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전생-229화 (229/275)

제229화

“네 이년! 그 입 닥치라 하지 않았느냐!”

홍예예의 비꼬는 말에 비연이 결국 참지 못하고 큰소리를 내질렀다.

“아우, 귀야! 목소리는 또 엄청 크네. 나 귀 안 먹었거든?”

흥분한 비연에 비해 정작 홍예예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양쪽 귀를 막으며 그녀를 약 올렸다.

이를 차분히 지켜보고 있던 여위가 비연을 말렸다.

“비연아.”

“……죄송합니다, 장문인. 저도 모르게 그만.”

그제야 비연의 날선 눈빛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하나 여위도 자신을 욕하는 걸 그녀가 참지 못하고 한 행동이기에 딱히 다그칠 생각은 없었다.

“비구니라더니 별거 없네. 도발한다고 다 넘어오고. 그치 않아, 오빠?”

이번엔 비연이 목적이 아닌 듯 홍청염을 향해 조용히 물었다.

그러나 홍청염의 반응은 냉정했다.

“어린애 같은 장난은 그만둬라. 그럴 시간 따윈 없다.”

홍청염은 계속해서 여위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무위가 높군.’

여태껏 자신이 해치웠던 중원의 무인들과는 조금 다르다.

홍청염이 찜찜한 마음에 여위를 계속 쳐다보고 있던 그때.

타닥!

더는 못 기다리겠다는 듯 홍예예가 허공을 향해 날아올랐다.

말도 없이 전장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누군가 말릴 틈도 없었다.

‘……단독 행동을 하지 말라 내 그렇게 말렸거늘.’

다행이라면 그 상대가 비연이라는 것이었다.

“타핫!”

비연 역시 동시에 홍예예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쩌면 이미 예상되어 있던 사태였다.

다만 조금 놀라운 것은 어찌 된 영문인지 둘 모두 허리춤에서 검을 뽑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미파의 무인들과 혈교의 무리들 사이에서 둘의 비무 아닌 비무가 펼쳐졌다.

퍼버벅-!

비연의 주먹과 홍예예의 주먹이 허공에서 엇갈렸다.

같은 행동이었지만 이유는 달랐다.

홍예예는 그저 주먹만으로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 한 행동이었고, 비연은 상대가 무기를 들지 않았는데 검을 뽑을 수 없어 권법으로 맞선 것이다.

“하앗!”

생각보다 빠른 속도에 비연이 당황하며 주춤하는 사이, 홍예예가 비연의 품을 파고들었다.

‘어딜……!’

후웅-

비연이 재빠르게 몸을 비틀어 허공에 몸을 띄운 채 주먹을 날렸다.

퍽!

오히려 비연의 주먹이 홍예예의 왼쪽 어깨를 정확히 가격했다.

‘먹혔다!’

홍청염은 그 싸움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무리 무인들이라고는 하나, 여인들의 싸움에서는 쉽사리 보기 힘든 권법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대주님.”

홍청염의 옆에서 보고 있던 부대주 정관호(鄭關虎)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세는 금방이라도 명을 내리면 튀어 나갈 것 같은 모습이다.

하나, 홍청염이 손을 들어 휘휘 내저었다.

아직은 지켜보겠다는 뜻이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홍청염이 보기엔 비연 정도는 홍예예가 수월하게 이길 수 있었다.

‘저 여인이 질 것이다.’

지금도 때린 비연보다 오히려 맞은 홍예예의 표정이 더 좋았다.

홍예예는 이 싸움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저 일격도 일부러 맞아 준 것일지도 모른다.

상대방의 방심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때.

퍼벅-!

촤아아악-

주변만 맴돌던 홍예예의 주먹이 정확히 비연의 복부를 가격했다. 복부를 맞은 비연이 결국 버티지 못하고 일 장 넘게 밀려났다.

홍예예는 권법을 쓰면서도 마치 검기처럼 내력을 날카롭게 벼리는 기예를 선보였다.

결코 작은 내상만 입었을 리 없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비연의 두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컥…… 쿨럭!”

아니나 다를까 비연의 입에서 거무죽죽한 핏덩이가 토해져 나왔다.

제법 깊은 내상을 입은 것이다.

파밧-!

그런 비연의 모습을 약삭빠른 홍예예가 놓칠 리 없다.

비연의 코앞까지 다가가 마지막 일격을 날리려는 자세를 잡았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아, 시시해. 난 또 뭐라도 있는 줄 알았지. 잘 가.”

홍예예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띠었고, 내기를 주먹에 집중시켜 내지르려던 순간.

퍼억-!

“꺄악!”

홍예예가 높고 가느다란 비명을 내질렀다.

복부를 내려찍으려다 되레 자신이 당한 탓이다.

홍예예의 몸이 허공에 붕 뜨며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며 동시에 땅을 굴렀다.

비연의 반격은 아니었다.

그녀는 복부를 제대로 강타당한 탓에 아직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피로 물든 비연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여위였다.

“자…… 장문인.”

“이만하면 되었다. 충분히 잘 싸웠어. 들어가 있거라.”

“하, 하오나…… 쿨럭!”

비연의 혈을 짚은 여위의 낯빛이 좋지 못하다.

‘내상이 깊다……!’

또다시 검은 핏물이 비연의 입가를 적시고도 여위의 옷까지 튀었다. 아까의 일격으로 이미 비연의 갈비뼈가 부서지고, 그 부서진 뼈가 장기들을 헤집어 놨을 것이다. 자칫하면 목숨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외상보다 더 위험한 것이 내상이다.

치료하기도 더 까다롭다.

하나 어쩌면 아직 멀쩡할지도 모른다.

비연이 아직까지 말을 하는 데 숨을 차지 않는다는 게 그 증거였다.

여위의 말에 순식간에 주변에 퍼져 있던 아미파의 무인 두 명이 비연을 빠르게 부축했다.

비연이 빠져나가기 무섭게, 여위의 뒤통수 쪽에서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끄으흑! 감히, 감히! 날 아프게 해?!”

바닥을 나동그라졌던 홍예예가 도끼눈을 뜬 채 이번엔 검을 들고 여위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제법 맷집이 좋은 편이구나.’

여위는 조금 놀랍다는 표정으로 홍예예를 바라보았다.

어지간한 무인이라면 힘을 쏟은 여위의 장법을 맞았다면 빈사 상태에 이르거나, 한동안 몸을 가누지 못해야 정상이다.

한데 홍예예는 곧바로 몸을 다시 일으켜 내기까지 사용한 것이다.

저 자그마한 몸으로 그 충격을 모두 받아 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웠다.

“역시 혈교의 대주인 것인가.”

파박!

여위가 곧바로 몸을 일으켜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카각-!

여위가 피한 탓에 아무것도 없는 땅바닥을 홍예예의 검이 내리찍으면서 돌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이, 이이……!”

맞은 것도 모자라 여위가 자신의 공격을 피해 내기까지 하자 분에 찬 것인지, 혹은 민망해서인지 귀엽던 얼굴이 잔뜩 빨개진 홍예예가 땅에 박힌 검을 뽑아 들었다.

쌔애액-!

그러곤 쉬지 않고 홍예예의 검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검붉고 긴 그 검기는 연신 여위를 위협하기엔 충분해 보였다.

그 뒤로 대략 일각쯤 지났을까.

“하악…… 하악…….”

작금 가쁜 숨을 내뱉는 쪽은 여위가 아닌 홍예예였다.

겉으로 보면 그 모습은 참으로 안타까워 보였으나, 안타깝게도 그 대상이 홍예예기에 연민은 그닥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어, 어떻게 단 한 번도 못 벨 수가 있지?!’

어느덧 붉어진 눈가의 홍예예가 여위를 노려본다.

반면 여위의 표정은 아직도 평온하다.

“네년, 가만 안 둘 거야!”

표독스러운 표정과 목소리로 홍예예가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는 듯이 검을 휘둘러 왔다.

후우웅-!

깊고 묵직한 검의 파공음이 여위의 귓가를 스쳤다.

“돼, 됐……!”

홍예예가 짐짓 성공의 표정을 지을 순간.

그녀의 손목 끝에는 차갑고 낯선 쇠붙이의 느낌과 동시에 태어나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고통이 전해졌다.

서걱.

푸슉.

“아…… 아?”

* * *

“아아악!”

뒤늦게 자신의 오른쪽 손목이 잘려 나갔다는 사실을 인지한 홍예예가 소리를 내질렀다.

핏물이 마치 분수처럼 튀어 나가며 여위가 서 있던 자리를 붉게 적셨다.

“내, 내, 내 손목이!”

여태껏 피에 미쳐 있던 홍예예의 모습과는 전혀 상반되는 모습으로 사색이 된 채 자신의 손목을 붙잡았다.

홍예예의 그러한 모습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여위는 곧바로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여위는 부처를 모시는 사람이나, 아미파의 문도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장문인이었다.

더군다나 여태껏 살상에 미쳐 사람들을 죽여 온 홍예예는 죽여야 할 악이다.

‘……후우.’

그럼에도 마지막으로 잠시 숨을 고른 여위는 홍예예에게 말했다.

여위의 목소리는 매우 차가웠다.

“물러가시오.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 베이는 것은 손목이 아니라 목이 될 터이니.”

“끄흑……! 내가 그렇다고 물러날 거 같아?! 너, 내가 죽여 버릴 거야.”

어느새 손목의 혈을 짚은 홍예예가 이를 악다물었다.

피를 좋아하는 홍예예도 당연히 자신의 피를 보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애당초 그럴 거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그녀였다.

홍예예가 아직 남은 왼쪽 손으로 검을 집어 들었다.

“감히…… 너 따위한테 질 내가 아니라고!”

결국 죽을 걸 알면서도 불 속으로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홍예예는 여위에게 달려들었다.

“……아미타불.”

마지막 예의로 염불을 외우며 여위의 검이 홍예예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다.

채채챙-!

카각!

“여기까지.”

그때, 예상과는 다르게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면서 여위의 눈동자에 한 사람의 신형이 잡혔다.

여위의 검을 받아 낸 홍청염이 자연스럽게 그것을 흘려내며 몸을 빼냈다.

동시에 홍예예를 품에 안아 들며 일 장 가까이 뒤로 물러섰다.

여위와의 간격이 벌어지자 홍청염이 조용히 홍예예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시뻘건 핏물이 흥건한 사이로 잘린 뼈와 근육의 단면이 보였다. 홍청염 역시도 이런 사태를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내내 냉철했던 그의 두 눈이 살짝 떨렸다.

하나 그럼에도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홍예예는 홍청염의 품속에서 발버둥 쳤다.

“내가, 내가 죽일 거야. 오빠는 빠져! 이거 놔!”

“애당초 널 내보내는 게 아니었다. 돌아가거라.”

“싫어.”

아까보다 더 독해진 홍예예의 표정은 이미 어린아이의 그것이라고 보기엔 너무도 흉측해져 있었다. 어찌나 아팠는지 입술을 꽉 깨물어 입술은 다 터져 있었고 눈가엔 눈물과 핏물이 섞여 번져 있었다.

아무리 냉정하게 대한다고 한들 홍예예는 자신의 동생이다.

하나뿐인 혈육인 것이다.

“시간이 늦지 않는다면 손을 붙일 수도 있다.”

계속해서 발버둥 치던 홍예예가 홍청염의 말에 순간 뚝하고 행동을 멈췄다.

“……거짓말.”

“진실이다. 공손우경이라면 뭔가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빠져라.”

이대로 복수에 눈이 멀어 손을 영영 잃을 것이냐.

아니면 홍청염의 말을 듣고 분하더라도 희망을 걸고 손을 지킬 것이냐.

“시간이 없다. 어서!”

“으으……!”

챙그랑-!

홍예예가 결국 분하다는 듯 꼭 쥐고 있던 왼손의 검을 힘없이 떨구었다. 죽어도 꺾지 않을 것 같던 그녀가 마음을 버린 이유는 하나였다.

늘 무뚝뚝하기만 하던 홍청염의 목소리가 난생처음 떨려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악인이라고 한들 자신의 혈육이 신체 부위 중 어딘가가 없는 모습으로 평생을 살아가길 바라는 이는 없을 터.

그 모습을 본 홍청염이 조용히 누군가를 불렀다.

“진(珍).”

진이라 불린 흑색 복면의 사내는 나타나기 무섭게 홍예예를 안아 올렸다.

물론 그녀의 잘린 손도 함께.

“다시 돌아올 거야.”

“아직 전투는 많이 남았다. 우선 몸조리부터 하도록 해.”

진이란 사내가 짤막하게 고개를 숙였고, 이내 빠르게 뒤로 사라졌다.

“자, 그럼 이제부터 제대로 전투를 벌여 보도록 하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