해 오던 일이었지만, 이번 전쟁에서는 유독 식은땀 흐를 일이 많으니 아주 죽을 맛이었다.

“예, 교주님. 더불어 사천당가의 무인들이 합세하면서 그쪽도 한발 물러난 상태라고 합니다.”

“홍 대주는 당금 어디에 있지?”

“아! 그렇지 않아도 오늘 새벽 공손우경의 막사에 도착했다고 합니다요!”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조익기가 답을 내뱉었다.

그 말을 듣고 난 후에야, 험상궂던 진천후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공손우경이라면 잘린 손목 정도는 어떻게든 다시 붙일 수 있을 것이다.

“무림맹 녀석들, 여러모로 정말 귀찮게 하는군.”

진천후의 목소리에 은은하게 짜증이 묻어 나왔다.

더 빨리 밀고 나가 무림맹의 본단에 닿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사태가 자꾸 벌어졌다.

처음엔 장마가, 이번엔 제갈 세가의 진법과 사천성의 세 문파가 말이다.

그러니 가뜩이나 예민한 진천후의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그때였다.

“그러게 팍팍 밀어붙이라니까.”

스륵.

“히, 히익……!”

철푸덕!

갑작스럽게 진천후의 막사에 나타난 휘의 모습에 조익기가 질겁한 채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아, 뭐야. 이제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어? 어째 저 녀석은 날 볼 때마다 놀라네. 이러다 내가 더 놀라겠어.”

이젠 조익기가 놀라는 모습이 익숙한지 휘가 어이없다는 듯 말한다.

“무공에는 조예가 일(一)도 없는 놈이니 어쩔 수 없다.”

“너는 대체 어쩌자고 저런 쓸모없는 놈을 옆에 두는 거야?”

“……머리는 제법 쓸모가 있어서?”

한참을 고민 끝에 내린 답은 초라했다.

‘저기, 저 아직 앞에 있는데…….’

둘의 대화에 세상의 모든 억울함을 다 가진 표정으로 조익기가 울먹였지만,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 휘와 진천후가 서로 말을 주고받는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교주님.”

하나, 조익기의 울먹이는 마지막 말조차 들리지 않는지 진천후의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끼익-

쿵!

소심한 그의 성격을 말해 주는 듯 그는 조금의 반발조차 해 보지 못하고 그저 문을 세게 닫는 걸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뿐이었다.

그렇게 조익기가 완전히 방에서 사라진 후에야 진천후가 피식 하며 얕은 웃음을 지었다.

“저 맛에 데리고 있는 거다.”

“놀리는 맛? 흐흐.”

휘가 그의 말에 답하며 자연스럽게 진천후의 침상에 드러누웠다.

“그나저나 네놈은 이제 아주 이곳을 제집 드나들 듯 다니는군. 내 수하가 네놈처럼 할 일 없이 이리 돌아다닌다면 가만두지 않았을 텐데.”

그 모습에 마치 진천후가 불쾌하다는 듯 표정을 굳히자, 휘가 억울하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아니, 억울한 게 아니라 서운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에이, 진짜 우리 사이에 이렇게 팍팍하게 나올 거야? 너무하네! 그리고 나도 이곳에 들어올 권한은 충분히 있지 않아? 귀마병…….”

“대체 그놈의 귀마병은 언제까지 우려먹을 셈이지? 그리고 네놈 성격이라면 그런 것 없이도 뻔뻔하게 들어왔겠지.”

얼굴 표정의 변화 하나 없이 답하는 진천후다.

하나 내뱉는 말과 달리, 그의 속내를 이미 느끼고 있는 휘였기에 능글맞은 표정으로 달라붙었다.

“헤헤. 뭐 그건 그렇지만. 아무튼, 상황이 썩 좋아 보이진 않는데?”

휘의 행동에 진천후가 질겁하며 그를 떼어내려 했으나 결국 포기한 진천후였다.

“……곧 다시 좋아질 거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조금 당황했을 뿐.”

“시간을 끌면 끌수록 안 좋아지는 건 이쪽이야. 알지?”

늘 장난스럽게 굴다가도, 상황 판단은 확실하게 내리는 휘였다.

그래서인지, 그가 진지하게 나오면 휘의 말에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귀찮은 듯 대충 듣고 있던 진천후가 휘를 향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어째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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