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2화
第四章. 드러난 배후
“가주……! 아, 아…… 니, 장문인!”
다급하고 온 힘을 쥐어짜 장문인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높고 험준한 산 중턱을 울렸다.
사내 둘이 오르고 있는 그곳은 섬서성에 위치해 조양봉(朝陽峰), 낙안봉(落雁蜂), 연화봉(蓮花峰), 운대봉(雲臺峰), 옥녀봉(玉女峰)의 다섯 봉우리로 이루어졌으며, 중원오악(中原五岳)으로 유명한 화산(華山)이었다.
아름답기도 하지만, 그만큼 악명이 자자할 만큼 절벽이 난무하고, 오르는 길조차도 가팔랐다.
온통 암석으로 뒤덮인 그곳에 파고들어 생명을 싹틔운 나무들이 그 절경을 더하고 있었다.
더불어 오늘 그 주변을 뿌옇게 뒤덮은 안개는 마치 신선들이 그 속에서 거닐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하나, 그것은 보는 이의 관점이 아름다운 것이고, 그곳을 오르는 이에게는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듯했다.
연신 가쁜 숨을 내뱉으며 쫓아가는 땅딸보 사내는 구경은커녕 앞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사내를 쫓아가기도 힘겨워 보였다.
“헉…… 헉! 가, 같이…….”
한참을 이를 악물던 땅딸보 사내는 차마 끝까지 말을 잇지도 못한 채, 간신히 장문인이라 부른 이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처량한지 쉬지 않고 오르던 그가 마침내 뒤를 바라보았다.
“내 그러게 굳이 따라 나오지 말라 하지 않았더냐?”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홱 고개를 돌린 그의 얼굴은, 다름 아닌 짧은 수염의 사내였다.
그랬다.
여태 가주, 혹은 어르신이라 불리던 그는 화산파의 장문인인 양의문(楊議紋)이었다.
본디 화산파의 전 장문인이었던 양의조와 양의문은 화산파에서 흔하지 않은 형제였다.
대다수가 남남인 화산파에서 평소 우애가 좋기로 소문이 났기에, 죽기 직전 양의조가 남긴 유언장에 적힌 유지에 따라 양의문이 자연스럽게 장문인의 뒤를 잇게 된 것이다.
하나 은밀하게 도는 뒷이야기를 아는 이들은 양의문의 잔혹함을 잘 알았다.
물론 알면서도 힘없는 자들은 눈과 귀를 닫을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양의문의 실력 역시 뒷받침이 되었기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런 그가 화산파를 집권(執權)하고 난 후로 묘하게 분위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당금의 상황에 이른 것이다.
그동안 가주라고 부르라 한 연유 또한 이 때문이다.
한동안 화산을 벗어나 무림맹 근처에서 기거하며 그들의 반응을 보고 소식을 접했던 양의문은 행여나 그들의 대화가 바깥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호칭을 계속해서 바꿔 왔다.
애당초 장문인인 양의문이 화산파에서 내려왔다는 행위 자체가 엄비(嚴祕)이기에 소식 자체도 바깥으로 나돌아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법 긴 시간을 밖에서 보내 왔던 양의문이 화산파에 돌아가는 연유는 단 하나다.
순간 다시 떠오른 그 장면에 양의문의 얼굴이 수치감에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더불어 굵고 짙은 눈썹과 함께 눈매가 하늘을 뚫고 올라갈 듯 솟았다.
까득.
‘빌어먹을 놈! 내 아무리 한 수 접고 들어갔다고는 하나, 대화산의 장문인이거늘……! 감히 교주도 아닌 주제에 그딴 식으로 날 대접했단 말이지? 내 이 치욕을 죽어서도 잊지 않겠다.’
제갈세가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기다렸던 혈교의 서신이 왔고 간신히 채비를 하고 나선 그를 맞이한 것은 교주가 아닌 종초기와의 독대였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였음에도 무시당한다는 기분을 떨쳐 낼 수는 없었다.
심지어 그냥 빈손으로 찾아간 것도 아니었다.
제갈세가 놈들이 수작을 부려 강시를 잡을 수 있는 진법을 만들었다는 소식을 전하러 간 길이었다.
물론, 확실히 확인된 바가 적긴 하나, 그토록 개무시당할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에 수치스러움이 그의 전신을 감싼 것이다.
분노에 잠시 이성이 휩쓸려, 이 사실을 말하지 않을까라는 고민도 했으나 결국 자신과 한배를 타고 있는 이들이었다.
어쩔 수 없이 말을 꺼낸 그의 분노에 정점을 찍은 것은 형추인이 전한 말 한마디였다.
이대로 계속해서 밀고 들어갈 것이니 미리 섬서성으로 돌아가 혈교가 도착하면 조용히 문을 열 준비나 하라는 진천후의 말을 전한 것이다.
화산파의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떠받들어져 왔던 그로서는 참으로 굴욕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그 탓에 가뜩이나 속이 터져 죽을 지경인데, 굳이 쫓아오겠다며 우긴 녀석이 빌빌대고 있으니 화가 몇 배로 치솟고 있던 참이다.
답답한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가장 먼저 앞서가던 가면 쓴 사내가 인상을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풀며 양의문에게 물었다.
“업을까요?”
가면 쓴 사내의 말에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숨을 헐떡이던 땅딸보 사내, 아니 섭위문(攝瑋文)이 눈을 부릅떴다.
“장문인 제 발로 올라가겠……! 꽥-!”
섭위문이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가면 쓴 사내가 그의 목 뒤를 쳤고, 쓰러지는 것을 그대로 받아 등에 업었다.
“이대로 가다간 늦는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이런 억지를 부려? 네놈이 머리가 좋다는 사실을 감사히 여기는 게 좋을 게야. 아니지, 머리가 좋은 겐지 나쁜 겐지……. 쯧, 그러니 잔말 말고 혼자 걸어오기 싫다면 업혀라.”
“……예.”
결국 양의문의 협박에 섭위문이 꼬리를 말았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들의 신형이 사라졌다.
* * *
늦은 저녁.
해가 다 지고, 집집마다 저녁을 하느라 피어올랐던 연기도 모두 꺼져 갈 무렵.
어두컴컴한 골목길 사이 작은 객점에 한 여인과 사내가 화주 병을 수 개 두고선 자리하고 있었다.
쪼르르- 똑.
어느덧 따르고 있던 다섯 번째 화주 병도 동이 났다.
또옥- 똑.
탁.
“이거 다 털렸구먼. 마지막 병이었는데…….”
편무량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조리 다 긁어내겠다는 심산인지 여러 번 병을 더 흔들고, 내부까지 들여다보고 나서야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풋.”
그런 그의 모습에 잠시 웃음이 터진 음여랑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통했나?’
작게 웃는 소리에 편무량이 고개를 들어 조용히 음여랑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초롱초롱 빛이 나는 듯 보이는 눈동자가 편무량의 마음을 다시 한번 쿡 찔렀다. 비단 얼굴뿐이 아니다. 피부는 탱탱하며 몸매도 여전히 젊은 여인의 그것처럼 유려한 곡선을 지녔다.
‘세월이 이리 흘렀는데도 여랑이 넌 여전히 아름답구나.’
편무량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나이도 나이지만, 평생을 고생하며 살아온 탓에 쭈글쭈글하게 주름진 손은 누가 보아도 노인의 그것이다.
잠시 음여랑과 손을 잡고 돌아다닌다고 머릿속에 상상을 그려 보니, 더럽기 그지없다.
계속되는 침묵에 멋쩍은 듯 다시 먼저 입을 연 것은 편무량이었다.
“……술이 약한 건 여전하구나. 예전엔 그래도 이리 얼굴이 달구어지진 않았던 것 같은데…… 볼 때마다 여전히 곱다.”
“이래 봬도 나도 나일 먹었소. 그리고 이리된 지는 오래됐기도 하고 술은…… 오라버니와 이리 단둘이서 술을 대작하는 것이 그만큼 오랜만이라는 뜻이겠지.”
음여랑의 당돌하던 목소리가 조금은 씁쓸하게 들려오는 것은 자신의 착각인가?
혹은, 술에 취한 것인가.
음여랑의 말대로 편무량과 단둘이 벌이는 술자리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아마도 몇십 년 만일 것이다.
개방의 방도가 되면서 자신의 것이라 여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가지지 않겠노라 맹세한 그는 개방에 속하면서 그 마음까지 지우려 애썼다.
음여랑은 그런 편무량을 포기할 수 없다며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그를 따라 개방에 입도하였으나,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방주인 공이추를 따라 정보력을 더욱 키워 개방의 입지를 다졌고, 그 외의 시간에는 부랑자로 전 중원을 떠돌았다.
그렇게 편무량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 채, 세월은 흐르고 자꾸만 늙어가는 자신의 얼굴이 싫었던 것인지.
혹은 스스로의 얼굴이 변하면 마음을 돌리기 더 힘들다고 판단하여 그랬던 것인지는 몰라도, 음여랑은 젊음을 유지하는 데 엄청난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러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다른 사내들과 어울리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애당초 여인의 몸으로 거지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점점 화려한 꽃처럼 사내들 사이를 오갔으나, 자신의 정조(貞操)만큼은 누구에게도 내주지 않았다.
해코지하려고 달려드는 이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녀는 단박에 돌변해 무공으로 상대를 제압하고선 달아났다.
그렇게 붙여진 별명이 화빙화였다.
‘이 음여랑이가, 뭔 짓을 해도 오라버니는 안 넘어오더이다.’
음여랑의 두 눈이 아주 찰나의 순간 촉촉이 젖어 들었다 사라졌다.
가진 것이라고는 평생을 기워 가며 입어 온 옷 세 벌과 훗날 뒤를 이을 또 다른 칠결 장로에게 물려줄 표식과 봉뿐인 사람이다.
작금 들이켜는 술도 그간 편무량이 정보를 판 대가로 달아 둔 소중한 술들이었다.
정말 중요한 날에나 한 병 꺼내 홀짝거리며 마시는 게 전부였던 그다.
그런 귀한 술을 이 자리에서 모조리 깔 정도이니 편무량의 마음이 얼마나 심란할지는 음여랑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말을 꺼내기 위해 말을 빙빙 돌리는 버릇도 여전하다는 것 역시.
그때 마침 편무량이 슬그머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여랑이 넌 대체 무슨 생각인 게냐?”
편무량은 음여랑의 예측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음여랑의 여전히 늙지 않은 그 얼굴은 자신이 오래전부터 연정을 품었던 그 모습 그대로다.
변한 건 야속하게 흐르는 세월이고, 자신뿐이다.
아니, 사실은 당금도 음여랑을 잊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슴 아프지만, 이미 몸담은 개방을 위해 그런 척을 해 왔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음여랑 역시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자그마한 희망을 걸어 본 채 말을 걸었다.
조금이라도 굳어 있는 분위기를 띄워 보려 했던 그로서는 성공인가 싶었지만, 다시 질문을 꺼내기 무섭게 잠깐이나마 환기되려 했던 분위기는 다시 본래대로 돌아왔다.
좀 전까지만 해도 아련하던 그녀의 표정이 무서우리만큼 차가워졌다.
“그때도 말하지 않았소? 난 그저 우리 개방의 방도들이 모두 잘 먹고 잘 살다 가기를 바랄 뿐이라고. 아픈데 치료 한번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죽어 나가는 방도들이 더 이상 없기를 바란다고. 그것이 전부요.”
“하나 이것이 결코 옳지 않다는 걸 너도 잘 알지 않느냐? 나 역시도 평생을 전 방주님과 함께 개방을 지키기 위해 힘써 왔다. 지금은 다 함께 힘을 합쳐 무림맹을 지키고, 중원을 지키기에도 부족한 시기지 않느냐? 한데…….”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는 편무량에게 음여랑이 독설을 날렸다.
“한데? 결국 그리해서 얻은 게 뭐요? 죽음? 배반? 멸시? 그렇게 겪어 보고도 아직도 그들을 몰라? 중립은 개뿔, 그저 개방은 평생 다른 문파들의 개처럼 살아온 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