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전생-227화 (227/275)

제227화

“젠장. 며칠 동안 해만 짱짱하게 잘 뜨더니, 왜 하필 저놈들이 여기까지 들이닥치고 나니 먹구름만 끼는 겐지. 귀찮게 되었구나.”

짙은 수염과 눈썹에, 각진 사각턱을 지녀 굉장히 사내다운 인상을 주는 자.

바로 이사흠이었다.

그런 그가 불만을 한껏 토해 냈다.

그의 말 대로였다.

뙤약볕에 말라 죽을 것같이 굴던 햇빛이 마치 누군가 사술이라도 부린 듯 몸을 감췄다. 덕분에 무더운 열기는 가셨지만, 이러한 날씨라면 적들에게도 안성맞춤이 된 것이 아닌가.

이대로라면 강시들이 당장 들이닥쳐도 할 말이 없다.

“……어차피 이미 해는 상관이 없을 겁니다.”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누군가가 말을 꺼냈다.

그러자 그에게로 모든 시선이 쏠렸다.

백무량이었다.

그의 미간은 미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그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들 한가히 무슨 집 앞마당으로 소풍이라도 나온 기세군.’

작금 무림의 상황이 어떻든 권력 놀이에 심취해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같은 청성파인 게 한심해질 지경이었다.

백무량 역시 아직 이번 혈교와의 직접적인 전투에 한 번도 참여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하나, 그들의 실태를 지속적으로 보고받고 지휘를 내리며 전장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아 왔다.

그들 속에서 섞여서 볼 때는 몰랐는데 무리에서 바깥으로 나와 객관적으로 그들을 바라보니 이만큼 한심해 보일 수가 없었다.

사천성이라는 거대한 성과, 아미파, 사천당문이 늘 함께 묶이는 탓에 청성파도 함께 우월한 실력인 양 포장된 것일 뿐.

실상 내부는 생각보다 더욱 별 볼 일 없는 셈이 아닌가?

‘다들 평화에 찌들었군. ……후.’

직접 오지 않았다면 이러한 사실조차 모르고 지나갔을 터다.

하나 어찌하겠는가.

이미 자신은 청성파에 몸담은 상태며 혈교와 전쟁 중이다. 청성파의 고인 물을 갈아치우는 건 훗날을 도모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있는 백무량에게 가장 먼저 말을 건 것은 연기훈이었다.

“그건 또 무슨 끔찍한 말인가?”

연기훈은 안면이 온통 사색이 된 채로 되물었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백무량이 고개를 돌렸다.

‘그래. 우선은 이곳에 집중하자.’

곧 시선을 돌린 백무량이 입을 열었다.

“저놈들은 그 햇볕을 뚫고 여기까지 온 놈들이 아닙니까? 햇볕에 약하다는 건 그저 전해져 온 옛이야기일 뿐. 작금 저놈들에게는 통하지 않을 겁니다.”

백무량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듣고 보니 그 말 역시 맞기에 서로 충격을 받은 듯했다.

‘이제야 좀 심각성을 받아들인 건가?’

하나 이는 백무량의 착오였다.

기껏 적당히 만들어 놓은 분위기를 깨뜨린 건 이사흠이었다.

“허어- 자칫 잘못하면 제대로 된 정보도 없이 강시와 싸울 뻔했구먼. 역시 우리 무량이가 머리가 좋아. 괜히 무림맹의 군사가 된 게 아니란 말이지. 으하하! 역시 우리 청성파의 자랑이야!”

“과찬이십니다, 이 사숙님.”

“아니지, 아니야. 사람이 너무 겸손해도 재미없지. 내 이번 전투가 끝나면 꼭 이 사실을 장문인께 전해 잔치를 한번 열자고 해야겠어.”

“……이 사숙님.”

백무량이 연신 이사흠을 불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금 청성파의 장문인이 바로 이사흠과 같은 스승을 둔 직계 사형이라는 사실 하나로 그의 콧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었다.

이는 곧 이사흠이 불혹에 가까운 나이를 먹고도 철이 없는 연유기도 했다.

“자자, 이럴 게 아니라 전투 준비를 하자고. 아무리 세다고 해도 설마 우리 청성파가 그 정도도 이기지 못하겠느냐? 예전의 청성파와는 격이 다르지. 암!”

“……한데 장문인께선 어디 계십니까?”

백무량이 결국 그들을 포기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독비량을 찾기 위해서다.

그라면 말이 좀 더 통할 터. 이미 아미파와 사천당문은 각기 맡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한데 아무리 찾아도 독비량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물은 것이었다.

툭툭.

이사흠은 그의 질의에 별것 아니라는 듯 그의 어깨를 쓰다듬듯이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곧 도착하실 게야. 그러니 우리는 우선 조식부터 먹자고. 전투도 자고로 이 밥 \심으로 해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 말이야!”

그때였다.

쾅-!

“헉…… 헉……! 이 장로님……! 혀, 혈교가……!”

“무엇이냐?”

“이놈아! 말을 끝까지 하거라!”

어찌나 빨리 뛰어왔는지 숨이 넘어갈 듯 헉헉거리던 무인이 다급하게 마지막 말을 외쳤다.

“혈교가…… 움직입니다!”

“뭐라?!”

하급 무인이 전해 온 소식은 순식간에 내부를 휩쓸기엔 충분했다.

‘아직 제갈세가가 도착하지도 않았거늘……. 시기가 좋지 못하다.’

우왕좌왕하며 다들 야단법석을 떨고 있기 바쁜 틈 사이로, 백무량이 외쳤다.

“모두 전투 대열로!”

사천성 전투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

* * *

“교주님, 하면 그쪽에도 전할까요?”

곧 있을 대전투에도 긴장감은커녕 얼굴 한가득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진천후에게 조익기가 물어 왔다.

“전하도록 해라. 홍 대주가 잔뜩 기다리고 있을 텐데.”

홍 대주는 둘이지만 조익기는 단박에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아마도 홍예예 쪽일 터다.

홍청염보다는 홍예예가 훨씬 더 싸움을 즐기니까.

그렇다고 해도 혹여나 홍예예가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달려들었을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홍예예의 곁에는 홍청염이라는 든든한 억제기가 있기 때문이다.

“예이! 알겠습니다.”

그의 답을 들은 조익기가 재빠르게 답한 뒤 바깥으로 향했다.

스륵.

“오, 재밌겠네?”

휘다.

허공에서 나타난 휘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잔뜩 지은 채 진천후를 내려다봤다.

탁!

그러곤 곧바로 정자세로 바닥에 착지했다.

“여기까지 잘도 찾아왔군.”

“뭐…… 굳이 찾을 필요도 없던데? 워낙 가시는 길 화려하게 뚫고 가셔서.”

휘가 말하며 어깨를 으쓱인다.

그러곤 이곳저곳을 마치 집 앞마당에 놀러 나온 아이처럼 뒤적이며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하긴. 그것도 그렇긴 하군.”

진천후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잘 알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혈교의 본거지까지 찾아왔던 그의 추적 능력에 비하면 이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휘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여태까지 장난스럽던 그의 표정과 말투도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제갈세가 놈들이 곧 이곳에 도착할 거야.”

“그래 봤자 우리가 이긴다.”

“너 못 들었어? 네가 중원에는 처음 나와서 보고 소식에 둔감해 그런가 본데, 제갈세가 놈들 생각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주군께서 꼭 일러 주라고 하시던데.”

“설령 강시들을 모두 잃는다 해도 오대혈대와 내가 있다. 우린 지지 않는다.”

“와……! 너 그거 공손우경 그 녀석이 들으면 정말 게거품 물고 쓰러질 소리라는 거 알고는 있어? 하여튼 그놈의 자신감은…….”

자신이 말해 놓고도 슬쩍 눈치를 보던 휘가 다시 운을 띄웠다.

“너 그러다 정말 큰코다친다?”

“그럴 일은 없을 거다. 그래서 여기까지 쫓아온 진짜 연유는? 단지 제갈세가의 위치를 알려 주기 위한 건가?”

자신의 도발에도 상관없다는 듯 무표정으로 말하는 진천후의 모습에 휘가 뒷머리를 붙잡았다.

이는 단순히 진천후의 덤덤한 표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모습이 더욱 마음에 드는 휘다.

조금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이나, 평화 속에서 몇십 년을 살아온 녀석들보다 복수와 피와 살육에 미쳐 몇십 년을 이를 갈며 살아온 혈교가 질 거라는 생각은 없었다.

단지 처음에 보았던 그 모습은 사라지고 몇 번 반복해서 보다 보니 이젠 어딘가 둘의 대화 사이에는 친우라고 해도 믿길 정도의 친밀감을 형성하고 있었다.

‘……허.’

잠시 본인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는지 휘가 속으로 헛웃음을 내뱉었다.

“끙…… 이젠 날 아주 무슨 전구서 취급하네? 막? 너무한다, 너. 처음엔 그래도 대우 좀 해 주더니만……. 겨우 그것 때문에 내가 이곳까지 무거운 발걸음을 한 줄 알아?”

“그렇다면 진짜 온 목적이 뭐냐.”

씨익-

그제야 조금이나마 진중해진 그의 물음에 이번엔 휘의 입가가 얄미운 호선을 그렸다.

“불난 집 불구경.”

* * *

진천후의 출전 명령이 떨어진 직후 모든 강시가 줄지어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고 백무량의 예상대로 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중원을 눈이 부시게 뒤덮고 있음에도 그들은 꿈쩍하지 않았다.

단지 강시가 햇빛에 약하다는 사실은 낭설에 불과했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수천 구는 될 듯한 강시들이 날뛰며 움직이는 모습은 가히 기괴했다.

“그으으으…….”

“노, 놈들이 옵니다!”

당황하는 무인들 속에 가장 앞선 건 바로 이사흠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이사흠의 얼굴에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어허! 우리는 자랑스러운 청성파의 무인들이다! 모두 떨지 말고 싸워라! 그리고 승리하라! 청성파의 위엄을 보여 주자!”

그러자 이사흠의 말에 언제 떨었냐는 듯 무인들이 각기 병장기를 들고 소리 높여 외쳤다.

“와아아아-!”

“강시는 목을 쳐야만 죽는다. 하나 그 몸이 단단하고 잘 잘리지 않으니 반드시 강기를 다룰 수 있는 자가 아니면 혼자 상대하지 마라!”

“예!”

백무량의 말을 마지막으로 역사에 깊이 새겨질 전투가 시작됐다.

* * *

끼이이-

“어, 어…… 어?! 오빠! 저거 교주님이 보내신 거 아냐?”

가만히 하늘을 보고 누워 있던 홍예예가 하늘에 뜬 검고 커다란 새를 가리키며 외쳤다. 식음까지 전폐하고 온몸으로 불만을 표출하던 그녀의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이미 익숙한 새다.

동시에 퍼지듯 누워 있던 몸도 벌떡 일으켰다.

홍예예가 요란법석을 피우자 곧 홍청염도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떴다.

“……맞는 듯하군.”

전투를 시작해도 좋다는, 홍예예에겐 몹시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루 내내 굶은 탓에 굶주린 배고픔마저 잊을 만큼 말이다.

“자아! 다들 일어나! 전투다!”

“대주님. 너무 들뜨셨습니다. 마음을 조금 가라앉히시지요.”

진유향이 홍예예를 진정시켰으나, 그녀의 말은 귓등에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홍예예가 도끼눈을 뜬 채 고개를 획 돌렸다.

“모두 함께 피의 축제를 즐겨 보자!”

* * *

강시들은 생각보다 더 강했다.

“크아아악……!”

촤악!

챙그랑-!

강시들의 손짓 한 번에 무인들의 살이 찢기고 피가 튀겼다.

길고 두꺼운 강시들의 손톱은 그 어떠한 검보다 더 날카로웠다.

이곳에 있는 무인 대다수가 절정고수였으나 그 사이사이에 끼인 일류고수들의 검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일류 고수들은 검이 통하지 않자 간신히 몸에 내력을 두르고 몸으로 맞섰으나 이조차도 쉽지 않았다.

채챙-!

“크윽!”

서걱!

절정 고수들은 강시와 대적할 수는 있었지만 숫자로 밀어붙이는 그들을 버텨 내는 데 힘겨워 보였다.

그것이 바로 강시의 무서움이기도 했다.

더불어 미친 듯이 달려드는 혈교의 무인들까지 상대하려니 버거움의 연속이었다.

계속되는 아슬아슬한 양측의 줄다리기가 지속될 무렵.

“이놈들! 검기를 쓰지 못하는 이들은 뒤로 빠져라! 쓸데없는 죽음만 될 뿐이니!”

내력을 담은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청성파의 장문인, 독비량이 청성파의 정예 무인들을 데리고 전장에 도착한 것이다.

“장문인!”

힘겹게 전투를 이어 가던 청성파의 무인들에게 이보다 더 반가운 이는 없을 터였다.

“자, 장문인이 오셨다!”

“모두 좀 더 힘을 내자!”

그뿐이 아니었다.

“우리가 왔습니다!”

독비량의 등장과 동시에 제갈세가가 도착한 것이다.

백무량의 눈에 이채가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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