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전생-219화 (219/275)

제219화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고 했던가.

송운의 말에 제갈염이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아무래도 개방이 혈교와 손을 잡은 것 같네.”

“하면 그때 그것은 어찌 된 것입니까?”

“거참……. 아무래도 나도 자리에서 물러날 때가 된 것 같군.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그간 우리의 착각이었던 듯싶네.”

실제로 그 후에 강시들이 모습을 다시 드러냈으니 틀린 말도 아닐 터다.

“사실 확인이 된 것은 있습니까?”

“정보원들이 바삐 움직이는 중일세. 조만간 어떠한 상태인지 연락이 올 걸세.”

말을 뱉고 난 후 머리가 아파 오는지 제갈염이 미간을 짚었다.

그의 표정에서부터 허탈함이 드러나는 듯했다.

“하면 진법은 어찌 되어 가고 있습니까?”

“다행히 진법은…… 완성이 되었네.”

잠시나마 제갈염의 눈빛에 생기가 도는 순간이었다.

* * *

오대혈대가 모이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타닷-

“교주님을 뵙습니다.”

조도연 다음으로 도착한 것은 냉용후였다.

왼손에는 자신의 상징이자 무기인 붉은 선자를 든 채 조용히 가볍게 착지한 그는 곧바로 부복 자세로 진천후의 앞에 섰다.

“왔구나.”

진천후가 조용히 고개를 주억이던 무렵.

탁!

“짜잔! 나도! 나도 왔어요! 교주님!”

이에 질세라 발랄하게 날뛰며 막 도착한 홍예예가 진천후의 앞에 섰다.

엇비슷한 거리에 놓여 있었기에 간발의 차가 생긴 것이다. 어찌나 꽁지 빠지게 달려왔는지 잘 다듬어졌던 앞머리가 모두 헝클어져 있었지만 그 모습조차 귀여운 홍예예였다.

“홍예예!”

대주 사이에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나, 홍예예의 무례한 모습에 냉용후가 그녀를 꾸짖었다.

하나 막상 당사자인 진천후가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아아, 됐다. 내버려 두거라.”

그러곤 홍예예를 보며 진천후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칙칙한 사내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밝고 활발한 아이다.

늘 어린아이 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어 한편으로는 동생 같기도 한 홍예예였기에 이 정도는 충분히 애교로 봐줄 수 있는 정도였다. 더불어 원래 그런 그녀의 성격을 굳이 고칠 필요는 없다는 게 진천후의 생각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홍예예가 못마땅한 모양인지 곱상한 미간을 찌푸리는 냉용후였으나, 이내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추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들 교주의 마음에 든다는데 더 뭐라 할 권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둘째 치더라도 오대혈대는 모두 동급에 놓여 있는 처지니 더욱 반발할 연유가 없었던 탓이다.

“흠…… 결국 남은 이는 현혼혈대인가.”

오대혈대 모두 속속들이 도착하여 모여 있는 이곳에 유일하게 현혼혈대만 보이지 않는다.

하나 워낙 발이 빠른 이들이니, 머지않아 그가 있는 곳에 당도할 터다.

“아직까지 오지 않고 뭐 한답니까? 이젠 춘추 생각하셔서 몸 좀 사리시지.”

조도연이 기다렸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겉으론 모두 평화로워 보이지만 속으론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는 혈대들이다.

한 번이라도 더 진천후의 눈에 들어 충성을 다하려 하는 그들로서는 아주 오래된 기 싸움이었다.

그 말을 받아친 건 냉용후였다.

“이제 겨우 이 주야가 지났을 뿐이니 너무 그럴 것도 없다. 청해성까지 가셨다고 하니 조만간 돌아오시겠지. 여하튼 조도연, 너는 마음만 너무 앞서는 게 문제다. 같은 혈대끼리 어찌 이리 싸우려 드는 거지? 고치라 그리 말했거늘.”

“그러는 너야말로 당금 나와 한판 해보겠다는 거냐? 앙?!”

둘이 서로를 들들 볶는 모습은 이미 익숙한지 홍예예는 그저 흥미롭게 지켜볼 뿐이었다.

‘쯧.’

반면 진천후는 속으로 혀를 찼다.

무공은 뛰어날지언정 마치 견원지간인 것처럼 만나기 무섭게 싸워 대는 것을 보고 있자면 나이를 잊은 듯 보일 지경이었다.

더 놔두면 필히 싸움이 커질 거라는 것을 알지만 차마 나서지 못하는 조익기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자, 진천후가 나지막이 외쳤다.

“……조용!”

그제야 눈에 불을 켜고 으르렁대던 냉용후와 조도연이 고개를 숙였다.

“아, 교, 교주님.”

“송구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둘은 만나기만 하면 싸움질이냐? 그래서 앞으로 싸움에선 어찌 손발을 맞추려고 하는 거지?”

“…….”

진천후의 일침에 더는 말을 잇지 못하던 그때.

홍예예의 말이 뒤받쳤다.

“맞아, 맞아. 둘이 누가 보면 원수지간인 줄 알겠어! 하루를 쉬질 못해. 집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바깥에서도 샌다더니!”

그 곁에서 맞장구치는 홍예예가 더 얄궂긴 하였으나, 진천후가 직접 나선 이 상황에서 뭐라 할 것은 못 되니 조용히 입을 닫았다. 가뜩이나 예민한 상황에 기름을 들이부으며 불을 키울 필요는 없었으니.

“다들 오늘은 피곤할 테니 각기 정해진 막사로 돌아가거라. 조만간 여 대주가 오면 다시 북진을 감행할 것이니, 그때 가서 힘들다 징징대지 말고 미리미리들 쉬어 두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교주님.”

그렇게 정신없는 이 주야가 흐르고, 마지막 오 주야가 되던 날.

생각보다 늦어지는 발걸음에 걱정했던 현혼혈대 역시 무사히 도착했다.

여파달이 긴 창을 뒤로한 채 진천후를 향해 예를 갖췄다.

쪼르륵-

진천후가 따르던 술잔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의 끝에는 여파달이 인자한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소신 여파달. 교주님을 뵙습니다.”

“청해성까지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혈교에서 유일하게 진천후가 존댓말을 하는 이다.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심려 끼쳐 드려 송구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부디 말을 낮추시지요. 제가 면목이 없어집니다. 교주님.”

“그래도 명색이 제 조부님의 유일무이한 친우분 아니십니까? 여 대주께 함부로 대했다간 돌아가신 조부님 안면을 뵙기 껄끄럽습니다.”

“하오나…… 보는 눈이 많지 않습니까? 자칫 이 늙은이가 반역자로 몰릴지도 모릅니다.”

난감하다는 듯 표해 오는 여파달의 목소리에 결국 진천후가 백기를 들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둘이 있을 때는 이리할 겁니다.”

여파달이 주름 가득한 얼굴로 진천후를 바라보았다.

장성한 근골에 얼굴까지!

그의 조부인 진천기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

오랜 친우이자, 여파달의 첫 번째 교주였던 진천기의 모습을 전장에서 다시 한번. 이렇게라도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여파달의 심장이 새삼 쿵쾅쿵쾅 뛰기 시작한다.

‘아직 어리다고만 생각하였거늘…… 언제 이리도 장성하셨습니까?’

이번 생에 두 번 다시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혈교가 세상에 발을 들일 기회 따위, 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 그럼에도 긴 세월 그 끈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진천후라는 사람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꿈의 절반을 이루셨습니다. 아마 전대 교주님께서도 저 지하에서 기뻐하실 겝니다.’

여파달이 주름진 양손을 꽉 쥐었다.

현 오대혈대 대주 중에서 유일하게 당시의 혈교대전을 겪은 이로서 이 순간이 마치 꿈만 같았다.

그리고 내일이면, 드디어 모두 함께 혈교의 위용(偉容)을 만천하에 알리게 될 것이다.

“곧 출전을 알릴 겁니다. 먼 길 달려오셨으니 오늘 밤은 푹 쉬시지요.”

“예, 그리하겠습니다. 하니 교주님께서도 자작(自酌)은 그만하시고 푹 주무십시오. 이 여파달. 행여나 교주님의 옥체가 상하실까 두렵습니다.”

“알겠습니다. 내 조부님과도 같은 여 대주님의 말씀은 들어야지요.”

그렇게 또 한 번 밤이 지고 새 아침이 오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새벽에 동이 터 올 무렵부터 하늘이 어두컴컴해지면서 주변에 먹구름이 몰아들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려나 보구먼.”

“이런…… 그러게 말이네. 한동안 오지 않나 싶더니 또 비인가? 징그럽네. 참으로 징그러워!”

단단히 잠가 둔 문 앞을 지키던 두 무인의 말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천둥 번개가 내리치기 시작했다.

우르르릉-

콰광-!

번쩍!

장마가 멈춘다고는 하였지만, 아직 여름인 탓에 비는 쉽사리 그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렇게 한 번씩 잊을 만하면 찾아오니 우장(雨裝)을 벗을 틈이 없었다.

또다시 내리는 비가 질린다는 듯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무인의 눈이 일순간 커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서걱-

자신의 목이 잘렸다는 사실을 인지하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치, 침입자……! 커헉……!”

그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던 무인이 외쳤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부우우-

목소리로 외치는 것보다 호각이 더 빠르다고 생각했는지, 누군가가 급히 호각을 불었다.

곧 육중한 음파는 비가 오는 덕에 더 멀리 일파만파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아직 새벽의 단잠에 빠졌던 이들 역시 모두 깨어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팽팽하며 위태롭던 평화로움이 깨져 나갔다.

쏴아아-

하나 이는 서두에 불과했다.

빗소리가 가득한 전장의 가장 선두에 선 진천후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작게 말한 그 음성은 빗속 사이사이를 헤집고선 혈교 무인들의 귀에 박혔다.

“오늘은 시체를 거두지 않아도 되니 보이는 대로, 닥치는 대로 다 죽여도 좋다.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마음대로 해도 좋다. 그동안 쌓인 답답함을 모두 풀도록 해라.”

“존명!”

진천후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혈교가 날뛰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공손우경이 중얼거리며 내던지는 한마디, 한마디에는 강시들이 움직였다.

그야말로 인세 지옥이 따로 없었다.

토도도독.

카앙-!

무인들은 자다 깬 얼굴로 급하게 병기를 손에 쥐었지만, 제대로 휘둘러보기도 전에 명을 달리하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세차게 내리는 빗물에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한 이도 있었다.

설상가상 혈교의 무인도 무인이나, 강시들의 존재는 그야말로 공포였다.

“가, 가, 강시다!”

“꼬마야, 위험하다. 어서 도망가거라!”

“뭐야? 어딜 도망가려고? 흐응! 도망가면 재미없잖아?”

서걱-!

“아…… 아……?! 끄아아악!”

홍예예의 어린아이 같은 외면(外面)을 보고선 홍예예 역시 평범한 아이라 여겼던 것일까.

급히 그녀를 향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이의 손은 눈을 부릅뜨고 서 있던 홍예예의 날카로운 검기에 잘려 나갔다.

찰박.

바닥을 나뒹구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를 지르던 그는 곧 목까지 육체와 분리되며 차가운 물웅덩이에 빠졌다.

맑은 물웅덩이가 붉은빛으로 물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더욱 끔찍한 것은 홍예예가 귀여운 외모로 피를 뒤집어쓰고도 웃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이, 즐거워. 피 냄새가 한가득이네. 꺄륵!”

그 모습을 제법 멀리서 바라보던 부장과 홍예예의 눈이 마주쳤다.

꿀꺽.

동시에 부장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사람인가, 괴물인가? 대체 어디서 저런 존재들이……!’

떨리는 몸에 열리지 않는 입은 그를 당혹시켰으나,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어서, 어서 장군에게 이 사실을 알려라. 우리의 전력으로는 어림도 없음이야!”

“하, 하면 부장님은 어찌하십니까?”

“나는 장군께서 오시기 전까지 이곳을 지킨다. 뛰어라!”

혈교의 본격적인 중원 진출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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