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7화
한껏 여름의 태양이 땅을 내리쬐는 오후.
양의문이 양자청을 자신의 거처에 불러들였다.
그의 서신을 전달받기 무섭게 호북성에 있던 양자청은 화산파로 발걸음을 향했고, 그리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달그락.
찻잔을 들고 있던 양의문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를 맞이했다.
“왔느냐.”
명목상으론 차 한잔하며 숙부와 조카의 시간을 갖자는 것이었으나, 이제 슬슬 개방을 움직여야 할 시기라는 걸 알고 있는 양자청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동안 바깥을 떠돌던 양의문이 굳이 화산파 본문까지 돌아와 대기를 하고 있진 않을 터.
그러한 시기에 화산파 바깥에 있는 그를 굳이 단순하게 차 한잔하자고 부른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그러하다 보니 마음이 조금 조급해지면서 호흡이 불안정해졌다.
하나 여기서 자신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다면 양의문은 분명 실망할 것이 뻔했다.
이미 그에게 보여선 안 될 모습을 많이 보여 왔다.
‘더 이상 실망시켜 드릴 일은 하지 않는다.’
그것이 양자청의 당금 목표였다.
어떻게든 이번 기회를 통해 만회해야 한다.
그래야 목숨도 부지하고, 훗날 화산파를 무사히 이어받을 수 있을 터다.
‘큼, 흠!’
최대한 표정을 가다듬은 양자청이 그제야 조심히 물었다.
“숙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허어? 안 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안부를 묻는 게야?”
빠르게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양자청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한데, 무슨 일이십니까?”
“혹, 아직까지 공대복 그놈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게냐?”
양의문의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한 것도 잠시.
곧바로 질의의 목적을 파악한 양자청이 답했다.
“아 예. 아직 알려서 좋을 것은 없을 것 같아 최대한 단단히 입단속 시키도록 해 두었습니다. 더불어 개방놈들과의 접촉도 하지 못하게 해 두었구요.”
그러자 양의문이 처음으로 그를 칭찬했다.
“잘했다. 참으로 잘했어! 자고로 중요한 비책은 필요할 때를 알아야 진정한 비책이니라. 이제야 네가 뭘 좀 제대로 아는구나.”
양의문이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적당한 채찍질과 적당한 보상은 상대의 능력을 더욱 이끌어 주는 법이니.
“하면 그놈에겐 언제 알리려고?”
“조만간입니다. 이제 곧 혈교의 전력이 광서성과 광동성에 모일 것이라 하셨으니, 우리 측에서도 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흐음…… 설마 그대로 알릴 생각은 아니겠지?”
양의문이 의심의 눈초리를 그에게 보내자, 양자청이 반색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번쩍하고 안광이 어렸다.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모든 것은 무림맹이 꾸민 것이지요. 저희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허허허. 그것 참 좋은 대답이구나. 키워 놓은 보람이 있어. 형님의 유약한 성정을 닮을까 걱정했는데, 이제 보니 영락없이 젊은 시절의 나를 닮은 듯싶구나! 아자야, 잘 들어 두어라. 이 숙부는 이제 그들이 이곳 코앞에 당도하기 전까진 섬서성을 벗어날 수 없는 몸이다. 언제든지 그들이 이곳의 문턱을 넘으려 하는 순간 문을 열어 주어야 하니, 내 너를 믿는다.”
아니다.
그 말에 양자청이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까지는 양의문에게 자유권이 있다.
아니, 애당초 화산파의 장문인인 그가 문을 열어 주기 위함이라고 한들 굳이 섬서성에만 발을 붙이고 있어야 할 필요가 무에 있단 말인가.
그 아래 휘하로 부리는 이들만 수천, 아니 수만 명은 족히 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양자청의 능력을 보기 위함인가?
혹은 양자청의 충성도를 시험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양측 모두인가.
‘역시 이러니저러니 해도 세월에 묵힌 능구렁이가 가히 이무기급이로구나.’
양자청이 찰나의 순간 머리를 이리저리 굴렸으나, 쉽사리 답은 나오질 않았다.
그렇다고 더 답이 늦는다면 양의문이 의심할 것이다.
이에 양자청이 서둘러 답을 갈무리 지었다.
“걱정 마십시오, 숙부님. 반드시 놈들의 힘을 빼 두겠습니다.”
“그래그래. 나는 너만 믿는다. 언제든 자리를 탐하려는 개와 늑대들이 바글대는 이 화산에 내 혈육이라곤 너뿐인데, 자청이 네가 아니면 내가 누굴 믿겠느냐? 이 숙부 말 명심하거라.”
그의 말에 양자청이 스스로 더 몸을 한껏 낮춰 그의 발아래에 깔렸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숙부님.”
“이만 돌아가거라. 큰일을 치러야 하는 때일수록 몸가짐을 단정히 하도록 해야 하는 법이니.”
양의문이 손짓하기 무섭게 고개를 한번 크게 숙인 후 양자청이 방을 나갔다.
“……후우.”
고대해 오던 그날이 가까워져 오고 있음에 그의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온전한 흥분과 기대감이다.
실패는 용납하지 않는다.
애당초 실패라는 단어는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오롯이 성공만이 그의 앞날에 놓여 있을 뿐이다.
‘점점 다가오고 있구나. ……그날이.’
양의문이 손에 들고 있던 다 식어 버린 찻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마셨다.
* * *
“……그게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대복의 굳게 쥔 양손에 핏기가 사라지고 하얘졌다.
그도 모자라 손톱과 마주한 손바닥 사이에서는 핏물이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당금 자신의 귀에 들려오는 말이 사실이 아니길 바라며, 다시 한번 되물었다.
최대한 차분함을 유지하려 하였지만, 마음처럼 쉽지가 않은지 목소리가 마치 눈물이라도 터져 나올 듯, 음 높낮이가 멋대로 널뛴다.
그런 공대복을 향해 확인 사살을 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양자청이었다.
뒤돌아선 채 말을 잇는 양자청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말 그대로다. 오 주야 전, 개방의 방주가 죽었다.”
쿵.
공대복이 다리에 힘이 풀린 채 주저앉았다.
‘스승님이…… 돌아…… 가셨다고……?’
공대복의 몸에 묵직한 고통이 몰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욱씬.
심장이 가라앉았다고 해야 할까.
혹은 눌린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심장이 갈가리 찢어발기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들은 더 이상의 기회는 끝이 났다고 했으나 공대복은 어떻게든 훗날 다시 공이추의 마음을 되돌리려 했다.
개방이 완연한 힘을 얻은 후, 스승님을 제대로 모시러 가려 하였던 것이다.
한데 죽음이라니?
이토록 허망할 수는 없었다.
‘설마, 설마 그사이에 지병이라도 도지신 것인가……?’
아니, 아니다.
분명 그날 마지막으로 본 공이추는 멀쩡했다.
특히나, 마지막 날은 그 흔하게 하던 기침조차 한번 내뱉지 않았다.
외관뿐만이 아니라, 아직까지는 먹고 있는 약과 내공 심법만으로도 무리만 가하지 않으면 충분히 다스릴 수 있는 시기였다.
오 주야 전이라면 자신이 그를 마지막으로 본 직후라고 봐도 무방하다.
순간 머리가 멍해지고 앞이 하얘졌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스승님께서……!”
갑작스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친 탓일까.
아니면 살아 있는 모습을 보고 온 탓일까.
아버지와 같던 스승.
공이추의 죽음은 도저히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일으켜 세울까요?’
가면 쓴 사내가 눈짓으로 물어 왔지만, 양자청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다. 놔두거라.’
둘이 눈짓으로 서로의 의사를 주고받는 사이 공대복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 떤 놈입니까? 설마…… 그사이에 무림맹이 알아채기라도 한 것입니까?”
목소리가 반쯤 갈라지고 두 동공이 풀린 모습은 당금 공대복의 심기가 어떠한 상태인지 단박에 알려 주고 있었다.
살기가 담겼다기보다는 이미 절반은 맛이 간 사람의 몰골이다.
말 한마디, 한마디를 이어 나가는 공대복의 목소리는 몹시도 힘겨워 보였다. 지금 당장에라도 쓰러진다 한들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만큼.
그런 공대복의 모습에 양자청이 혀를 차며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머리가 좋군. 네 말대로다. 눈치 빠른 몇몇 무림맹 놈들이 개방이 배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 같더구나. 하여 합심한 무림맹 놈들이 배신한 개방의 방주인 공이추를 죽였다고 들었다. 너는 우리와 함께 있었기에 다행히 목숨을 구한 것이지.”
양자청의 말에는 조금의 오류가 있었음에도 이미 이성을 잃은 공대복에게 다른 것들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오롯이 무림맹이 공이추를 죽였다는 사실만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을 뿐.
멍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공대복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무림맹…… 무림맹에 다녀오겠습니다.”
“허어 아서라. 이미 놈들은 개방을 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 놈들에게 제 발로 걸어 들어가겠다고? 쓸데없는 짓이야.”
“왜, 왜 막지 않으셨소! 어찌 이리 쉽게 놔두셨소!”
앞뒤 가리지 않고 으르렁거리며 달려드는 공대복의 앞을 가면 쓴 사내가 가로막았다.
까드득.
단 한 번의 손짓으로 인해 가로막히자 공대복이 이를 세게 갈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양자청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쯧. 비록 아쉽게도 개방의 방주를 잃었으나, 개방 모두가 우리의 밑으로 들어오기로 하였다. 나 역시도 네가 스승을 잃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하는 바. 하니, 네놈은 전장에서 개방과 함께 놈들을 쳐 죽일 생각만 하도록 해.”
“내, 눈으로, 귀로. 직접! 확인해 보아야겠소. 그러니 이것……!”
눈이 불거진 채 다시 한번 달려들 그때.
쿵.
그의 눈앞에 공이추의 머리가 도착했다.
“……!!?”
“이거면 인정이 되겠느냐?”
양자청이 싸늘한 눈빛으로 땅바닥에 주저앉은 공대복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공대복은 그의 눈빛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순간 눈앞에 놓인 머리가 다른 사람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스쳐 지나갔으나, 평생을 자신을 먹여 주고 재워 주고 키워 준 이의 얼굴을 어찌 잊는단 말인가.
채 눈도 다 감지 못하고 잠이 든 공이추의 머리는 생전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봐 주었던 온기를 잃은 지 오래였다. 차갑게 식어 버려 몸뚱이조차 없이 머리만 남은 그 모습은 너무도 참혹하고, 처참했다.
“아…… 아아…….”
공대복의 사시나무 떨듯 떨리던 손끝이 마침내 나무로 만들어진 쟁반 위에 고이 모셔진 공이추의 머리에 닿았고, 품 안으로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아버지!’
마지막 돌아서는 그 순간에조차 자신을 걱정하던 눈빛.
끝끝내 입에서 한번 내뱉어 보지 못했던 그 단어가 이제야 그의 목울대에서 꿈틀댔다.
“으…… 흐으으…… 으아아아아아아악!! 무림맹 이 씹어 죽여도 모자랄 놈드으으을-!!”
살기 어린 음성이 작은 공간을 퍼져 나가자, 양자청과 가면 쓴 사내가 귀를 서둘러 막았다.
광기 어린 눈물이 그의 얼굴을 뜨겁게 적셔 내린다.
더불어 잠시 식어 있던 가슴에 분노라는 불이 지펴진다.
그 작은 불꽃은 점점 커져 활활 타오를 것이다.
그리고 괴성을 내지르며 피를 토할 듯 울부짖는 그 절망과 분노의 불꽃은 곧 힘의 원천이 될 것이다.
‘그래. 더, 더 날뛰거라. 너의 분노가 곧 우리의 지름길이 될 것이니.’
양자청이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다는 듯 미련 없이 몸을 틀었다.
“이만 가자.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할 듯싶으니.”
“저대로 둘까요?”
“나가지만 못하게 하고, 오늘 하루는 내버려 두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싸늘한 공간 아래, 남은 건 공대복과 머리만 남은 공이추 단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