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0화
“정녕 물러날 생각은 없는 것이오?”
여위의 물음에 차갑게 내려앉은 목소리와 표정으로 홍청염이 답했다.
“……곱게 죽이진 않으마.”
스릉-
그 말을 끝으로 더는 돌아볼 필요가 없었다.
그야말로 대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물러나면 안 된다! 죽어도 전장에서 죽어야 한다!”
채챙-!
카가가각-!
“으아아악!”
사방이 피로 물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홍예예와 비연이 흘린 피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대다수의 피는 당연하게도 아미파의 무인들의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대다수가 몸이 날랜 덕에 강시의 공격을 제법 잘 막아 내고 있다는 것.
하나 그럼에도 여위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그으으으……!”
서걱.
털썩.
눈앞에 기괴스러운 모습으로 달려오던 강시가 여위의 검에 목이 말끔히 베여 쓰러졌다.
그러곤 여위가 속으로 숫자를 셌다.
‘백(百).’
지금까지 여위가 쓰러트린 강시의 숫자였다.
제법 많이 베었다고 생각했거늘 겨우 백이다.
꿀꺽.
여위가 마른침을 삼켰다.
계속되는 전투에 목이 탔기 때문이다.
아직 적들은 평야에 널리고 널렸다.
일평생 살면서 이런 큰 전투를 치를 일이 있을 거라곤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잠시나마 주변이 정리된 여위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나마 여위와 금정단 주변으로는 제법 많은 강시들이 쓰러져 있었다.
하나 그 외의 아미파 무인들은 속도가 더디다.
더불어 강시들이 쓰러지는 만큼 아미파의 무인들에서 중경상을 입은 자들이 늘어가고 있다.
여위가 슬쩍 입술 끝을 깨물었다.
‘좋지 않구나. 저것들은 지치지도 않겠지.’
산 자와 죽은 자의 공방이 길어질수록 유리한 쪽은 당연히 죽은 자들이다.
더구나 혈교의 강시는 그 숫자가 줄었다는 게 실감이 안 날 만큼 끊임없이 들이닥치고 있다.
중천에 떠 있던 해는 어느덧 절반 이상 기울었다.
‘더 시간을 끌면 불리해질 터인데…….’
각오를 안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여위가 잠시 정신을 판 그때.
스슥-
짙은 살기와 역겨운 피 냄새가 뒤에서 여위를 덮쳤다.
타닥!
검이 몸을 스치기 직전에 허공으로 몸을 날린 여위가 몸을 돌리자, 홍청염이 보였다.
“……과연, 아미파의 장문인이라 이건가.”
홍청염의 표정은 아까와 달리 묘하게 들떠 보였다.
참고 있던 욕망이 전투가 시작되면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기 시작한 탓이다.
더불어 자신의 동생을 다치게 만든 이가 눈앞에 있는데 참을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그의 검에는 이미 수많은 이들의 핏물이 잔뜩 묻어 있었다.
붉어진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마치 짐승과도 같은 홍청염의 모습에 여위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어찌 이리도 어리석은 짓을 하는가. 사후 어떤 벌을 받을지 두렵지도 않은가?”
“…….”
하나 홍청염의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몸으로 답해 왔을 뿐.
쌔액-!
“타핫!”
재빠른 홍청염의 신형이 여위를 덮쳤다.
동시에 왼쪽 아래에서 그어져 오는 검을 여위가 맞받아쳤다.
챙!
검을 쳐 내는 동시에 전해진 충격이 여위의 손아귀를 찡 울려왔다.
찌릿-
내내 변화가 없던 여위의 표정이 아주 잠시 일그러졌다 사라졌다.
‘제법 묵직하구나.’
여태껏 살면서 상대해 온 이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검을 맞부딪치니 혈교만의 고유한 그 칙칙한 느낌이 여위의 몸을 감싼다.
같은 혈육임에도 불구하고 홍예예의 검이 쾌검이었다면, 홍청염의 검은 살검(殺劍)이다.
그야말로 오롯이 사람을 죽이기 위해 벼린 검이라는 뜻이다. 그녀는 제법 많은 마인들과 검을 맞대어 봤지만, 홍청염의 검은 그 어떤 것보다 더 어둡고, 지독했다.
잠시 홍청염을 관찰하던 여위의 귓가에 그의 짙은 음성이 파고들었다.
“제대로 하지 않으면 너는 반드시 죽는다.”
홍청염의 눈빛이 흉흉하게 타오른다.
‘더더욱 살려 두면 안 될 자로다.’
여위의 눈빛이 변했다.
* * *
전장에 제갈세가가 도착한 이후로 판세가 급격히 뒤바뀌기 시작했다.
“그으어어어…….”
강시들은 제갈세가가 펼친 진법에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어가 허공에서 육신이 일그러지거나 머리가 터졌다. 심장보다 중요한 머리를 잃은 강시들은 힘을 잃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를 바라보던 조익기의 눈동자가 불안한 듯 흔들렸다.
“쯧, 여러모로 귀찮게 됐군. 제갈세가 놈들을 중점적으로 쳐라.”
“교, 교주님, 그것이…….”
당황하는 조익기를 보며 진천후가 연신 혀를 찼다.
그동안 소문만 들었지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전장에 모습을 내비치지 않은 제갈세가이기에 그들의 명성이 거짓 소문이라 여기고 마음을 놓던 차였다.
한데 이런 날벼락도 날벼락이 없다.
제갈세가는 느슨해진 틈을 제대로 노리고 있었다.
“하여튼 그놈의 방심이 문제지.”
그때, 조도연이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
은근히 말투가 꼬인 것이 마치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조도연이 야속했는지 잠시 쳐다보던 조익기가 이내 그의 기에 눌려 다시 깨갱거렸다.
상황을 가장 냉철하게 판단하고 있는 건 여파달이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진법이 실제로 존재할 줄이야……. 제법이구나, 무림맹 녀석들. 벌써 오십 년이 넘었거늘, 우리가 돌아올 것을 대비해 저런 진법을 만들고 있었단 말인가? 허!’
더구나 그뿐만이 아니다.
당시 무림맹 놈들은 우왕좌왕하기에 바빴고, 무엇보다 약했다.
한데 지금의 무림맹은 달랐다.
제법 오랫동안 버텨 냈고, 그 덕분에 제갈세가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사실 여파달은 이 정도 숫자라면 당연히 순식간에 저들을 밀어 버리고도 남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눈앞의 상황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는 와중 가장 처참한 반응을 보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공손우경이었다.
“내…… 내 소중한 강시들이! 내 새끼들이! 이놈드을!”
처참하게 터져 나가는 강시들의 모습에 시뻘게진 얼굴로 울부짖고 있었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공손우경의 얼굴은 무척 흉측했다.
그 모습에 잠시 입을 틀어막을까, 고민하던 진천후가 고개를 슬쩍 내저었다.
그것보다는 이 사태를 해결할 방도를 찾는 것이 더 시급한 사항이니 말이다.
“방도가 전혀 없는 것인가?”
잠시 딴생각에 빠져 있던 조익기에게 진천후가 물었다.
‘으으으…… 이번엔 정말 잘못하다간 죽는다.’
지금껏 겪어 왔던 그 어떠한 위기보다 더 큰 위기였다. 가뜩이나 더운 날씨였기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살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최대한 머리를 빠르게 굴리던 조익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강시를 물리고 제갈세가 놈들만 처치하면 되긴 합니다만…….”
눈을 뜬 조익기가 말을 더 잇지 못한 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너무 많이 진법에 빨려 들어갔군.”
진천후의 말 대로였다.
이미 절반이 넘는 강시들이 빨려 들어가 파괴당하고 있었다.
“그, 그렇다면 우선은 아직 멀쩡한 강시들을 모두 뒤로 물리는 게 어떠실지……?”
어찌나 떠는지 목소리가 위아래로 춤을 추던 조익기의 귓가에 우군의 목소리가 등장했다.
“아무래도 그 방법이 좋을 듯싶습니다.”
여파달이었다.
“여 대주도 그리 생각하십니까?”
진천후가 다시 묻자 여파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혈대를 총동원한다고 한들, 강시들은 이미 발이 묶였고 무림맹은 똘똘 뭉쳐 제갈세가 놈들만 보호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저 진법이 강시들만 끌어당긴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어느 쪽으로 본들 우리 혈교가 불리한 상황입니다. 하니 우선은 한발 물러나 상황을 지켜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이렇게 강시를 허망하게 전부 잃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진천후가 수긍했다.
“……일리가 있군요. 일단 남은 강시들은 전부 뒤로 물리고, 혈대는 강시를 호위하라.”
작금 굳이 무리해서 모두를 다 잃을 필요는 없다.
그저 자존심의 문제다.
“알겠습니다, 교주님.”
진천후의 최종 명령이 떨어지고서 조익기가 속으로 외쳤다.
‘사, 살았다. 감사합니다, 여 대주님!’
이에 냉용후와 여파달, 그리고 조도연이 모두 혈대에 후퇴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충격에 빠져 있는 공손우경의 등짝을 조익기가 내려쳤다.
짜악-!
“정신 차리게! 한 놈이라도 더 살리고 싶다면 서둘러 강시들을 후퇴시키라고!”
* * *
“장문인! 놈들이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누군가 큰소리로 외쳤고, 이를 확인한 청성파 도사들의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한다.
혈교가 물러나는 모습을 보며 제갈세가 사람들의 입이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적들이 완전히 빠지기 전, 한 구라도 더 잡기 위해서였다. 독비량과 백무량의 얼굴에 그제야 안심한 듯한 표정이 어렸다.
정말로 혈교가 물러나고 있었다.
“와아아아! 드디어 놈들이 물러납니다!”
“지, 진짜다!”
“모두 조금만 더 힘내자!”
모두가 일심동체로 외치기 시작했다.
다들 지치고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였지만, 사기는 오늘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전투가 점점 승리에 가까워져 가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혈교는 일각이 채 되지 않아 모두 진법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부상자는 부축하고 전사자들은 모두 태워야 한다!”
본디 전사자들은 그 자리에 묻어 주거나 혹은 모두 거둬 동시에 장례를 치렀다.
하나 이번 전투에서는 워낙 전사자들이 많고 아직 전투가 완전히 끝나지 않아 그들을 모두 수습할 수 없는 데다, 만에 하나 혈교가 그들의 시신을 가져가 강시로 만들까 싶어 어쩔 수 없이 내린 명이었다.
그제야 살아남은 무인들의 눈가가 촉촉이 젖기 시작했다.
몇 년에서 몇십 년 동안 동고동락한 이들을 구하지 못한 것도 모자라, 시신을 이렇게 처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처참했기 때문이다.
“크흡…….”
“미안하네. 자네를 이리 두고 가서……!”
* * *
그날 밤, 대오가 송운의 방에 찾아왔다.
“주군, 사천성에서 혈교가 한발 물러났다 합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송운의 두 눈이 솔방울만 하게 커졌다.
실로 놀라운 성과였다.
“예. 청성파가 있던 금양현과 고현현은 제갈세가의 활약으로 놈들이 꽁지가 빠지게 도망갔다고 합니다. 또한 아미파가 있던 도성현과 목리현이 잠시 위험에 빠졌었지만, 자신들이 맡은 곳에는 적이 오지 않는 걸 확인한 사천당문이 서둘러 원군을 보낸 덕에 양측 모두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습니다.”
보고하는 대오의 표정은 무척 신나 보였다.
계속 밀리기만 하던 전쟁에서 드디어 반격의 기미가 보이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으랴.
송운이 잠옷 위에 겉옷을 걸치며 말했다.
“총군사님께 가 봐야겠습니다. 아마 총군사님께서도 이 소식을 들었을 겁니다.”
송운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쩌면 더 큰 피해를 입는 걸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