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8화
섬서성 서안에 있는 한 작은 골목길 안.
객점이라고 부르기엔 여인들이 많았고, 그렇다고 마냥 기방이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한 그곳에서 험상궂은 얼굴을 한 남자 무인과 한껏 차려입은 채 흑색의 면사(面紗)를 둘러쓴 여인이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어디로 온다는 게냐? 정보는 확실한가?”
팔랑-
여인이 들고 있던 적색의 합죽선을 흔들며 말했다.
“놈들은 절대 거기까진 안 올 거예요. 위쪽 지방에서 날뛰던 혈교도 모두 물러갔다고 하는데, 뭐하러 굳이 가장 어려운 사천성과 마주하려 이곳으로 오겠습니까? 더불어 혈교가 점점 광동성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흐응, 이리 소식이 늦으셔서야…….”
여인이 조금 한심스럽다는 눈빛을 한 채 합죽선을 풍만한 가슴 사이로 가져가며 눈을 흘기자, 무인이 반쯤 넋이 나간 듯 소심하게 되물었다.
“하나 네년 말대로 놈들이 확실하게 오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질 않느냐?”
“사천성에는 아미파와 청성파. 사천 당문이 있습니다. 잘 아시면서 소협답지 않게 오늘따라 왜 이리 마음만 급급하신 겝니까? 혈교 놈들도 미치지 않고서야 그곳을 직진해서 들어올 생각은 하지 않을 겁니다. 안휘성과 호북성이 더 만만하니 그쪽을 뚫으려 하겠지요. 하니 운남성과 귀주성은 안전할 겁니다.”
“후우…… 정녕 확실한 것이냐? 자칫하면 내 목이 달아난다!”
여러 차례 반복하여 질문하는 무인의 모습에, 여인이 눈을 치켜떴다.
곱디고운 눈썹 아래 치켜뜬 눈동자에선 살의가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 설마, 이 음여랑이를 의심하시는 겝니까? 저를 의심하신다는 건 곧 개방과 적대하시겠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그간 우리에게 그리 많은 정보를 받아 갔음에도 아직도 못 믿으시겠다면 앞으로 더는 거래를 하지 않도록 하지요.”
음여랑이 고개를 홱 돌리며 몸을 일으키자 무인이 잠시 당황하는 듯했으나 황급히 고개를 내저으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고는 마치 음여랑을 달래듯 잡은 손목을 살살 어루만졌다.
‘크흐, 어찌 이리 손목까지 고울꼬.’
“지금 뭐 하시는 겝니까?”
그 보드라움에 잠시 사심에 둘러싸일 뻔한 그가 음여랑의 날 선 목소리에 성급히 정신을 차리고 말을 이었다.
“크흠. 그, 그럴 리가 있겠느냐? 내 말은 확실하게 하고 싶다는 게지. 너도 알겠지만 이번 사안이 워낙 중요하지 않느냐?”
“그것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해서 말씀을 드리는 게지요. 저는 제가 아는 한에서 정보를 다 전해 드렸습니다.”
말을 마친 음여랑이 자연스레 오른손 손가락을 전부 폈다.
이미 십 년을 넘게 이렇게 정보를 주고받은 그다.
금세 말을 알아들은 무인이 품 안을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탁.
“혹여라도 새 소식이 들어오거든 굳이 만나지 않아도 되니 서신을 넣어 주게.”
그러자 음여랑의 손가락이 다시 두 개가 펴졌다.
“허, 허어. 장사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닌데 어찌 이리 야박하게 구나?”
“요즘 우리 개방도 목숨을 걸고 정보를 수집하는데, 이 정도 수고비는 주셔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소협?”
음여랑이 무인의 거칠어진 손을 스윽 훑으며 잡아 주니 무인이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그럼! 내 개방의 그 노고는 잘 알지. 암, 그렇고말고!”
“그리 생각해 주시니 소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소협. 후후. 그럼, 조심히 돌아가세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무인이 돌아가고 나서야, 안에서 고운 색색의 옷을 차려입은 여인과 뾰족한 수염을 기른 사내가 걸어 나왔다.
“음 장로님. 정녕 이렇게 하면 되는 걸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조금 걱정이…….”
촤락-
“쉬이-”
사내가 걱정스럽다는 눈빛으로 음여랑을 쳐다보자, 그녀가 계속해서 팔랑이던 합죽선을 접어 앞의 뾰족한 수염을 기른 사내의 입을 막았다.
그러곤 눈꼬리가 반달이 되며 웃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아랫도리를 불끈하게 만들 만한 웃음이 사내를 홀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사내는 음여랑의 실제 나이를 어렴풋이는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절로 반응하는 신체에 당혹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십 년을 넘게 모시면서도 음여랑의 모습은 늘 한결같으니 거부 반응 따위가 없는 것일 터다.
“안 될 것은 또 무에 있느냐? 잔말 말고 앞으로도 이대로만 하면 된다. 그리고 이 주야 후, 우리는 이곳을 한동안 떠날 것이니 모두 떠날 채비도 미리 해 두라 일러라. 알겠느냐?”
“예. 알겠습니다. 장로님.”
말을 마친 음여랑의 눈이 창문 틈 사이로 바깥을 향했다.
전쟁 준비에 모두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곧, 이곳은 전쟁의 중심이 될 것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된다.’
음여랑이 속으로 스스로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 * *
광서성 계림시.
이 주변 일대를 전부 장악한 혈교는 광동성과도 제법 가까우며 큰 도시를 이룬 계림시에 자리를 잡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의 온기가 가득하던 이곳은 이제 혈교의 강시들에 사방이 둘러싸여 가히 죽은 자의 도시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더군다나 불에 타올라 군데군데 잿더미가 된 탓에 음산한 분위기가 더 강하게 느껴졌다.
사람의 행적이라고는 일체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주위 광경을 훑어보던 진천후가 뒤따라오던 조익기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오대혈대는 어찌 되었지?”
갑작스러운 질의에 잠시 멈칫한 조익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술술 입을 열었다.
“에, 각기 있는 곳으로 서신을 보내었으니 받는 대로 곧바로 출발할 것입니다. 한데…… 현혼혈대가 제법 멀리 간 것 같습니다.”
“멀리? 대체 어디기에?”
“그것이…… 청해성입니다.”
“흐음. 청해성까지 갔다고?”
“예.”
예상치 못한 지명에 놀란 진천후가 되물었다.
청해성이면 곤륜파가 있는 곳이다.
‘거긴 중원 중에서도 제법 안쪽에 위치한 곳인데.’
워낙 심심한 건 참지 못하는 성격이니, 가까운 곳을 찾아가기보단 촉박하게 움직이더라도 먼 곳까지 달려간 것이리라.
‘되도록 멀리 가지 말라 했건만, 기어코 거기까지 갔군.’
진천후의 심기가 조금 불편해짐을 느끼자, 이에 가장 민감한 조익기가 서둘러 화두를 돌렸다.
그의 심기가 불편해지면 뭐가 깨지든 박살 나든 할 터다.
그런 쪽으론 넌덜머리가 나는 조익기다.
이곳이 비록 전장의 한복판이라고 할지언정 말이다.
“에, 하지만 교주님. 덕분에 오는 길에 정파 놈들의 정세를 조금이라도 파악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워낙 발이 빠른 혈대이니 금세 도착하지 않을까요?”
조익기의 말은 맞다.
가장 나이대가 높은 혈대지만, 반면 이동 속도가 가장 빠른 혈대이기도 하다.
해서 비슷한 시간을 주어졌음에도 그곳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뭐,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지.”
오히려 다른 곳이었다면 그곳에 있으라는 명을 내려도 됐을 테지만, 바로 한 성만 더 건너면 무림맹의 본거지인 섬서성이 있으니 까딱하다 혈대 하나를 잃을지도 모른다.
작금의 상황으로는 승승장구하고 있으나, 무림맹의 본거지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개도 제집에서는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그런 일은 결코 사양이었다.
“그래. 뭔 일이야 있겠느냐? 그 성격 오랫동안 누르고 살아왔을 테니 그 정도는 괜찮겠지. 모처럼 만이기도 할 테고…….”
진천후가 수긍하며 고개를 주억이자, 조익기가 그제야 헤벌쭉 웃었다.
“예예! 그렇습니다. 교주님. 애당초 별동대로 보낸 것이 아닙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시지요. 헤헤.”
옆에서 실없이 헤실헤실 웃는 조익기의 모습에 진천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칙칙한 사내놈이 어떻게든 분위기를 띄워 보려 노력하는 그 모습이 그다지 보기 좋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심기를 건드리는 것보단 훨씬 나았으니.
진천후가 여태 보았던 보좌관 중엔 가장 볼 만했다.
“큭. 하여튼 네놈은 그런 면이 재미있단 말이지.”
그의 칭찬에 양손을 주무르며 조익기가 머리를 땅끝까지 닿을 기세로 반복해서 처박았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교주님. 아무튼 오대혈대 모두 못해도 오주야 내에는 도착할 것입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시지요.”
“애당초 걱정하지도 않았다. 그놈들이야 워낙 뛰어나니 신경 쓸 부분이 적다.”
오 주야면 제법 긴 시간이 될지도 모르지만, 공손우경의 부탁도 있는 마당에 나쁠 건 없다 생각한 진천후다.
오히려 세상 구경에 나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무렵,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이, 이게 무슨 일…….”
무에는 전혀 소질이 없어 익히지 않은 조익기가 당혹스러움에 주변을 돌아보는 반면, 진천후는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일찍도 왔군.’
콰앙-!
웅장한 소음을 내며 도착한 이.
그는 바닥에 꽂힌 자신의 상징이자 무기인, 사람 신체만 한 도를 등에 둘러매고선 말을 이었다.
“소신 조도연. 감히 교주님을 뵙습니다!”
“화려한 등장은 여전하구나. 오느라 고생했다.”
진천후가 조도연을 향해 고개를 주억였다.
“바로 그게 제 매력 아니겠습니까? 이거…… 아무래도 제가 제일 먼저 도착한 것 같군요.”
주변을 차차 둘러보던 조도연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출발할 때와는 달리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미소였다.
* * *
“총군사님. 아무래도 혈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사방에서 널뛰던 적들이 갑자기 모두 모습을 감춘 연유가 무엇일까요?”
오히려 미궁에 빠져 버린 그들의 계획 덕분에 머리가 복잡한 송운이 왼손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혹, 별동대(別動隊)인가.’
그때, 제갈염의 답이 들려왔다.
“송 소협의 생각도 그러한가? 그뿐만이 아닐세. 최근 개방의 행태가 이상하네.”
“개방이 말입니까?”
송운이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제갈염에게 되물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타 문파와 세가들만 생각하던 그에게 개방이란 조금 놀라운 이름이었다.
“그렇네. 개방이 최근 크게 움직이기 시작했어. 각 성마다 널려 있던 개방도들이 뭉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네.”
개방이 뭉친다.
이는 개방이 생긴 아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얼핏 들으면 별것 아닌 것처럼 들릴 수 있을 터지만, 그 숫자가 워낙 많고 방주마저도 방도들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는 개방이다.
개개인으로 다니는 것을 좋아하며 단체로 묶이는 일이라고는 타구진을 펼치거나, 혹은 장로들의 회의가 이루어질 때가 거의 전부인 그들이다.
더불어 방주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후개마저 실종 중인 상황인지라 아직 어수선할 시기라고 들었던 무림맹으로선 개방의 움직임이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갑자기 그들이 모여서 이동을 하고 있는 연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음……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군요.”
“내 말이 그 말일세. 더 이상한 점은 각 지방에 있는 개방 방도들끼리 모이기 시작하면서 그들이 정보를 팔 때 동일한 이야기를 뿌리기 시작했다는 거네. 혈교는 반드시 사천을 거치지 않고 광동성을 통해 서쪽에 있는 호남성과 강서성을 뚫고 올 거라는 정보를 말이야. 물론 당금 혈교의 주둔지가 광서성 계림시인 만큼, 일리가 있긴 하나 그래도 절반일세. 한데 다른 곳도 아닌 개방이 이 정도로 확신하다고 이야기를 뿌리는 모습이 아무래도 썩 보기 좋지 않네.”
“총군사님. 그 말씀인즉 설마…….”
놀란 송운의 두 눈이 솔방울만 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