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1화
‘혈교 녀석들 한탕 제대로 했군. 과연, 수십 년 동안 피에 굶주렸다는 건가.’
그는 다름 아닌 복마검대의 대주 낙월추였다.
“그래, 오래 쉬었지. 정확하겐 숨어 지낸 걸 테지만.”
당시 송운과의 전투를 끝내고 돌아온 낙월추는 한동안 자신의 은신처에 틀어박혔다.
독고백 역시 딱히 그를 불러낼 생각이 없었고, 시간이 제법 흐르고 나서야 스스로 바깥세상으로 몸을 드러냈다.
그런 낙월추를 독고백이 정찰대로 보낸 것이다.
기척을 숨긴지 약 일 년 만이었다.
“……알고는 있었다만 이것 참 처참하네.”
잠시 멈추었던 발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더 살폈다.
몸이 갈라지고, 살이 뜯긴 시체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지만 그에 비해 멀쩡한 시체도 제법 많이 보였다.
물론 낙월추 역시 그동안 독고백의 명에 많은 목숨을 앗아 봤지만 적어도 이렇게 일반인들을 대상으로는 잔악(殘惡)한 손속을 쓴 적은 없었다.
그야말로 피를 숭상하는 혈교다운 모습에 낙월추의 표정이 절로 찌푸려졌다.
‘어차피 멀쩡한 시체들도 자비가 아닌 강시를 더 만들기 위해서 남겨 둔 것이겠지.’
대충 눈으로 훑고 확인한 수만 이천이었다.
아무리 중원에 사람이 넘쳐 난다 하지만,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다.
이미 혈교는 많은 시체를 보유하고 있으나, 그것이 모두 다 강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명령이 아니었다면 멀쩡한 모습으로 죽은 이들은 없었을 것이다.
상황 보고를 위해서였지만 사방팔방 놓여 있는 수많은 기괴한 시체들을 보고 있자니, 속이 역한 것이 아침에 먹은 동파육이 도로 역류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낙월추였다.
서둘러 정찰을 마치고 이곳을 벗어나자고 마음을 먹은 그때.
검은 무복을 입은 사내가 낙월추의 곁에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혈교가 머리를 제법 잘 썼습니다.”
복마검대의 부대주 곽웅(郭雄)이었다.
정확히 곽웅의 말이 맞았다.
황군과 무림맹의 연합은 겉으로 보기엔 가히 완벽에 가까워 보였으나, 실상은 단합이 제대로 되지 않아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는 곳이 많았다.
당장은 이곳 광동, 광서성이 가장 심했지만 무림맹과 황궁에서 멀면 멀수록 그 실태는 비슷하다.
상황이 그러하다 보니 양측 모두 정예들로 채워져 있다 한들 서로 마음이 맞질 않아 오합지졸을 모아 놓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자긍심 높은 황궁의 무인들은 무림인들을 깔보기 일쑤였고, 이를 참다못해 서로 갈라져서 각개 전투를 나서기도 했다.
혈교는 이 틈새를 이용해 별동대로 파고든 것이다.
게다가 광동성과 광서성은 무림맹도 황궁도 모두 힘이 가장 미약한 곳이다 보니, 당연히 더 쉬웠을 것이다.
낙월추가 부하의 말에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이렇게 하면 굳이 강시를 소비하지 않고도 어느 정도 해결이 되니, 이쪽이 혈교에겐 훨씬 유리했겠지. 이미 그들은 중원에 무혈입성 한 셈이니.”
피를 보았으나, 혈교의 피가 아닌 적군의 피다.
길이 뚫렸고 그들이 기거할 수 있는 넓은 땅이 생겼다.
하나 혈교는 결코, 이 정도에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무림맹에 대한 원한이 단단히 깊은 자들이니 앞으로 더 많은 피를 보겠군.”
“분명, 무림맹의 본거지까지 밀고 들어갈 겁니다.”
혈교의 목적은 두 가지다.
이전 세대의 혈교대전의 패배에 대한 복수를 하는 것.
그리고 이 중원을 온전히 자신들의 것으로 차지하고 지배하는 것.
이 두 가지를 모두 이루기 전까지는 전진을 멈추지 않을 터다.
‘더구나 주군께서 직접 도우셨으니 이는 결국 시간 싸움이다.’
중원의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몇 가지 있다.
혈교는 이미 오래전부터 독고백의 계획하에 살아남았고, 세력을 키워 올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생각보다 독고백은 더 치밀하며 계획적인 사람이다. 특히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말이다.
그리고 독고백을 떠올리니 낙월추의 머릿속엔 자연스럽게 한 명의 얼굴이 더 떠올랐다.
주군인 독고백을 제외하고 자신을 놀라게 만든 유일한 무인.
‘자. 송운, 이를 어찌 막을 셈이냐?’
아무리 송운이라고 한들, 과연 이 많은 혈교의 강시들을 모두 막아 낼 수 있을까?
낙월추는 그때 보았던 송운의 무공을 떠올렸다.
그가 보여 준 시공검의 위력은 가히 가공할 만하나, 그것은 시전자에게도 큰 무리가 되는 만큼, 자주 사용하진 못할 것이다.
더불어 광독강시라는 새로운 강시까지 합류할 예정이라 들었다. 송운이 아무리 뛰어나도, 한 손으로 하늘을 다 가릴 수는 없는 법.
이번 전쟁은 분명 무림에 대 격변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과연 얼마나 더 성장했을지 기대되는군.’
마음 깊숙한 곳에서 찌릿하게 올라오는 묘한 기대감이 그를 흥분시켰다.
어찌하여 주군인 독고백이 이러한 일을 벌이는지 그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이 정도 돌아봤으면 됐다. 돌아간다.”
“예. 대주.”
낙월추가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 * *
무림맹 회의실.
황궁이 뒤집어졌듯, 무림맹 역시 장로들이 황급히 모였다.
그중 유일하게 빈자리는 얼마 전 목숨을 잃은 개방의 공이추의 것이었다.
하나 이 사실 역시도 아직은 무림맹에 공개되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숨길 수 없을 테지만, 적어도 누구에 의해 살해당했는지 정도는 파헤치고 난 후에 알리고 싶다는 개방의 의사를 제갈염과 백능이 받아들인 것이다.
혹여나 깊게 파고들려 하는 이가 없을까 하는 노파심도 있었으나, 작금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서로가 개방의 부재는 그리 큰 주제가 아니었다.
“아직 본격적으로 강시를 끌고 나온 것도 아니오. 장로들께선 이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시오? 단 스무 명이 그 일을 해냈다는 게 가당키나 하냔 말이외다!”
이번에도 가장 먼저 의견을 내비친 건 곡무릉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당당함보다는 초조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점창파가 있는 운남성 역시 광서성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곳이다. 광동성과 광서성의 마지막 선이 무너지면 가장 먼저 피해가 올 것이라는 두려움이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결국 지금처럼 하나씩 밀려오다 보면 분명 타 세가와 문파들의 본거지가 있는 곳까지 치고 들어올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니, 다른 장로들도 당혹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아무리 혈교가 막강하다고 하여도 그들이 진짜 두려운 건 강시 때문이었다.
강시만 없어도 무림맹이 혈교에 밀릴 연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무림맹이다. 그랬기에 혈교의 마인들보다는 강시를 상대할 방법에 더욱 매달렸던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광서성과 광동성의 패배는 그만큼 모두를 충격에 몰아세우기엔 충분했다.
그때, 누군가가 처음으로 곡무릉의 의견에 또 다른 의견을 내세웠다.
“내 곡 장로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어차피 광서성과 광동성에는 이렇데 할 큰 세력도 없던 곳이오. 그곳을 내주었다고 이토록 통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외다.”
모용승이었다.
이 말은 곧 싸움의 불씨가 되었다.
“나 역시도 모용 장로의 말에 동의하는 바, 겨우 한 번 졌다고 이리 침체되어 있으면 앞으로의 싸움은 어찌 이긴단 말인가? 또 언제부터 우리 무림맹이 이리도 약해졌는가? 이야말로 황군에게 비웃음 당할 일이오. 가뜩이나 황군에게 무시당하고 있는 판국에, 우리가 이러고 있어선 안 됩니다. 작금 더 무인의 숫자를 늘리고…….”
쾅-!
그 말을 끊은 건 곡무릉이었다.
평상시였다면 있을 수 없는 행위였겠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그로서는 앞뒤가 보이지 않는 듯했다.
“이는 모용세가와 곤륜파 모두 혈교의 범주와 가장 멀기 때문에 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오?!”
예민하게 날이 선 그의 말에는 가시가 박혀 있다.
실제로 모용세가가 위치한 곳은 요녕성(遼寧省)이다.
황궁인 북경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이다.
곤륜파 역시도 청해성(靑海省)에 위치하여, 당금 혈교가 있는 곳과는 멀다고 볼 수 있다.
아직까지 혈교가 아래 지방에 더 자주 출몰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모용세가는 아직 안전한 곳에 속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한 일이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망언인가!”
한번 불붙은 의견 논쟁은 가열되기 시작했다.
맹주의 반대편.
즉, 같은 편에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신의 목숨과 직결되니 서로를 헐뜯는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그들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제갈염은 서로 헐뜯는 장로들의 말에 귀 기울이며 얼마 전 있었던 군사 회의를 떠올렸다.
‘강시가 가장 늦게 모습을 드러낸 연유가 무엇일까.’
그때쯤 해가 졌다고는 하나, 그렇다면 시간을 더 늦췄을 수도 있는 것이다.
본디 습격이란 은밀함을 위해서라도 야밤에 이루어지는 것이 정석이니 말이다.
한데도 놈들은 굳이 해가 지기 전에 습격을 가했고, 강시들을 사용하지도 않은 채 점령을 끝냈다.
이 회의에 참석하기 전 백능에게 들러 그의 의견을 물었으나, 옛날 혈교의 양상과는 전혀 다른 행보라고 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본다면 혈교의 자만심이 하늘을 찌른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제갈염의 눈에는 그렇게만 보이지 않았다.
하면, 얼마 전 자신이 뿌려 놓은 함정에 적이 걸린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혈교와 손을 잡은 배신자를 잡아낼 수 있으리라.
‘화산파의 양취록, 모용세가의 모용휘, 그리고 청성파의 백무량.’
제갈염이 조용히 속으로 군사들의 이름과 속한 문파를 읊었다.
그중 두 명이 속한 곳이 당금 서로를 물어뜯고 있다.
‘어쩌면 저 두 문파 중 하나일 가능성이 더 클지 모른다. 하면 적은 대체 어느 쪽이냐?’
스스로의 생각에 빠져 있을 무렵, 제갈염이 화들짝 놀랐다.
‘……아차.’
화산파가 속해 있는 것이 조금 껄끄럽던 차였으나, 점점 자연스럽게 화산파를 제외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혼란스런 때일수록 이성의 선을 날카롭게 세우고, 암막에 가려진 진실을 봐야 하는 법이다.”
제갈염은 이미 예전에 돌아가신 스승님이 해 준 말을 되새겼다.
어제의 적은 오늘의 친구가 될 수 있고, 오늘의 친구는 내일의 적이 될 수도 있는 법.
총군사는 바로 그 점을 꿰뚫어야 하는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사방이 적인 상황에 누구의 말은 믿고 누구의 말은 배제한다?
그래선 안 된다.
화산파가 비록 오랜 시간 동안 백능의 편에 서 있다고 하나 화산파의 정심이 언제까지고 영원할 수 있을까?
‘사람은 간사하여 자신의 이득이 큰 곳으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제갈염은 속으로 마음을 다잡으며 양손을 꽉 쥔 채, 군사들과 같은 문파의 장로들을 끝까지 주목했다.
그렇게 반각 정도가 더 지났을 무렵.
제갈염의 눈빛이 번쩍이며,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이 정도로 끝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이상 회의를 한다면 서로의 감정만 상할 것 같군요.”
“크흠! 그럼 난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소이다.”
회의가 끝난 후, 모두가 흩어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누군가가 빠르고 은밀하게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