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전생-228화 (228/275)

제228화

“다들 대열을 재정비하라! 장문인께서 직접 오셨다!”

백무량의 눈길이 제갈세가의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대략 마흔 명이 조금 넘을까?

정신없는 전장 한복판에 새하얀 무복을 입어 어딘지 모르게 정갈해 보이는 그들의 외관은 누가 보아도 제갈세가 사람이라는 것이 겉으로 태가 났다.

더군다나 험악한 무인들로 가득 찬 이곳에서 다소 호리호리한 체격을 지닌 그들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백무량이 제갈세가를 반갑게 맞이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독비량에게 인사를 하는 것을 잊은 건 아니었다.

잠깐의 눈빛이 오갔고, 곧 백무량이 제갈세가를 향해 몸을 날렸다.

제갈세가 중 가장 머리가 희끗한 사내가 백무량을 알아보고 그를 향해 다가왔다.

‘정말 의외군.’

다가온 이는 얼굴상이 전체적으로 길쭉하나 짙은 눈썹과 굳게 닫은 입매가 고집 세고 강단 있어 보이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비록 한 번뿐이지만 본 적 있는 사내다.

워낙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기도 했고, 얼굴이 한번 보면 쉽게 잊히지도 않는 편이라 확실했다.

워낙 제갈세가 사람들이 바깥출입을 잘 하지 않는 편임에도, 유일하게 안면을 튼 사이였다.

‘천하의 무불통지(無不通知) 제갈기(諸葛奇)가 오다니.’

특히 제갈세가인 중에서도 바깥출입을 극히 꺼릴 정도로 싫어하는 제갈기다.

무림맹에서 그를 본 것도 천운이라고 할 정도로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조차도 제갈염이 아니었다면 마주하지도 못했을 터다.

한데 이곳까지 직접 행차할 줄이야.

백무량이 잠시 놀라움을 내비쳤으나 이내 빠르게 갈무리 지었다.

작금은 놀랄 시간 따위는 없으니.

“아닙니다. 이곳까지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먼 길 오셨는데 대접 한 번 못 해 드릴 상황이니 면목이 없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감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백무량의 말에 제갈기가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급박한 상황일 거라 생각은 하였지만 만만치 않구려.”

이미 전투가 시작된 지 한참의 시간이 흘렀기에 주변은 온통 피로 범벅이었다.

물론 그 피는 거의 모두 청성파의 것이었다.

청성파의 무인들은 크고 작은 피해를 입은 반면, 적인 강시들은 대다수가 멀쩡한 모습이다.

기껏해야 겉치레로 걸쳐 놓은 누더기인지 옷인지 모를 것들이 찢긴 정도일 뿐.

제갈기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주 오래전 기억에 불쾌감을 느꼈는지 눈살을 크게 찌푸렸다.

그러곤 조용히 혼잣말을 하듯 읊조렸다.

“……정말 설마설마하면서 왔지만 강시들이 다시 일어났을 줄이야.”

그는 이젠 제갈세가에서도 몇 남지 않은 그 시대를 겪어 온 인물이다. 하나 그런 제갈기조차도 어린 시절에 그들의 악행을 지켜봤을 뿐, 직접적으로 싸운 경험은 없었다.

“인원은 이게 전부입니까?”

“적지만 걱정 마시오. 한 명, 한 명이 최고의 진법을 펼쳐 낼 테니. 최대한 전쟁에 도움이 되도록 해 보겠소이다. 설마…… 백 군사께서도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농이 지나치십니다. 제갈세가를 어찌 제가 감히 의심하겠습니까?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놈들은 강기가 아니면 죽이는 것조차도 힘이 든 상태입니다.”

모두가 지쳐 가고 있는 시점이다.

제갈세가가 잘해 주면 잘해 줄수록 사기는 껑충 뛰어오를 것이다.

‘그리되면 이 싸움. 어쩌면 완전히 이길지도 모른다.’

이미 싸움의 판세를 지켜보며 혈교에 끌려가고 있다고 느낀 백무량이다.

제갈세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내 그것은 잘 알고 있소이다.”

“크악!”

털썩.

그때, 그들의 코앞에서 강시의 공격에 무인 하나의 목숨이 허무하게 사라졌다.

이와 동시에 제갈기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아무래도 더는 이런 잡담을 나눌 시간은 더는 없을 것 같구려. 그럼 잠시 후에 봅시다.”

타닷-!

마지막 말을 끝으로 제갈기가 제갈세가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말했다.

“모두 대열을 갖춰라.”

작은 목소리지만 이는 곧 전장으로 울려 퍼졌다.

그리곤 제갈세가의 무인들이 제갈기의 명령에 따라 다섯 명씩 갈라지기 시작했다.

‘호오. 드디어 제갈세가의 진법을 보는 건가.’

그런 그들의 행동을 멀리서 흥미롭게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독고백이었다.

이미 진법을 펼칠 제갈세가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부터 그들을 따라오던 독고백이다. 그가 직접 이곳까지 따라온 연유는 간단했다.

심심해서.

재밌을 것 같아서.

애당초 이 판을 완전히 짜낸 것은 독고백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 판을 만들어 내기 위해 얼마나 긴 세월 동안 공을 들였던가?

이런 즐거움을 그가 참을 리 만무했다.

옆에서 한참을 조용히 바라보던 휘가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진법을 만든 걸까요? 환영? 속임수?”

“진짜다.”

“예?”

밑도 끝도 없는 독고백의 대답에 휘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

그의 짤막한 대답에 당황한 것은 아니다.

이미 오랫동안 그의 곁을 지키면서 독고백의 화법에 익숙해진 휘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을 이미 본 것처럼 말하는 독고백의 말에 놀란 것도 역시 아니다.

휘가 진짜 놀란 것은 따로 있었다.

상대의 반응이 어떻든 싱글벙글한 표정을 유지하던 독고백은 휘가 궁금한 점을 정확히 집어내 답했다.

“제갈세가 저놈들은 진짜라는 말이기도 하지. 무림 세가에 이름을 올렸지만 정작 무공보다 진법을 다루고 머리를 쓰는 게 더 익숙하고 잘하는 녀석들이다. 하긴, 진법도 하나의 힘이니……. 해서 이전의 혈교대전에서도 손을 쓰려고 하긴 했으나, 이미 혼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강시들에게 통할 리가 없지. 하지만 이걸 시간이 흐른 뒤에라도 결국 만들어 내다니, 참으로 놀랍지 않느냐? 그렇다면 저 진법은 실체가 있는 진법이라는 뜻이야. 역시 재주가 많은 녀석들이구나. 참으로 놀라워. 쿡쿡.”

그 짧은 사이에 모든 걸 파악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이라니.

‘전 주군의 모습이 더 놀라운데요?’

휘는 차마 입 밖으론 내뱉지 못할 말을 속으로 곱씹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굳이 말해서 욕을 먹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스스로의 입이 비죽이고 있음을 인지하고 서둘러 딴청을 피운 터라 독고백은 다행히 보지 못한 듯했다.

만일 봤다면 할 말을 하라고 독촉했을 테니.

입으론 연신 감탄을 내뱉으며 표정은 마냥 즐거워 보이는 독고백을 바라보는 휘는 정말이지 감회가 새로웠다.

지난 몇십 년간의 세월 동안 그는 한 번도 웃지 않았다. 그리고 휘는 그 긴 세월을 독고백의 곁에서 지켜 왔다.

최근 몇 년간 독고백의 모습은 휘에겐 늘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아니, 독고백의 곁에 있던 모든 이들이 놀라고 있었다.

‘주군이 이렇게도 웃음이 많은 분이셨다니. 정말 놀라고 펄쩍 뛸 일이지.’

독고백의 오래된 거처인 정매궁(靜昧宮)은 최근 들어 단 한 번도 피를 본 적이 없었다. 몇십 년을 지켜 오면서도 볼 수 없었던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다.

곧 휘가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그래, 뭐. 주군께서 좋아하시면 됐지. 그러기 위해서 그동안 씨앗을 뿌려 뒀으니.’

한참 동안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던 휘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빠르게 합류한 제갈세가 무인들의 주변으로 허공이 넘실대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 거대한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 보이더니 이내 표독스럽게 날뛰던 강시들이 갈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독비량이 크게 외쳤다.

“청성파의 무인들은 들어라! 모두 제갈세가를 지켜라! 죽어도 단 한 명의 목숨이라도 끊고 죽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예! 장문인!”

제갈세가 무인들의 곁을 청성파의 무인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지키기 시작했다.

동시에 다 죽어 가던 청성파의 무인들의 사기가 다시 치솟았다. 계속해서 밀려 나갈 것 같던 싸움의 판세가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연이어 뒤에서 강시들을 조종하던 공손우경의 표정이 휘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제법 당혹스러움을 표하고 있었다.

‘이거…… 정말 재밌긴 하겠는데?’

휘의 입가가 다시 한번 호선을 그렸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 * *

“……곧 적들이 들이닥칠 것 같구나.”

신중한 표정으로 건너편 너머 혈교의 무리를 바라보던 여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위의 시선 끝에는 커다랗고 새카만 새가 허공을 휘저으며 날고 있었다.

동시에 비연이 고개를 들었다.

‘연락선인가.’

혈교가 이곳에 도착한 지는 벌써 이 주야가 흐른 시점이다.

아마도 연락선이 맞을 것이다.

혹 연락선이 아닐지라도 누가 보아도 썩 좋지 않은 징조임은 분명했다.

곁에서 이를 함께 바라보던 비연이 굳게 닫혔던 입을 열었다. 그다지 내뱉고 싶지 않던 말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은월단과 여월단을 준비시킬까요?”

비연의 물음에 여위가 고개를 주억였다.

“모두 집결하라 하거라.”

명이 떨어졌다.

올 것이 온 것이다.

‘……하아.’

비연이 속으로 깊고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금정단까지 모두 출전에 내세우겠다는 답이다. 혹여나 하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금정단을 제외시켰으나 여위의 답은 너무도 단호했다. 이는 이제 더 이상 여위를 지킬 이들이 없어진다는 말과도 같다.

최후의 보루까지 거절당한 셈이다.

하나 이보다 더한 말은 비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들려왔다.

“장문인의 마음이 정 그러시다면, 그리하도록…….”

“그리고 나 역시 출전한다.”

“……?!”

“뭘 그리 놀라는 게냐. 아미파의 장문인으로서 어찌 보고만 있는단 말인가. 이런 중대한 때일수록 수장이 본보기를 보여야 사기가 오르는 법이니라.”

여위의 표정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단 한마디 단어라도 허투루 내뱉는 일이 없는 여위다.

‘……진심이시구나.’

사천성을 지켜 내고야 말겠다는 여위의 의지가 비연의 마음속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비연이 여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여태껏 말리던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장문인의 의지를 따르겠습니다.”

* * *

여위의 직감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그로부터 일각이 채 지나지 않아 혈교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장문인, 움직입니다.”

“알고 있다.”

총 세 개의 단으로 구성된 아미파는 각기 세 구역으로 나뉘어 마치 화살의 촉처럼 줄지어 서서 혈교의 앞을 막아섰다.

서로가 서로를 코앞에서 마주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이내 비연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이 혈교 측으로부터 들려왔다.

“와아! 말로만 듣던 아미파구나! 정말로 여자들 천지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홍예예였다.

어딘지 모르게 통통 튈 것만 같은 모습의 홍예예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혈교의 가장 앞에 서 있었다.

빠각.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비연이 들고 있던 호각을 손으로 박살 냈다.

“너구나. 혈항아, 홍예예.”

비연이 입술을 살짝 깨물며 홍예예를 노리며 말하자, 그녀는 실망했다는 듯 입을 비죽 내밀었다.

“어라라? 뭐야, 너 벌써 내 이름을 알아? 칫, 멋지게 내 소개 좀 해 보려 했더니. 소문이 빨라도 너무 빠르네! 흐응- 중원이 정말 대단하긴 한가 봐?”

“그 입…… 그만 다물어라.”

비연이 이를 악물고 말했지만 이를 비웃기라도 하겠다는 심산인지 홍예예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과 목소리로 외쳤다.

“어마나! 무서워라. 역시 비구니라 그런가, 말투가 영 심심하네. 그럼…… 그 옆에 곱게 계신 여인은 그럼 아미파의 소수신녀, 여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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