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4화
전쟁은 점점 과열되어 갔다.
한 번 밀리기 시작한 광서성과 광동성은 남은 땅마저 모조리 혈교의 손에 떨어졌다. 이미 모우량을 비롯한 수천의 군사, 무인들이 죽어 나가면서 예상했던 바이지만 출혈이 커도 너무나 컸다.
살림살이고 뭐고 모두 두고 도망가는 이들도 많았지만, 어떻게든 막아 보겠다며 나선 이들은 결국 모두 죽거나 붙잡혔다.
혈교가 들이닥친 칠 주야 동안은 밤낮으로 아비규환이 반복되었다.
첫날을 제외한 둘째 날부터 사방은 불로 뒤덮였고, 밤이면 강시들이 활개 치고, 낮에는 혈교의 무인들이 살육을 즐기며 목숨을 위협했다.
하나 광기 어린 모습으로 달려들던 혈교는 해남도를 점령했을 당시와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광서성과 광동성을 모두 점령한 그들은 곧바로 다음 성으로 넘어가지 않았으며, 중원 곳곳에서 튀어나오던 별동대들의 활동 역시 기적처럼 멈추었다.
잠시 휴식기를 가지려는 것일까.
그럼에도 안심할 수 없는 건 그들의 목표는 결국 무림맹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혈교가 이런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은 그만큼의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덕분에 무림맹 측에서도 조금 더 대비할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점점 더 초조해져 가고 있었다. 빠르게 전달되는 소식들은 하나같이 전 중원을 공포에 빠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 속에서도 운이 좋았던 것인지 살아남은 남저명을 비롯한 몇몇 이들은 경계선에서 큰 문파 중 가장 가까운 점창파로 달려갔다.
“……제법 발 빠르게 요새화시켰구려.”
그들은 잠깐 동안이나마 좌절을 맛봐야 했다.
운남성 대리시(大理市) 점창산(點蒼山)에 위치한 점창파는 점창산 중턱에 목책을 세워 사람이 올라오기에도 힘들도록 요새를 만들어 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목책 사이사이에는 대나무로 만들어진 창으로 방비하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산이 전부 요새화되어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일정 이상의 무공에 다다른 이라면 무공으로 뛰어오를 수 있을 테지만, 적어도 강시만 올라온다면 이곳만큼은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안도감을 주고 있었다.
물론 급하게 지은 탓에 군데군데 허술함을 보였지만 당장 온 힘을 소진한 남저명 일행은 그곳을 오를 기운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점창파는 우군이니, 문을 두드리면 열어 줄 것이라 굳게 믿은 남저명이 있는 힘껏 마지막 힘을 쥐어짜 소리쳤다.
“문…… 문을 열어 주시오! 우리는 광서성에서 왔소이다!”
힘겹게 외친 외마디였으나, 그들을 맞이한 것은 암기였다.
쌔애액-!
퍼버벅!
예상치 못한 암기 세례에 간신히 몸을 피한 그들은 모두가 살기 위해 다급하게 외쳐야만 했다. 그 악독한 혈교와의 전투에서 살아남았는데 이곳에서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자, 잠시 멈추십시오! 우리는 혈교가 아닙니다!”
“하면 네놈들은 누구란 말이냐?”
“광서성에서 이곳까지 도망쳐 오는 길입니다. 부디…… 문 좀 열어 주시오!”
남저명의 간절한 목소리에 잠시간 정적이 흘렀고, 곧 문 앞을 담당하고 있던 점창파의 장로 중 한 명인 오상훈(吳尙勳)이 이들을 확인했다.
빠르게 기운을 살펴본 결과, 정파의 무인임을 파악한 오상훈이 손짓했다.
“문을 열어 주거라.”
“예.”
끼이익-
그제야 남저명 일행은 점창파의 요새 안으로 무사히 안착할 수 있었다.
그들이 점창산 정상에 다다랐을 때는 지칠 대로 지쳐 아무것도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위태로워 보이는 남저명에게 물을 건넨 건 오상훈이었다.
“헉…… 헉…… 고맙습니다.”
하나의 산을 건너고 안전해진 듯 보였지만, 거기서 마냥 마음을 놓을 수도 없었다.
그다음 이어져 나온 오상훈의 말 때문이었다.
“이곳이라고 사정이 그리 좋지만은 않소.”
거의 죽기 직전까지 몰렸던 그들의 몰골을 보고서는 처참함을 느낀 오상훈은 허탈감을 감추지 못한 채 그대로 내비쳤다.
몇 날 며칠을 전쟁터에서 구르고, 목숨만 간신히 살아 돌아온 자들의 몰골이 멀쩡하리란 생각은 애당초 하지 않았다.
하나 이것은 해도 너무했다.
봉두난발에 온몸은 피 칠갑을 한 채, 오죽하면 눈에는 사람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생기가 느껴지지 않을까.
‘반쯤 넋이 나갔군.’
오상훈이 표정을 슬쩍 찌푸린다.
“놈들의 전력은 어떻소이까?”
원래대로라면 손님에게 쉴 곳을 제공하고 시간을 주는 것이 순서겠지만 지금은 전시였다.
남저명 역시 잠시 목을 축여 기력을 조금 차리고 난 후 곧바로 입을 열었다.
“놈들이 가진 강시의 힘이 너무도 큽니다. 대략 제 눈으로 확인한 수만 사백이고, 그 외에도 혈교의 무인들이 각기 지닌 무공이 너무도 뛰어났습니다.”
초반에는 그들도 희망의 끈을 잡으려 했었던 때가 있었다.
강시의 존재를 마주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강시들의 존재는 그야말로 지옥이고 악귀와 다름없었다.
“……그야말로 재앙이군.”
아직까진 소문으로, 소식으로만 전해져 오던 사실을 눈앞에서 겪은 자들의 생생한 증언이다.
거의 확실할 것이다.
‘우리 점창파의 숫자가 천오백 명. 하나, 강시 하나당 최소로 붙어야 하는 무인의 숫자가 일류 고수의 기준으로 스무 명 정도이니…….’
그 숫자를 계산하기도 전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일류 고수를 붙인다고 해서 확실히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다행인 점은 산을 요새로 만든 만큼,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것이다.
“당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의 방어뿐이오. 작전을 짜는 이들과 함께 얘기를 나눠 도움을 주었으면 하오.”
남저명이 지친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그러자 남저명의 뒤에 서 있던 사내 셋 역시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입니다. 서둘러 주십시오. 힘을 내 보겠습니다.”
“고맙소.”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감사의 인사는 저희가 해야지요.”
서로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받은 이들은 이내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 * *
“중원 곳곳에 퍼져 있던 혈교의 전력이 모두 광서성과 광동성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정찰조의 조용한 보고에 제갈염의 차분하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리다 사라졌다.
중원 전역에 퍼져 있는 정찰조인 만큼, 지금껏 그들의 보고는 틀린 적이 거의 없었다.
그들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제갈염이나, 이번만큼은 그 정보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신중히 생각해야 할 때다.
‘단순히 우리의 눈속임을 위한 것인가?’
제갈염의 굳게 감은 눈꺼풀 밑의 두 눈동자가 좌우로 빠르게 움직인다.
아직까지 놈들의 본단조차 찾지 못하였다.
심지어 세 문파 중 어느 곳이 배신했는지조차도 알아내지 못하였다.
‘이토록 내가 무능하였던가?’
제갈염은 스스로에 대한 답답함이 목울대 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칠 주야라는 시간 동안 해남도는 물론, 광동성과 광서성은 완전히 점령당하였다.
한데 아직까지 총군사인 자신은 무엇 하나 일궈 낸 것이 없다.
‘차분히, 조금만 더 차분히 머리를 굴려 보자.’
이토록 스스로가 무능력하게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다.
그동안 벌어졌던 크고 작은 전투는 정파와 마교의 다툼이었고, 전쟁이라고 불릴 만큼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아무리 제갈염이라고 하여도 처음 겪는 전쟁이다 보니 쉬이 대응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 바로 총군사라는 자리였다.
그는 스스로의 무능을 용납할 수 없었다.
마음의 혼란을 가다듬은 제갈염이 다시 차분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잠시 그들의 행보가 멈추었지만, 해남도에서 다시 출발한 시간을 계산해 본다면 빠르면 하루, 느리면 이틀 후였다.
처음엔 단순히 여유를 부린다고 생각했거늘, 그들은 군대가 머물 수 있는 땅을 확보하고, 그곳으로 집결하는 행태였다.
그때, 무언가 제갈염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차! 어쩌면, 어쩌면 놈들의 근거지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구나!’
사아악-
제갈염의 목 뒤로 서늘한 기운이 덮쳐 왔다.
‘놈들은 필히 한곳에 모임과 동시에 모든 군대가 출격하려 할 것이다.’
좋지 않은 느낌이다.
탁-!
제갈염이 자신의 무릎을 세차게 내려쳤다.
스윽, 스스슥-
그러고선 빠르게 먹을 갈아 앞에 놓인 종이 위에 붓을 놀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빼곡히 적힌 서신을 곱게 접어 정찰조의 손에 넘겼다.
“지금 당장, 제갈 세가에 서신을 띄워라. 지체할 시간이 없다. 한시가 급한 사안이니 가장 빠른 편으로 보내야 한다!”
“알겠습니다, 총군사님.”
처음 보는 제갈염의 다급한 모습에 정찰조가 빠르게 사라졌다.
‘부디, 준비가 모두 끝나 있어야 하는데…….’
제갈염이 수하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초조한 듯 깊고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교주님, 이제 방향을 선택하셔야 합니다.”
평소의 어벙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진중한 모습만이 남은 조익기가 진천후를 재촉한다.
평소라면 감히 어딜 나서냐며 지적했을 형추인과 종초기 역시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방향이라…….”
조익기의 말대로 해남도와 광서성, 광동성을 모두 점령했으니, 혈교는 나아갈 방향을 정해야 한다.
잠시 행보를 멈춘 연유는 수천 명의 무인들을 상대하면서 강시들도 제법 소모되었기에, 본격적으로 싸우기 전에 정비해 둬야 한다는 공손우경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간 중원으로 뿔뿔이 흩어져 싸우고 있던 혈교의 오대혈대(五大血隊)를 한곳으로 모으기 위함도 있었다.
이러저러한 연유로 인해 아직까지 꾸물거리고 있던 것이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한참 동안 진천후의 명령이 없자, 조익기가 탁상 위에 지도를 펼쳤다.
촤르르륵-!
그러곤 조익기의 손에 들린 막대기 같은 것이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탁!
“운남성과 귀주성으로 가면 중간에 점창파와 마주하겠지만 그곳만 꿰뚫으면 곧바로 사천성에 당도하게 됩니다. 사천성은 섬서성과 맞닿아 있으니 가장 좋은 동선이라고 보시면 될 듯합니다. 단지, 사천성에는 아미파와 청성파 그리고 사천당문이 모두 뭉쳐 있기 때문에 격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몹시 높습니다만. 에…… 또한 호남성과 강서성, 복건성으로 가면 호북과 안휘성, 그리고 절강성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만! 머리 아프다.”
“예, 옙! 딸꾹!”
조잘조잘 설명하던 조익기가 진천후의 한마디에 설명을 멈추었다.
“그러니까 조익기 네 말은 운남성과 귀주성 쪽을 치는 길이 가장 빠르다는 말이지?”
“그러합니다, 교주님.”
진천후가 마음에 들었다는 듯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가장 빠른 길로 가야지. 뭐하러 돌아서 가느냐? 기다린 세월이 이토록 긴데, 더 참을 수 있겠느냐? 오대혈대가 도착하는 대로 모두 출발한다.”
“예, 알겠습니다. 교주님!”
드디어 교주의 최종 명령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