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0화
第六章. 개방의 몰락
무차별적인 살육이 시작된 지 몇 시진이 흘렀을까.
개방의 배신을 알아챈 제갈염이 빠르게 지방으로 소식을 전달했으나, 변방인 귀주성과 운남성에까지 소식이 닿는 데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보다 더 빨리 혈교가 움직인 탓이다.
덕분에 헛된 정보만 믿고 마음을 잠시 놓았던 점창파는 고스란히 그 피해를 받아야만 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개방으로부터 정보를 산 모든 이들은 같은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되레 돈도 없고 멀리 갈 능력도 없던 아이들과 여인들, 혹은 늙고 병든 이들은 동쪽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천운이었다.
그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처참했다.
수많은 이들이 죽어 나갔고, 그 아비규환 속에서 점창파의 윗선만이 간신히 살아남아 도망친 상태였다.
멀리서 바라본 점창산은 이미 피로 흥건히 뒤덮인 지 오래였다.
점창파 장문인 홍기훈(洪氣暈)이 살아남은 이들의 얼굴을 살폈다.
홍기훈의 얼굴, 몸 곳곳에는 피가 묻은 흔적이 있었지만 계속해서 쏟아지는 비에 씻겨 내려 옅어지고 있었다.
“나까지 포함해서 총 다섯뿐인가……? 그, 그래. 오 장로! 오 장로는 어디 있느냐?”
가장 최측근이었던 오상훈을 다급히 찾았으나, 제일 먼저 문 앞을 막아섰던 그는 이미 죽음을 맞이한 지 오래였다.
죽은 자가 대답할 리 만무했다.
허공에 묻히려던 물음에 누군가 오상훈을 대신해 답했다.
목소리는 비참했다.
“이미…… 죽었습니다, 장문인.”
“크윽…… 분명 이럴 일은 없을 거라 하지 않았더냐?! 누구냐 대체 이딴 거지 같은 정보를 가져온 자가!”
분개가 가득한 목소리로 홍기훈이 외쳤다.
살아생전 점창파가 이리 험한 꼴이 되리라고 어디 감히 상상이나 해보았던가?
이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의 표정은 처참했다.
그러자 조용히 고개를 든 이가 있었다.
살아남은 이들 중 가장 낮은 서열이자 얼마 전 음여랑과 은밀하게 정보를 주고받았던 바로 그 사내였다.
사내의 몰골 역시 홍기훈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가관이었다.
피로 물들고 군데군데가 찢어진 옷을 입은 그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장문인, 개방이 분명 그리 말했습니다. 절대로 서쪽으로 오지 않을 거라고 그리 신신당부를 하기에…… 하, 한데 이리 들이닥칠 줄은 정말로 몰랐습니다! 크흑……! 죽여 주십시오, 장문인!”
이실직고하며 납작 엎드린 사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토록 정확한 정보를 달라 신신당부를 했건만, 대체 어찌하여 이런 개똥만도 못한 정보를 돈 주고 팔았단 말인가?
이 모든 상황이 자신의 잘못 같았다.
단순히 여인의 농염함 때문에 꼴딱 넘어간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개방과 쌓아 온 신뢰가 있었기에 믿고, 곧이곧대로 전달한 것이다.
몇 번이고 재차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혈교가 계림현에 모이는 것이 조금 찜찜하긴 하였으나, 그래도 개방을 믿었다.
약 십여 년 동안 그와 거래를 텄던 개방의 정보는 엇나간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개방이 속인 것일까.
아니면 개방도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일까.
어느 쪽이 되었건 이미 벌어진 상황에선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반복해서 외치는 사내의 모습에 홍기훈이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허…… 목소리를 낮추어라. 자칫 놈들이 여기까지 쫓아올 수 있음이야. 그리고 죽여 달라 한들, 뭐가 달라지겠느냐? 이미 죽은 자들이 수천이거늘……!”
목숨은 간신히 건졌지만 한 팔을 잃어버린 한 장로가 암담한 모습으로 물었다.
“쿨럭…… 하면 네놈과 연락하던 그 개방 놈들은? 어찌하고 있더냐?”
점창파의 오대 장로 중 한 명인 도창후(陶昌侯)였다.
도창후는 혈도를 간신히 눌러 놔 피가 넘쳐 흘러내리는 것은 막았으나 이대로 치료받지 못하면 그는 죽는다.
“그, 그것이…….”
사내가 말을 내뱉지 못하고 연신 버벅거리자 재차 물었다.
“왜 말이 없는 게야!”
“완전히…… 연락이 두절됐습니다.”
“연락이 안 돼? 이…… 이런 빌어먹을! 컥!”
그를 말릴 수 있는 것은 다른 두 장로뿐이었다.
“진정하게, 도 장로! 더 위험해질지 모르네. 그리고 장문인, 일단은 중경으로 향해 호북성으로 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홍기훈이 눈을 질끈 감고선 고개를 돌렸다.
한때 화려했던 점창파의 처참한 말로(末路)였다.
* * *
혈교가 귀주성과 운남성을 꿰뚫고 사천성과 맞닿은 지점까지 밀고 나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들은 처음 약속대로 개방의 말과는 완벽하게 반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수천은 될 것 같은 개방도들이 중경시를 향해 모두 이동하고 있었다.
“음 장로님, 이대로 계속 가면 되는 겁니까?”
“그렇다 하질 않아? 몇 번을 말을 해야 하는 게냐. 늙은이 귀찮게 하지 말고 발걸음이나 옮기래도.”
“……아무리 보고 또 봐도 늙은이라는 그 말은 적응이 안 됩니다.”
아무래도 중경시로 빠지라는 그들의 말이 못미덥던 사내, 장흉(張兇)이 몇 번이고 재차 물어 온다.
그 끈질긴 시선에 결국 음여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차피 놈들은 사천성으로 빠질 게야. 뭣 하러 이 중경시로 오겠느냔 말이야. 놈들의 주목적은 지난날 그들을 내쫓았던 정파에게 복수하는 거다. 중경시엔 아무 문파도 없어. 그렇다고 무림맹 놈들이 득실대는 곳으로 가자는 게냐? 그건 절대 안 될 일이야. 지금쯤이면 놈들도 우리 개방이 등을 돌렸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텐데 눈 뜬 채 코 베이라는 뜻이냐?”
“그것은 아니지만…… 뭔가 마음 한구석이 영 찝찝합니다.”
그런 장흉의 말에 음여랑이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찼다.
그녀는 개방도를 앞으로 벌어질 태풍 속에서 빼내는 것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쯔쯧, 사내가 이리 간이 작아서야 어찌 쓰겠어. 어차피 전 중원에 널린 개방도들이 전부 피하려면 중경시 만으론 부족해. 곧 호남성 쪽으로도 이동할 게야. 그리되면 전쟁도 피해 갈 수 있고, 전쟁이 끝날 무렵이면 이미 혈교가 무림맹을 점령했을 테지. 그때까지만 조용히 잘 숨어 있으면 된다. 그럼 돼. 우린……! 반드시 살아남는다.”
음여랑의 독기어린 말에 장흉이 편무량을 바라보았으나 그 역시도 그저 고개를 내젓는 게 전부였다.
이미 그녀가 말한 대로 이미 등을 돌린 이상 그들의 눈에 띄는 것이 더 바보 같은 짓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리라.
그동안 수없이 많은 이들이 정파를 배신했을 때 어떤 결과를 직면했는지 지켜봐 온 편무량으로선 음여랑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더불어, 그녀와 얼마 남지 않았을 여생을 살아가고 싶다는 욕망이 더더욱 그의 마음에 불을 지핀 탓이다.
물론 개방도라고 해서 전부 편무량과 음여랑의 말을 들은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이렇게 된 이상 자신의 길을 찾겠다며 나선 이들도 더러 있었다.
‘서로 갈 길을 가면 된다. 더 이상 바보같이 당하고 살지 않을 것이야.’
편무량이 주름진 두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아직까지 자신의 손에는 힘이 넘실댄다.
음여랑의 말대로 이번 전쟁만 마무리되면 된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다들 힘내라! 그래야 살 수 있어!”
* * *
“총군사님, 놈들이 사천성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습니다. 어찌하시렵니까?”
모용휘의 초조한 듯한 물음에 제갈염이 송운을 바라보았다.
사천성이면 아미파와 청성파, 그리고 사천당문이 있는 곳이다.
아무리 혈교라고 한들, 그곳을 굳이 돌파해서 올 거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라도 했을까?
게다가 이는 명명백백히 개방이 무림맹을 배신하고 돌아섰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만일 개방이 배신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이는 끝까지 배제되었을 사안이었을 테니 말이다.
“이로써 개방의 배신은 기정사실입니다. 감히 무림맹을……! 이렇게 된 이상 놈들을 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기에는 너무 괘씸합니다.”
꿀꺽.
잠잠히 듣고 있던 송운이 속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사방이 적이로구나. 무림맹에 정녕 이리도 적이 많았단 말인가?’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적뿐이다.
만일 무림맹에 이리 근접해 있지 않았더라면 평생 몰랐을 일이다. 그제야 전생에 그들이 왜 그리도 피를 보아야 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평생 중립을 지킬 것 같았던 개방의 배신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런 모용휘의 말을 뒤이은 건 분노에 휩싸인 백무량이었다.
“개방 놈들도 개방 놈들이나, 감히 사천성에 발을 디딜 생각을 했다니 미친 게 분명합니다. 아무리 혈교라고 한들, 세 문파가 지키고 있는 길목입니다. 이 어찌……!”
본인이 몸담고 있는 곳이 바로 청성파이니 화가 날 법도 했다.
어찌 되었건 혈교에게 우습게 보였다는 뜻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여기 있는 군사 세 명 중 유일하게 가장 덤덤한 것은 양취록 한 명뿐이다. 그의 눈빛은 싸늘하게 식어 좋게 보면 냉철하고, 나쁘게 보면 마치 홀로 다른 세상에 있는 듯 무심했다.
‘볼 때마다 이상하게 거슬리는군.’
송운은 늘 그 눈빛이 영 마음에 걸렸으나, 이제 그런 것을 따질 만한 상황도, 여력도 되지 않기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다들 진정하시게. 우선 백 군사의 말대로 개방은 훗날 처벌해도 늦지 않을 거네. 지금은 혈교를 막는 게 더 중하니.”
결국 제갈염이 중재에 나섰다.
어차피 이리 왈가왈부한다고 하여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사천성에 집중하는 것이 좋겠구먼. 백 군사의 말대로 사천성에는 든든한 문파가 무려 세 곳이나 있으니, 그곳에서 담판을 짓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과연 총군사님이십니다!”
제갈염의 발언에 순간 기가 살았는지 백무량이 목소리를 높인다.
혈교가 무섭다고 한들, 백무량은 아직 강시를 제대로 겪어 보지 못한 세대다.
자신이 몸담은 문파의 위엄을 알리는 것이 더 중요했고, 그의 믿음은 굳건하다.
반드시 사천성에서 이 전쟁이 끝날 것임을 말이다.
“백 군사, 해서 자네가 사천성으로 직접 가 주었으면 하네. 마음 같아선 내가 직접 가고 싶으나, 나는 이곳을 지켜야 하는 책임이 있다 보니…….”
제갈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백무량이 두 눈을 반짝 빛내며 말했다.
“총군사님, 그런 걱정일랑 단단히 붙들어 매시지요. 이번 전쟁은 반드시 사천성에서 멈출 겁니다.”
“그래. 내 백 군사만 믿겠네. 이제 곧 큰 전투가 있을 테니 모두 쉬도록 하게. 더불어 백 군사는 오늘 밤 곧바로 채비를 마치는 대로 사천성으로 향하게. 한시가 바쁜 일이니 서둘러 주게.”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는 것으로 알고 나가 보겠습니다.”
모두가 자리를 비우고 또다시 송운과 제갈염만이 남았을 때, 제갈염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곧 우리 제갈세가 사람들이 사천성으로 향할 걸세.”
“총군사님, 그 말씀은……?”
제갈염의 말에 송운의 두 눈이 희망으로 빛났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