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5화
휘이잉-
한여름의 무더운 바람이 사천성 이남(以南)을 스쳐 지나갔다.
그 바람 속에는 혈향이 진득하니 배어 있었다.
그 냄새가 어찌나 독한지 맡은 이들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고 있었다.
“장문인, 곧 놈들이 사천성에 도착할 모양입니다.”
승복을 차려입은 젊은 여인이 앞서 저 멀리 바라보고 있던 중년의 여인에게 조용히 읊조렸다.
중년의 여인은 바로 아미파의 장문인 여위였다.
“……수많은 중생의 괴로운 비명이 이곳까지 울리는 것을 보니 네 말이 맞을 듯싶구나.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아미타불.”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이미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이 여위의 귀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혈교는 그만큼 거침없이 진군하고 있었다.
“어찌할까요?”
“곧장 사천당문과 청성파에 전하거라.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고.”
“장문인께서 직접 가시렵니까?”
“그리할 것이야.”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서신 넣어 두겠습니다.”
젊은 비구니가 자리를 뜨자, 여위가 짧지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녀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길 때마다 느꼈던 기운이 매우 강하게 느껴지고 있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구나.’
* * *
서신이 전해진 지 얼마 후.
“이렇게 모이자고 한 연유가 무엇이오? 혈교를 막을 준비를 하기에도 벅찬 시간 아니오?”
마련된 자리에 앉아 있던 여위를 향해 독비량이 얼굴 가득 불만을 담고 물었다.
“내 오긴 했지만, 이리 바쁜 시기에 사람을 오라 가라 하면 어쩌자는 겐지…….”
당천립 역시 못마땅한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지난번 사건 이후로 처음으로 다시 모인 셋이다.
여위가 다시 한번 찬찬히 그 둘의 표정을 훑었다.
거친 말과는 달리 각기 초조함이 어려 있다.
그 당시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쪼로록-
여위가 차분히 차를 따른 다음, 찻잔을 건네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상황이 몹시 좋지 못하다는 것은 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해서 어찌 군사를 나눌 것인지 의견을 나누기 위해 바쁨을 무릅쓰고 부른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찰나조차 쪼개야 할 때 아니오?”
“점창파가 몰락했습니다. 아십니까?”
“크흠…….”
“어흠!”
여위의 말에 둘의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사천성에 세 문파가 버티고 있다 한들 서로 아무런 동조 없이 움직인다면 손발이 꼬이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비는 곳이 생길 테고, 지난번처럼 혈교에게 또다시 기회를 내주는 셈이다.
더불어 점창파와 같은 결과를 맞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이럴 때일수록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고, 최대한 효율적인 동선을 맞추어야 한다.
다들 마음만 급급해서 정작 서로 중요한 것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하면 여 장문께선 생각해 둔 방도가 있소?”
당천립이 조심스레 묻자, 여위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여위가 손에 들고 있던 하얗고 큰 종이를 펼쳤다.
촤라락-
그러자 곧 오밀조밀하며 빼곡히 그려진 그림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것은 아니나 누구든 조금의 지식만 있다면 알아볼 수 있는 그것.
지도였다.
“……?!”
“이, 이것은 지도가 아닌가?!”
놀란 것은 독비량뿐만이 아니었다. 당천립 역시 놀라는 눈치다.
“이보시오, 여 장문! 이, 이 귀한! 아, 아니 위험한 물건을 대체 어디서 얻었단 말이오?”
황궁이 아니고서야 쉽사리 접하기 어려운 물건이다. 자칫 가지고 있다 들키면 반역자로 몰리기 딱 좋은 물건이기 때문이다.
다들 하나쯤 가지고 싶으면서도 얻기 힘든 귀물이었다.
이 자리에서 당황하지 않는 것은 여위뿐이었다.
“후후, 결코 불의한 경로로 얻은 것은 아닙니다. 이번에 동맹을 맺은 황군으로부터 잠시 빌려 온 것일 뿐이지요. 사천성이 주요 요충지가 될 테니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달라 했더니, 제게 넘겨 준 것뿐입니다.”
그제야 여위를 보는 두 사람의 눈빛이 변했다.
당천립이 여위의 말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고, 더불어 독비량 역시 뒤질세라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좀 전과는 달리 자신에게 집중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확인한 후, 여위가 길고 하얀 손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사천성과 운남성, 귀주성의 최전방선은 도성현(稻城縣), 목리현(木里縣), 그리고 반지화현(攀枝花縣)과 녕남현(寧南縣), 금양현(金陽縣)과 고현현(高縣縣), 흥문현(興文縣). 이렇게 총 일곱 군데입니다.”
사천성의 땅이 넓은 만큼 귀주성과 운남성 어느 쪽을 향해 올지 모르기 때문에 사방을 모두 차단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잘 알고 있지.”
“그중 각기 맡아야 할 곳은 최소 두 현 이상이겠군.”
독비량과 당천립이 차례대로 말을 이어받았다.
어차피 세 문파 모두 자리 잡은 위치가 비슷하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 비슷했다.
“저희 아미파가 도성현과 목리현. 그리고 반지화현을 맡겠습니다. 반지화현에는 황궁의 무인들이 모두 향할 테니, 청성파는 녕남현과 금양현을, 그리고 사천당문은 금양현과 고현현을 맡아 주세요.”
당천립이 조용히 고개를 주억일 때, 잠시 생각하던 독비량이 조심스레 말했다.
“아, 이번에 무림맹에서 백 군사가 직접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고 들었소. 중경시를 지나 곧 도착한다고 하니 우리 청성파가 금양현과 고현현을 맡아도 되겠소?”
백무량은 청성파의 사람이었다.
기왕이면 같은 문파끼리 합을 맞추고 싶다는 뜻이리라.
‘서로 위치를 점하는 것 가지고 핏대를 세울 필요는 없지.’
어쨌든 다 같이 힘을 모아야 할 상황이다.
더 이상 사천성이 혈교의 손에 놀아나는 꼴을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이번만큼은 순순히 당천립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럼 그리 알고 녕남현과 고현현으로 무인들을 보내겠소이다.”
“……고맙소.”
별다른 마찰 없이 대화를 끝내고 나자 주변이 잠시 고요해졌다.
이에 잠시 입술을 질끈 깨문 여위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둘을 향해 말했다.
“……모두 무운을 빕니다. 죽지 말고 반드시 살아서 다시 보도록 하지요. 아미타불.”
여위의 말속에서 단단하면서도 간질거리는 진심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말이 어떠한 뜻인지는 둘 역시 잘 알고 있다. 중원 아래 지방의 네 개 성이 이미 모두 풍비박산이 났다는 것을 생생히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는다면 그것이 무인이든, 일반인이든 가리지 않고 그들은 살육을 멈추지 않았다.
한 치라도 삐끗하면 이번 전쟁은 정말 질지도 모른다.
잠시 어색한 기류에 독비량이 조용히 읊조렸다.
“……거, 여 장문께서도 부디 무사하길 빌겠소.”
“크흠……! 모두 살아서 봅시다. 그래야 이 지긋지긋한 얼굴도 또 볼 수 있겠지.”
마지막 말을 남긴 당천립이 서둘러 등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각자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말은 삐딱하였으나 그들의 말속에 담긴 마음은 이미 서로의 마음에 충분히 와닿았기 때문이리라.
여위의 얼굴에 곧 고소가 맺혔다.
‘부디, 부처님의 가호(加護)가 있기를……. 아미타불.’
독비량과 당천립이 모두 돌아간 직후.
딱-!
여위가 손가락을 맞부딪혔다.
스슥.
그러자 곧바로 그녀의 뒤로 복면을 두르고 검은 옷을 차려입은 여인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부르셨습니까.”
체구는 왜소하였으나 그 몸에서 내뿜어지는 기운은 여간 단단한 것이 아니었다.
“비연(飛燕)아, 역시 금정단(金頂團)을 보내야겠다.”
“……예? 금정단을 말이십니까?”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비연이라 불린 여인의 눈썹이 움찔거린다.
금정단은 여위를 신변을 지키는 자들이다.
아미파 내에서도 최고의 고수들로만 이루어졌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한데 그러한 금정단을 보내자니?
“하오나 장문인! 만에 하나 금정단이 무너지면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장문인의 신변에 문제라도 생기면……! 아…… 송구합니다.”
잠시 흥분했다는 것을 스스로도 느꼈는지 말을 잇던 비연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하나 결코 물러서려는 의지는 내비치지 않았다.
“이는 장문인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금정단만큼은 결코 아니 됩니다. 은월단(隱月團)과 여월단(女刖團)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비연의 만류에도 여위의 눈빛은 견고했다.
“우리 사천성이 무너지면 무림 전체가 흔들릴 테고. 그리되면 더 이상 무림에 희망이 없다는 뜻이다. 사태가 사태인 만큼 이번 경계선을 막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하느니라. 아미파에는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반지화현과 녕남현으로 향하도록 해라. 그리고 곧 나도 따라가마.”
비연은 극구 말리고 싶었으나, 이미 이십여 년간 곁에서 지켜본 여위는 자신의 말을 번복하는 이가 아니었다.
다시 한번 말해 볼까 하다가도 입을 다물었다.
여위의 말에 틀린 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라 이르겠습니다.”
“고맙구나.”
그제야 여위의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 * *
귀주성의 대방현(大方縣)과 금사현(金沙縣), 그리고 준의현(遵義縣)과 정안현(正安縣)까지 도달한 혈교는 잠시 숨을 돌리고 있었다.
“중원이 넓긴 넓군.”
촤락!
펄럭-
냉용후가 이미 붉어져 더 붉어질 것도 없어 보이는 붉은 선자(扇子)를 털어 내며 주변을 살폈다.
“그럼 뭐, 중원이 뉘 집 개 이름인가? 설마 이 정도도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겠지? 크큭.”
그 말에 조소하는 조도연이었다.
“네놈이야말로 마치 중원을 잘 안다는 듯 지껄이는구나. 쯧…… 네놈이 발을 디딘 지 이제 겨우 달포가 조금 더 되지 않았더냐?”
냉용후가 가소롭다는 듯 혀를 차자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조도연이 허공에 대고 크게 외쳤다.
“아! 이거 어디서 개가 짖는지 왕왕, 아주 시끄러워 죽겠군!”
이쯤에서 끼어들었을 홍예예는 운남성으로 향했기에 둘 사이에서 싸움을 부추기는 이는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 올까 염려한 조익기가 미리 진천후에게 언질을 해 홍예예를 다른 곳에 보낸 것이었다.
그때, 견원지간처럼 싸우는 둘 사이를 갈라놓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여파달이었다.
딱!
따악-!
“악!”
“…….”
알밤을 쥐어박은 여파달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대주끼리는 동등한 위치라지만, 가장 나이도 많고 오랫동안 혈교에서 많은 공로를 세웠던 여파달은 진천후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이들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놈들! 내 그리 교주님 앞에서 조심 또 조심하라 일렀건만, 아직도 그 천성을 고치지 못한 게냐!”
“이, 이 망할 영감탱이! 그렇다고 머리를 치면 어떻게 해?! 안 그래도 나쁜 머리 더 나빠지면 영감이 책임질 거야?! 끄윽! 손만 매워서는.”
“……고치도록 하지.”
상극의 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