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3화
타다다닷!
누군가가 재빠른 발놀림으로 어딘가를 급박히 향하고 있다.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공대복이다.
그의 안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아니, 어딘지 모르게 눈물이 가득 머금어진 듯도 했다.
공대복은 중경시로 달리는 와중에도 속으로 계속해서 외쳤다.
‘부디, 부디 모두 살아남으시오! 죽으면 안 돼!’
이런 꼴을 보겠다고 개방을 그리 만든 것이 아니었다.
양자청 무리들은 공대복에게 접근할 때 스스로가 화산파임을 밝혔다.
더불어 이제 곧 무림맹은 망하게 될 것이라고 했었다.
현재 무림맹은 그저 겉보기로만 멀쩡할 뿐 내부는 썩어 들어가고 있다고,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다며 말이다.
그리고 무림맹의 반대편 무리가 무림맹을 장악하면 반드시 세상에 큰 혼란이 올 것이라며 그를 겁박했다. 그리되면 개방도 결코 무사하진 않을 것이라고.
그것을 막기 위해 화산파가 나선 것이라고.
하니, 개방 역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자신들의 편을 들라고. 그리할 시 훗날 무림맹을 먹고 개방에게도 지분을 나누어 주겠다며 말했다.
물론 공대복이라고 하여 그 허무맹랑한 말을 처음부터 믿은 건 아니었다.
혈교대전을 겪고도 굳건하게 다시 자리 잡은 무림맹이 망한다는 생각은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을뿐더러, 현 무림의 대들보 역할을 하고 있는 무림맹이 나앉는다면 무림에 큰 혼돈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공대복에겐 하늘과도 같은 스승인 공이추는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었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 무림맹에 혈교의 이야기가 떠돌기 시작했다.
믿고 싶지 않지만 점점 무림맹 내부의 균열이 일고 있음을 눈으로 목격한 후, 이를 차츰 믿기 시작한 공대복은 끝내 돌아서게 된 것이다.
그러고 난 후 개방이 함께 마음을 돌리면 개방은 그 혼돈의 소용돌이에서 구제해 주겠다는 약조를 얻어 냈다.
하나 오늘, 그 믿음은 깨졌다.
‘믿은 내가 순진했고 멍청했다.’
만일 그들이 약조를 지키려 했다면 당금 개방을 향한 걸음은 자신 혼자만이 아닌 그들의 세력과 함께여야 했을 것이다.
어리석게도 공대복은 이제야 자신을 꾄 자들의 사탕발림에 놀아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림맹에 균열이 일은 것은 사실이나 이를 교묘히 조작한 것도, 먼저 무림맹을 배반한 것도 화산파였다.
후회감이 물밀듯 치솟아 올랐지만 이미 늦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 다시 무림맹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이미 양측의 추악함을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 말이다.
그 누구에게도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 마음먹은 공대복은 점점 더 발끝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더 늦으면 이 후회마저도 끝이다.
‘제발……!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 주십시오. 장로님들!’
* * *
싸움은 점점 더 고조되었고, 마침내 남은 이들은 정말 소수였다.
고작 서른 명이나 될까.
초반에 있었던 숫자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인원이었다. 온몸에 수많은 자상을 입은 그들은 얼굴에 지친 기색이 다분했다.
당장에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말이다.
‘좋지 않군.’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자, 장로님. 이제…… 헉…… 더는…… 흐읍?!”
소강상태에 이른 무림맹 덕분에 숨 고를 시간을 얻은 창월랑이 음여랑을 바라보다 헛숨을 들이켰다.
윤기 나는 흑색으로 찰랑거리던 머리카락은 거의 반백(半白)에 가깝게 변해 흘러내리고 있었고, 탱탱하던 피부는 쪼그라들었으며 얼굴 역시도 아름답던 이십 대 여인의 것이 아닌 오십 줄은 족히 넘어선 이처럼 변해 있었다.
계속되는 격한 싸움에 외모를 유지하던 내공마저도 모조리 싸움에 쏟아 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미녀가 추녀가 된 것은 아니었으나, 급격하게 세월의 풍파를 맞은 음여랑의 본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좀 전의 격한 싸움마저 잊을 만큼.
‘……제기랄.’
그 반응에 음여랑이 속으로 짧은 욕설과 함께 깊고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음여랑 본인도 스스로의 모습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으, 음 장로……님?”
“창 장로.”
낮고 쉬어 버린 목소리지만 힘이 실려 있었다.
더는 티 내지 말라는, 짧지만 강한 경고였다.
“……예? 아, 예!”
편무량 역시 놀라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나, 만일 그녀가 늙는다면 훗날 이리될 것이라며 수없이 생각해 왔던 모습이었다. 외모가 변했다 한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임은 변치 않기에 더더욱 마음을 차분히 한 것이다.
더더군다나 편무량마저 그런 반응을 보인다면 음여랑이 여인으로서 얼마나 큰 상심을 하겠는가?
하나 누군가가 그런 편무량의 노력을 모두 무산시켜 버렸으니,
“참으로 놀랍구나. 화빙화 음여랑의 본모습이 저럴 줄이야.”
바로 군사 백무량이었다.
그의 모습은 개방과는 달리 처음처럼 말끔했다.
전투가 벌어졌음에도 거의 일방적으로 개방이 밀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닥쳐라! ……쿨럭!”
“오라버니!”
편무량이 소리쳐 외쳤으나, 이미 그 힘을 거의 다 소진한 탓에 목소리는 그다지 위협적이지 못했다. 더불어 피를 내뱉기까지 하니 되레 음여랑의 걱정만 끼친 꼴이다.
“쿨럭…… 미안하구나.”
“오라버니가 미안할 게 무에 있소. 대체 무에가 그리 매번 미안한 게요!”
이미 개방의 입장은 난처하게 되었다.
이쯤 되면 분명 양자청 놈들에게도 소식이 닿았을 것이다.
당금 양자청 무리들이 있는 곳은 섬서성과 호북성이다.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는 말이다.
한데도, 지원군은커녕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곧…….
‘버림받았구나. 아니, 애당초 놈들은 우리를 우군이라 생각한 게 아니야. 한낱 파리 목숨보다 못하다 여긴 게구나. 하……!’
뚝.
음여랑의 눈가 밑에 스친 핏자국에 눈물이 흘러 핏물처럼 흘러내린다.
차라리 중립에 계속해서 있었더라면 이런 꼴은 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든 음여랑이다. 자신의 오만함과 안일한 마음이 되레 이런 비참한 꼴을 만든 것이다.
음여랑이 주변을 살폈다.
‘남은 자는…… 편 오라버니와 나, 그리고 창 장로. 이미 다른 이들은 대부분 죽은 지 오래구나.’
죽지 않은 개방도들은 이곳 외에 다른 곳으로 나눠진 이들 뿐이리라.
아니, 어쩌면 당금 그들도 이곳과 비슷한 상황에 놓였을지도 모른다.
개방은 고작 서른 명에 불과한데 무림맹은 아직도 삼백에 가까운 숫자가 남아 있었다.
처음 양측의 숫자가 정반대의 상황이 된 것이다.
수천의 시신이 놓여 있는 모습을 보고 문득 든 생각이 그녀의 오금을 저리게 만들었다.
‘설마…… 아니겠지. 설마……! 놈들도 사람이거늘!’
애당초 개방은 그들의 계획이었을 수도 있다.
무림맹의 시선을 잠시나마 돌리고, 죽은 시신은 거두어 강시로 만들어 사용한다?
마냥 있을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더 시간 끌 것 없다. 마저 모두 휩쓸고 우리는 사천성으로 향해야 한다. 속히 서둘러라!”
스르릉-
백무량이 크게 외치자 무림맹의 잠시 멈추어 있던 검들이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편 장로님! 어찌할까요??”
이에 창월랑이 다급히 외쳤다.
그 시선을 받은 편무량은 음여랑을 바라보았다.
“쿨럭…… 더는 안 되겠다. 일단 목숨부터 부지하는 게 어떻겠느냐?”
“……그게 좋겠소. 퇴각한다! 될 수 있는 한 잡히지 말고 도망가라! 어디든! 제발…… 살아남아야 한다. 모두……!”
음여랑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살아남은 개방도들이 일제히 사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방향은 각기 모두 달랐다. 그 발길의 끝이 섬서성이건, 사천성이건, 귀주성이건 말이다.
그곳에 도착해서 죽든, 도망가든.
도중에 잡혀 죽든 어느 쪽이건 당금 그들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개방도들을 바라보던 백무량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쫓아라. 개방은 오늘부로 모두 보이는 즉시 사살한다.”
척-!
그 순간.
무림맹 측 앞에 음여랑과 편무량이 나란히 섰다.
그 뒤에는 창월랑 역시 있었다.
‘남은 개방도들을 끝까지 지켜 주겠다, 이건가.’
백무량의 생각대로였다.
음여랑이 원도훈의 앞길을 막아섰다.
“어딜 쫓아가려고? 가려거든 나부터 죽이고 가야 할 게다.”
스릉-!
“그 의리와 마음은 가상하구나. 가는 길은 곱게 보내 주마.”
“놈! 누가 할 소리!”
음여랑이 검을 거머쥔 채 달려들기 시작하자 무림맹의 무인들 역시 일제히 음여랑에게 달려들려 했다.
하나 이를 원도훈이 제지했다.
“이쪽은 내가 해결할 테니 너희들은 도망가는 이들을 쫓아라.”
“예. 대주!”
“빌어먹을 자식들. 나부터 죽이고 가라 하지 않았느냐!”
음여랑이 특유의 날랜 몸놀림을 내비쳤다.
몸은 비록 한순간에 늙었으나 그녀의 실력은 여전히 농후했다.
쐐애애액-!
날카로운 검봉이 원도훈의 목젖을 향했다.
‘제법이군.’
휙!
카가가각-!
하나 원도훈에겐 그다지 큰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손쉽게 그 검의 행로에서 벗어난 원도훈이 몸과 함께 검을 빠르게 틀었다.
음여랑의 검과 원도훈의 검이 부딪혔고, 두 쇠붙이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질렀다.
채챙-!
‘크읏……!’
파박!
처음엔 제법 버티는 듯 보이던 음여랑이 결국 뒤로 빠졌다. 이미 몸에 많은 자상을 입고 내력이 거의 빠진 탓이다.
그때, 누군가 그 사이를 묵직하게 파고들었다.
바로 편무량이었다.
“여랑아! 여기는 내게 맡겨라. 너도 어서 도망가!”
“그럴 수 없소. 이건 내 싸움이오! 오라버니야말로 아직 안 가고 뭐 하고 있었소?”
음여랑이 버럭 소리쳤지만, 편무량은 그녀의 앞을 비키지 않았다. 입가엔 아까 입은 내상으로 흘러내린 피가 한가득인 채였다.
그럼에도 그는 음여랑을 향해 함박웃음을 지었다.
“크흐…… 나는 이미 늦었느니라. 쿨럭……! 창 장로, 부탁하네.”
“예……! 부디, 무사하셔야 합니다. 크흑……!”
창월랑이 편무량의 말에 재빠르게 움직였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 이, 이것 놓지 못하겠느냐, 창 장로!”
“안 됩니다, 음 장로님. 부디 저를 용서하십시오.”
이를 질끈 문 창월랑이 편무량에게 고개를 숙인 후, 급히 음여랑을 둘러업고 이내 뛰기 시작했다.
퍽퍽!
“이거 내려놔! 내려놓으라고!”
음여랑의 손이 그의 등짝을 내리쳤으나 이미 편무량에게 약조한 그로서는 음여랑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었다.
이를 어처구니없이 바라보던 백무량이 조소를 머금었다.
“신파극도 적당히 하지? 왕년에 음여랑이 네놈을 따라 개방에 들어섰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 모양이군.”
“……음장로의 이야기를 나불대는 건 사절이다.”
“큭. 배신자 집단 주제에 잘도 입을 놀리는구나. 더는 봐주지 않을 것이다. 도망가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해 주마.”
그런 백무량을 향해 편무량이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백결신장(百結神掌)인가.’
그의 자세를 알아본 백무량이 눈살을 찌푸린다.
“원 대주. 이쪽은 내가 맡을 터이니 원 대주는 저자들을 쫓으시게.”
“괜찮으시겠습니까?”
원도훈이 재차 물었으나 백무량의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어서! 이러다 눈앞에서 쥐새끼를 놓치겠네.”
백무량이 확고에 찬 눈빛으로 말하자, 원도훈이 고개를 주억였다.
“알겠습니다. 군사님. 무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