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6화
第五章. 오대혈대
“꺄악!”
“아, 안 된다! 이놈들아!”
푹-!
“커억……!”
안휘성 정원현(定遠縣).
안타깝게도 황군과 무림맹의 무인들에게 보호받지 못한 한 마을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혼란의 틈에서 유일하게 온몸에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채 깔끔함을 유지하고 있는 사내가 있었으니.
촤악-
적어도 육 척은 되어 보이는 신장(身長)에 하얀 피부. 거기에 유난히 얼굴선이 곱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얼굴과 어울리는 적당한 체구를 지닌 그는 얼굴을 향해 튀기는 핏물을 들고 있던 붉은 선자(扇子)로 쳐 낸 후 주변을 주시했다.
그는 바로 혈교의 오대혈대 중 하나인 악혼혈대(惡魂血隊)의 대주 철혈장귀(鐵血掌鬼) 냉용후(冷龍吼)였다.
그때, 누군가 겁 없이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대주. 교주님께서 복귀 명령을 내리셨다고 합니다.”
“……장악이 끝나신 모양이구나.”
냉용후는 생김새가 고운 만큼 목소리도 고왔다.
어쩌면 이 혈투 속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이일지도 몰랐다. 냉용후의 마음속에 아쉬움이 차올랐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교주의 명이다.
어길 수 없다.
게다가 어차피 교주에게 돌아간다고 해도 그곳에선 또 다른 피를 보게 될 터.
잠깐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냉용후가 조용히 읊조렸다.
“모두 정리해라. 교주께서 계신 곳으로 돌아간다.”
“예, 대주.”
* * *
펑-
퍼버버벙!
“끄아아아-!”
절강성 수창현(遂昌縣)의 어느 한 마을.
여타의 전쟁터와 마찬가지로 싸우는 이들의 목이 잘리고, 팔다리가 잘려 나간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전쟁의 기류를 잘 느끼지 못하고 있던 마을이다.
그런 마을이 아비규환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워낙 작은 마을이었기에 얼마 되지 않는 무인들은 적의 숫자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전전긍긍이었다. 적들을 향해 검을 들고 달려들어도 재빠른 몸짓의 적들은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황군들이 방패로 막아 보아도 방패는 그저 무거운 쇳덩어리로 전락한다.
그나마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여느 전쟁터라면 한 번쯤 들려올 법한 여인들의 겁탈당하는 소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귀여운 음성임에도 광기에 물들었다고 보아도 좋을 법한 여인의 가녀리면서도 즐거움에 가득 찬 목소리가 사방으로 퍼졌다.
“꺄하하하! 재밌고나, 참으로 재밌어. 이 얼마만의 피의 향연이야? 더, 더 외쳐 줘. 그 고통 어린 목소리를!”
그 목소리의 끝을 향하니 한 어린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온다.
성인이라고 하기엔 아직 앳되어 보이는 얼굴.
거기에 밋밋한 앞섬과 신장은 누가 보더라도 아직은 어린아이라고 생각할 만큼 작았다.
덕분에 얼핏 보면 여아가 궁지에 몰린 것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정반대였다.
그 귀여운 얼굴로 손속만큼은 어느 누구보다도 잔혹했다.
“이…… 이 마녀(魔女)!”
“진정으로 마녀가 강림하였는가……! 크흑, 죽어라!”
“닥쳐! 귀 아파! 시끄럽다구!”
퍼벙-!
여아는 자신을 향해 살기를 날리는 이들에게 욕을 하며 검붉은 검기를 날렸고, 그 검기에 맞은 이는 처참히 머리가 터져 나갔다.
그녀는 바로 혈교의 오대혈대 중 하나인 사혼혈대(死魂血隊)의 대주이자 오대혈대의 홍일점.
혈항아(血姮娥) 홍예예(洪芮芮)였다.
타닷-
그때, 겉보기와 달리 위험천만한 홍예예의 곁으로 한 여무인이 다가왔다.
홍예예가 그곳을 향해 손을 내뻗었고 곧 그 여무인도 죽을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달랐다.
붉은 복면을 두른 여 무인이 왼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대주. 교주께서 부르신다 합니다.”
여무인의 말에 홍예예는 아쉽다는 듯 표정이 바뀌었다.
“히잉…… 벌써? 뭐가 이리 빨라? 난 이제 시작인데…….”
어린애처럼 칭얼대는 홍예예의 말에 여무인이 완강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가셔야 합니다. 교주님께서 직접 내리신 집결 명령입니다.”
“칫, 알았어. 알았다고. 하여튼, 유향(有香)이 너는 너무 단칼이야.”
삐졌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민 홍예예지만, 유향이라 불린 여무인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어째서인지 눈치를 보던 홍예예가 이내 고개를 떨궜다.
“……안 통하네. 가자, 가. 철수하라고 해. 이건 명백히 후퇴가 아니라 철. 수. 야. 나중에 누구라도 이 사태에 대해 놀리면 가만두지 않겠어. 흥!”
파밧-!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여전히 부루퉁한 얼굴로 홍예예가 몸을 허공에 날렸다.
그러자 사방에서 검을 놀리던 전장의 붉은 복면 여 무인들이 모두 그 뒤를 따랐다.
털썩.
그제야 황군을 이끌던 장수가 간신히 손아귀에서 쥐고 있던 검을 흘린 채 수하에게 외쳤다.
“……저, 전령을 보내라. 어서!”
“예, 예!”
* * *
호남성 영흥현(永興縣)에 위치한 마을.
거대한 도가 마을 한가운데를 폭풍처럼 휩쓸어 내리고 있었다.
쿠웅-!
“아악……!”
모래와 함께 날리는 핏물은 한데 모여 뭉쳤다가 다시 허공에서 흩어졌다.
도를 휘두르는 사내는 자신의 덩치만 한 도를 휘두름에도 숨 한번 거칠어지지 않는다.
신장은 약 칠 척에서 팔 척 정도 될까.
장신(長身)에 얼굴 가득 뒤덮은 수염은 가뜩이나 눈이 찢어져 험악한 인상을 더욱 흉악스럽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는 혈교의 오대혈대 중 하나인 혈혼혈대(血魂血隊)의 대주.
살도귀(殺刀鬼) 조도연(趙度衍)이었다.
푸드득-
그때 조도연의 머리 위에 한 마리의 새가 날아들었다. 전장의 한복판임에도 여유가 넘치는 그는, 새를 향해 날아오는 검을 쳐 냈다.
그러곤 새의 발목에 묶인 하얀 서신을 풀었다.
마지막에 찍힌 혈이라는 낙인은 누가 보아도 혈교에서 보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광서성. 집결.
-혈(血)-
내용은 간결했으나 알아보는 데 어려움은 전혀 없었다.
“큭, 아무래도 이혼혈대가 벌써 성공한 모양이군.”
조도연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동시에 좋은 듯하면서도 좋지 않은 애매모호한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찌 되었건, 교주의 부름이다.
비록 호남성과 광서성이 가까우나, 다른 혈대보다 늦고 싶진 않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쿵-!
퍽.
조도연이 도로 바닥을 내려찍자, 질퍽한 흙이 사방으로 튀었다.
동시에 혈혼혈대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그만! 돌아가자! 교주께서 부르신다. 대대를 정비해라.”
“예! 대주.”
우렁찬 사내들의 목소리가 피로 얼룩진 마을을 울렸다.
* * *
청해성 청해호(靑海湖) 주변 일대가 발칵 뒤집혔다.
예상하지도 못했던 혈교가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미 혈교는 지난 이 주야 동안 덕령합현(德令哈縣)을 차례대로 치고 들어온 차였다.
광서성과 광동성에 있다는 소식에 안도하였는데, 생각지도 못한 덕령합현에서 혈교가 들이닥칠 줄이야!
그 탓에 피해는 더더욱 막심했다.
당혹스러움에 물든 부장이 함께 있던 곤륜파의 장로에게 외쳤다.
“여기까지 도달하는 데는 못해도 삼 주야일 거라고 하지 않았느냐!”
“이, 이런 빌어먹을! 나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겠소이까? 그런 걸 따질 시간에 닥치고 어서 막기나 하시오!”
“이런 건방진…… 컥……!”
울컥.
애꿎은 무인에게 화를 내뱉던 부장은 마지막 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
길고 가는 창에 심장이 꿰뚫린 탓이었다.
목에는 구멍이 커다랗게 나고 부릅뜬 두 눈에 핏발이 선 채 죽은 기괴한 모습은 앞선 무인을 섬뜩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꿀꺽.
무거운 침을 삼킨 무인은 잠시 멈칫했던 검을 들어 반격했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하나 한 초식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검은 노인의 창에 밀려 멀리 날아갔다.
카앙-!
“……이럴 수가.”
“어차피 다 같이 황천길 갈 터인데 웬 말이 이리 많은지……. 쯔쯧. 가는 김에 길동무나 삼거라.”
푹-!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빛의 속도로 무인의 목도 부장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꿰뚫렸다.
“죽으면 어차피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똑같을 것을. 흘흘.”
촤악-!
더럽다는 듯 창을 뽑아 든 이는 머리가 백발로 새하얗게 샌 노인이었다.
머리는 반쯤 벗겨지고 쭈글쭈글한 피부에 군데군데 검버섯까지 핀 그는 누가 보아도 보호받아야 할 노인처럼 보였다.
다만 조금 특이점이 있다면 노인의 눈빛이 때때로 붉게 빛이 난다는 점일 터다.
노인은 바로, 혈교의 오대혈대 중 가장 마지막 혈대인 현혼혈대(玄魂血隊)의 대주.
마창백노(魔槍白老) 여파달(黎巴達)이었다.
여파달은 겉보기와 달리 어지간한 장정보다 빠른 속도의 손놀림으로 주변 일대를 쑥대밭으로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부우-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이 주변에 진을 치고 있던 무인들이 제법 많다는 사실이었다.
적의 침입을 알리는 호각(號角) 소리가 진영을 울렸다.
일제히 창을 든 스무 명의 적들은 삼각형 모양의 진법을 한 채 달려들기 시작했고, 곧 거대한 전투가 벌어졌다.
사방이 피로 물들고 점점 부상자가 속출해 나갔다.
후웅-!
촤악!
“끄아아악-!”
여파달을 상대로 수십여 명의 무인들과 방패를 든 방패병들이 달라붙었지만, 그의 긴 창은 그들의 접근을 쉬이 허락하지 않았다.
여파달의 창끝이 조금이라도 몸에 닿으면 아무리 질긴 근육도 붉은 피를 내뿜으며 찢기고 꿰뚫렸다.
찰랑-
주변이 온통 흔들리니 그 여파로 청해호의 물결이 요동친다.
“고작 스무 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미 몇날 며칠 밤낮을 샌 자들이다! 막을 수 있다! 다들 막아라! 어서!”
앞선 부장 뒤를 이은 새 부장이 소리쳤다.
이에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장궁(長弓)을 든 궁병들이 자세를 잡고 진영을 갖추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은 무인이 집결한 탓에 여파달의 마음대로 되지 않자, 그는 창을 들지 않은 왼손에 정신을 집중했다.
곧 그 손끝에서 붉은빛이 터져 나왔다.
파앗-!
“피, 피해라!”
후두둑.
이를 본 한 무인이 주위에 경고를 날렸으나, 머리보다 반응 속도가 느린 탓에 여파달 주변에 있던 무인들의 팔다리가 잘려 나갔다.
강기를 손끝으로 모아 마치 검처럼 활용한 것이다.
“크흘흘. 이제 알겠느냐? 본좌는…….”
여파달이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을 그때.
그의 머리 위로 새 한 마리가 빙빙 돌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여파달의 체취를 기억하도록 훈련시킨 그 새는 교주인 진천후의 신호를 정확히 전달시키고 있었다.
“오오, 드디어 집결인가?”
그의 주름진 입가가 징그럽게 씰룩인다.
여타 다른 혈대주들과는 달리 여파달은 반가운 기색이었다.
이깟 변방의 조무래기들이 아닌, 진짜 고수들.
무림맹을 지탱하는 이들과 손속을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그를 계속해서 자극해 왔기 때문이리라.
여파달은 미련 없이 손을 털어 냈다.
“출발하자! 당금부터 발바닥에 땀 나도록 달려가도 다른 혈대들보다는 늦을 게다. 그런 즐거움을 애송이들에게만 넘길 수는 없지 않겠느냐? 낄낄!”
여파달이 소름 돋는 웃음소리를 내며 외쳤고, 곧 그의 말에 사방에 섞여 싸우던 현혼혈대들이 일제히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