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전생-213화 (213/275)

제213화

음여랑의 말은 그 어떠한 술보다 더 진하고 독했다.

“그래서 지금 무림맹에선 우리 방주의 죽음을 파헤쳐 준다고 하오? 개방의 방주가 어찌 죽었는지, 누구에게 암살을 당한 것인지 과연 티끌만큼의 관심이라도 갖는 이가 있긴 한가?”

말 한마디, 한마디가 편무량의 가슴을 향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박혔다.

공이추의 죽음.

그리고 믿었던 후개, 공대복의 배신까지.

‘방주……!’

아끼던 술까지 모조리 배 속에 퍼부으며 술기운에 취해 잊어 보려 했던 사실들이 그의 눈앞에 다시 떠올라, 심장을 후벼 파는 것 같은 고통이 두 배, 아니 열 배로 전해져 왔다.

평생을 함께 개방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사람이다.

개방의 상황이 상황이니 애써 슬픔을 뒤로하고 있었으나, 어찌 잊히랴.

먹먹함에 목이 막혀 더 이상 말이 나오질 않았다.

뭐라 반박이라도 하고 싶지만, 변명할 거리조차 없었다.

음여랑의 말이 모두 현실임을 깨달아 버린 상황이기에.

무림맹은 현재 혈교와 대적할 준비를 하느라 모두 혈안(血眼)이 된 상태다. 무려 구파 일방인 개방의 방주가 죽었는데도 그 흔한 위문 치례조차 없었다.

“…….”

“거보시오. 오라버니도 결국 아무 말 못 하지 않소? 평생…… 평생 허송세월 보낸 것과 뭐가 다르냔 말이냐고!”

우지끈.

챙그랑-!

속에서 올라오는 열분(熱憤)을 이겨 내지 못했는지 음여랑이 앞에 놓여 있던 탁자를 쾅 하고 내리찍었다. 그녀의 힘을 이겨 내지 못한 오래된 나무 탁자는 수십 갈래로 갈라졌고, 동시에 술병들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모조리 산산조각이 났다.

하나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새하얗게 머리가 센 언뜻 보아도 나이를 제법 먹은 노파 점주는 여타 다른 점주들과는 달리 화를 내지도, 안절부절하지도 않았다.

단지 둘의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 혀를 한 번 찬 뒤, 욕지거리와 말 한마디만 남기고 안으로 사라질 뿐이었다.

“……옘병. 간만에 와서 한다는 짓거리가 겨우 이거야? 지X들 헌다. 적당히 쳐 싸우고 동전 한 냥만 두고 가.”

한산하던 객잔 안에 노파마저 자리를 뜨자, 정말 남은 건 둘뿐이었다.

음여랑이 내력을 끌어내 주변을 한번 살핀 후,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나서야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그러곤 화를 가라앉힌 듯 다시 말을 이었다.

“방주가 죽임을 당한 것도, 대복이 그놈이 배신하고 뒤돌아선 것도 모두 다 우리 개방이 힘이 없어서요.”

더 이상 편무량은 그녀의 말에 답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힘없이 고개만 슬쩍 주억였을 뿐이다.

공이추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는 마음도 힘이 다 빠져 버렸다. 이럴 바엔 음여랑의 말을 차분히 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어 버렸다.

편무량의 반응에 드디어 만족을 얻은 것인지 조금 더 풀린 음성으로 음여랑이 말했다.

“놈들이 원하는 건 우리의 정보를 사는 이들에게 헛소문을 내고, 잠시나마 시간을 끌어 주길 원하는 것이더군. 겨우 이걸 시키려고 방주를 죽이고 대복이를 홀렸나 하는 의문이 들어 그 정체가 궁금해 끝까지 더 파고들어 보려 했는데, 정보원의 모가지가 떨어진 채 돌아왔소. 그렇게 해서 간신히 알아낸 것은 우리에게 손을 내민 그자들이 정파 중 하나이고, 혈교와 긴밀히 손을 맞잡고 있다는 것. 그것이 전부요.”

음여랑의 말을 듣고 있던 편무량이 굉장히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름에 혼이 다 빠져나갈 것 같았다.

“허…… 허허허. 정녕…… 그놈들이 정파란 말이냐?”

현재 무림맹이 반으로 갈라진 것은 무림맹에 조금이라도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하나,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 사이에서 혈교의 편을 들었다?

이는 백능이 마교와 손을 잡은 것과는 또 다른 것이다.

그토록 평생을 정보에 매달렸고 통달했다고 자부해 왔거늘, 정말 완벽하게 몰랐다.

편무량이 허무한 듯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러하오. 더 이상 캐지 않는 조건으로 그것만 하면 우리 개방을 한낱 개가 아니라 같은 인간 대접을 해 준다고 약조했지. 더불어 혈교의 피바람에서 벗어날 곳을 알려 준다 했소. 나는 이번 기회에 이왕 이리된 거, 우리 방도들 잘 먹고 잘 살길 바라는 바이고.”

“그것은 여랑이 너뿐만이 아닌, 나 역시도. 아니, 더 나아가 우리 개방 모두가 같은 바람이지.”

“그럼, 오라버니도 확실히 마음을 돌린 것으로 전하겠소.”

“……이미 여기까지 온 것, 더 무엇을 돌리겠느냐? 한데…… 대복이는 만나 보았느냐?”

편무량이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하나, 그의 기대감과는 달리 음여랑이 고개를 좌우로 내저을 뿐이었다.

곧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는 그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음여랑이 한마디 덧붙였다.

“나도 아직 대복이는 만나 보질 못했지만 그놈이 설령 배반했다 한들 그놈 성정에 방주를 직접 죽이진 못했을 거요. 어림도 없지. 아마도 그놈들이 꾸민 일이겠지.”

“……역시.”

편무량의 대답에 음여랑이 입술 끝을 살짝 깨물었다.

음여랑의 가느다란 손끝이 잘게 떨려 온다.

마침내 굳은 결심을 내린 듯, 그녀가 웅얼거리던 작은 입술을 떼었다.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

“말해 보거라.”

“이번 일만 잘 성사되면. ……나와 함께 떠나자고 하면. 받아 줄 거요?”

“……?!”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멍한 표정으로 음여랑을 바라보고만 있자 곧 거절의 의사 표현이라고 여겼는지, 음여랑이 고개를 홱 돌렸다.

“아니면 됐소. 거 못 들은 거로 해 주시구려.”

비록 말투가 변하고 세월이 흘렀으나, 새침데기 같은 그 모습이 마치 오래전 처음 그녀를 알았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마음에 편무량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순간 눈에 들어온 너무도 차이 나는 피부에 더는 말하지 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인생사 새옹지마.

공수래공수거인 것을.

음여랑의 말대로 대체 무엇을 위해 이 세월을 보내 왔는가.

더는 후회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뭐, 큼……! 이런 나라도 아직 네 마음에 있다면 그리하자. 개방이고 뭐고 다 놓고, 저 멀리 남만으로 유람이나 떠나자꾸나.”

“그 말, 설마…… 약조한 거요?”

편무량의 주름진 입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더 이상 무슨 말을 들으랴.

찰그랑.

음여랑이 멀쩡한 다른 탁자 위에 은자 한 냥을 내려놓았다.

“그럼, 나 먼저 가오.”

뒤돌아서는 음여랑의 입가에도 어느샌가 자그마한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번 일만 잘 해결되면 돼.’

세상은 전쟁이 한창이었으나, 왜인지 모르게 밝은 미래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 * *

온 세상이 피와 공포에 물들고 있을 무렵.

누군가는 매우 한가한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한 손엔 찻잔을 들고 다른 한 손엔 책을 든 채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어딘지 모르게 신나 보이는 사내.

바로 독고백이었다.

지난 몇십 년간의 세월 동안 해와 독고백은 정반대의 존재였다.

그가 있는 곳에는 최소한의 빛만이 들어와야 했고, 그는 본능적으로 빛을 피해 다녔다.

한데 그런 그가 최근 들어 바깥출입이 잦아진 것이다. 덕분에 독고백의 주변에서 시중을 들던 이들은 어둡고 퀴퀴했던 곳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을 수는 없을 터였다.

다만 그러면서도 그의 급격한 변화에 조금의 불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듯했다.

‘도착했군.’

그렇게 독고백이 한참 책의 구절에 빠져들어 갈 무렵, 그의 주변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매우 미세한 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독고백은 훨씬 먼저 느끼고 그를 반겼다.

낙월추가 등장하려는 방향에 미리 독고백이 손을 들고 손바닥을 쫙 펼친 채 고개를 향하고 있으니, 곧 그가 그곳에 무릎을 꿇었다.

타닷-!

“낙월추, 주군을 뵙습니다.”

여전히 능글맞은 그의 모습은 독고백을 다시 한번 즐겁게 해 주고 있었다.

‘최근 들어 정말 즐거운 놀잇감들이 많아. 역시 인세에 남길 잘했어.’

인세에 남는 선택을 하고도 한참 동안 지루함에 몸부림치던 그다. 오롯이 지루하지 않기 위해, 즐거움을 찾기 위해 씨앗을 뿌려 둔 일들이다.

한데 이제 하나둘씩 그의 바람대로 세상이 떠들썩해지고, 피바람이 분다.

모든 것이 독고백의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에겐 끔찍한 재앙이, 그에게는 곧 눈요깃거리가 되었다.

비록 언제부턴가 보이는 미래와 실제로 나타나는 미래에 조금씩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지만, 이는 되레 독고백에겐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보이는 대로 펼쳐지는 미래는 이제 넌덜머리가 나.’

책을 치우고 나니 한 번에 엄청난 양의 햇빛이 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탓에 서둘러 다시 손으로 급히 가려야 했지만, 독고백의 얼굴만은 여전히 싱글벙글이었다.

그때, 낙월추가 자신의 본분을 다하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혈교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흐음? 예상보다 훨씬 더 빨랐구나. 상황은 어떠하더냐?”

“해남도를 점령하고 단박에 광서성과 광동성까지 뚫고 들어가는 데 성공했습니다. 별동대가 생각보다 강력하더군요. 어쩌면 귀마병을 주지 않았어도 된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낙월추는 최근 자신의 주군 말속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에 조금은 당혹스러웠지만, 보고를 계속해서 이어 갔다.

“강시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가…… 놀랍군. 하지만 놈들이 잘못 짚었어. 쯧, 결국 제갈세가 놈이 머리를 잘 굴렸구나.”

“그것은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오는 낙월추의 모습에 독고백이 피식 웃었다.

“궁금한가?”

“궁금합니다.”

솔직한 모습이 참으로 재밌는 수하다.

다른 수하들은 기겁하며 몸을 사리려 호기심을 눌렀겠지만, 낙월추는 여전히 다르다.

그런 그가 일 년 동안이나 폐관수련을 하겠다며 휴게(休憩)를 요청해 왔었다.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는 수하가 강해지겠다는데 억지로 누를 생각은 없었다.

해서 허락했다.

다만, 이번엔 괘씸죄로 쉽게 알려 줄 생각이 없었다.

“그건 네가 알아 와야지. 그걸 알아보라고 보낸 건데 내가 알면 재미없잖아. 그렇지 않아, 월림?”

독고백이 되묻자, 뒤에 서 있던 홍월림이 조용히 답했다.

“예, 주군.”

낙월추는 언제부턴가 계속해서 독고백의 곁에 맴도는 홍월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살짝 미간이 찌푸려졌으나 순순히 고개를 주억였다.

어지간한 사내라면 홍월림에게 잘 보이려 들 테지만 낙월추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독고백에게 흥미 있는 수하는 자신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낙월추기에.

그러한 자신감이 늘 독고백을 즐겁게 해 주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읽던 책을 바닥에 내려놓은 독고백이 꽤나 달뜬 표정을 한 채 찻잔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호록.

뜨거운 김이 새어 나오고 있음에도, 그의 손은 전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찻잔을 굴리다 단숨에 목구멍으로 쏟아부었다. 이 때문에 입을 여는 그의 입속에서 연기가 흘러나왔지만 그 기괴한 모습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아아- 아무튼 재미있게 되었구나. 역시 머리 굴리는 데는 제갈세가 놈들 따라갈 자들이 없다. 재미있는 자들이야. 이러니 더욱 흥미진진해져 버리잖아? 쿡쿡. 그때까지 완성해 낼진 모르겠다마는…… 운이 동생이 이 난관을 어찌 헤쳐나갈는지. 앞으로가 더 기대가 되는구나.”

독고백의 두 눈이 즐거움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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