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9화
第三章. 전쟁의 서막
“하지만 채주, 정말 이곳을 버립니까?”
울먹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수하의 표정에 한숨을 푹 내쉰 장삼팔이 주먹으로 그의 머리를 쿵 찍었다.
“아얏!”
두툼하고 묵직한 주먹에 맞은 수하는 머리를 부여잡고 자리를 굴렀으나, 장삼팔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 멍청한 놈들아! 목숨부터 구하고 봐야지. 혹시라도, 죽을 것 같은 상황이 닥치면 모든 걸 버리고 떠나는 게 현명한 처사다. 훗날 이곳은 전쟁이 끝나고 다시 되찾아도 늦지 않아.”
수하들의 걱정은 단순했다.
수적질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워낙 없이 살아온 터라, 이곳을 비운 사이 다른 놈들에게 그동안 모아 온 재물들을 모두 빼앗길까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아이고, 이 멍청한 놈들. 그간 너무 평화롭게만 지냈나?’
장삼팔이 속으로 한탄을 내뱉었다.
장삼팔이라는 이름과 상강수로십팔채라는 이름만으로도 벌벌 떠는 놈들의 재물을 갈취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하나, 혈교가 진짜 나타났다면 이건 말이 달라진다.
물론 수적들에게 금은보화는 목숨과도 같은 것이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당연하게도 모가지에 붙어 있는 목숨이 우선이었다.
‘하여튼 누가 수적들 아니랄까 봐, 멍청하기는.’
그 덕분에 그간 수월하게 수하들을 부려 먹으며 편하게 살았으나 이제는 아니다.
아직은 혈교가 해남에서 주춤하고 있으니 실감이 나지 않는 것뿐이지, 본격적으로 위로 밀고 올라오기 시작한다면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강시라…….’
사실 장삼팔은 단 한 번도 강시를 본 적은 없었다.
하나, 그가 어릴 적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서 들었던 강시의 존재는 너무도 극악무도하여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어찌나 생생한지 아직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과 일치하는지 확실하게 알기 위해, 조심스레 소식통을 보냈던 장삼팔이었다.
목숨을 걸고 보내온 보고에 따르면 그들은 정말 먹지도 쉬지도 않으며 아픔을 느끼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저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라고만 생각했던 것이 현실로 벌어진 것이 아닌가?
아무리 장삼팔이 절정 고수에 달한 무공을 지녔으나, 놈들이 떼거리로 몰려온다면 당해 낼 용기가 없다.
‘빌어먹을 용기는 개뿔!’
당장 해남파의 꼴만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장삼팔의 귓가에 문득 아주 오래전 돌아가신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놈들은 죽이지 못할 거라면 무조건 피해야 한다. 삼팔아, 그래야 살아. 이 할미 말 꼭 잘 새겨두어라.”
“일단 조금 더 지켜보자고. 아침저녁으로 교대를 더 늘려서 경비를 강화하도록 하고. 배를 띄운 상태로 놈들의 동태를 살핀다. 한동안 땅에 발 디딜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식량을 비축해라. 지금은 모두 함께 살아남는 것이 목표다. 알겠느냐?”
장삼팔이 중앙에 놓인 원탁 아래에서 초조한 듯 떨려 오는 다리를 간신히 억누르며,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적은 적이고, 두려움은 두려움이다.
채주의 위엄은 살려야 체면이 좀 서지 않겠는가?
수적은 첫째도 체면, 둘째도 체면, 셋째도 체면이다.
그것이 바로 장삼팔의 수적 인생 신조이자 신념이었다.
그런 장삼팔의 노력이 통했는지, 감복한 듯 휘하(麾下)의 수적들이 모두 동시에 외쳤다.
“예, 알겠습니다, 채주!”
“돛을 펼쳐라! 채주께서 배를 띄우라신다!”
“빨리빨리 움직여!”
“예이!”
우렁찬 대답이 들려오기 무섭게, 모두가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당장 광서성과 광동성에도 불똥이 떨어졌다.
대다수가 중소문파로 구성되어 있는 이 두 성은 황궁인 북경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때 해남파가 이 일대를 휘어잡자 되레 가장 억압을 받아 왔던 곳이다.
해남파에게 보호비를 명목으로 그간 수많은 자원과 인력을 착취당해 왔다.
그랬던 그들이 해남파의 봉문으로 인해 다시 자립하기 시작한 것은 이제 겨우 몇 년 되지 않은 상태.
무인이 많아도 높은 수준의 무공을 지닌 이들이 없었으며, 해남파와 가까웠기에 혈교의 다음 표적이 되기 안성맞춤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황궁에서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황군을 파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작금 이 자리는 황군과 각 중소문파의 대표들이 모인 자리였다.
“황궁에서 보내온 병력이 오천, 그리고 각 문파에서 추려낸 일류 고수급 무인이 사천, 절정 고수급 이상이 일천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로 혈교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놈들이 곧 이곳으로 들이닥칠 겁니다.”
머리 중간중간 새치가 눈에 띄는 양산현(陽山縣)에 위치한 유씨 세가의 가주, 유상목(柳常木)이 말했다.
그의 안면에는 답답함이 잔뜩 서려 있었다.
“유 가주 말이 맞습니다. 당장 강시는 한 구당 일류 고수 열은 붙어야 상대가 가능한 놈들입니다, 장군.”
각 세가의 가주들의 걱정 어린 말과 표정에 황군의 대표이자, 장군인 모우량(毛佑亮)이 대놓고 불쾌함을 표했다.
“황제 폐하께서 최고의 군력을 뽑아 보내셨다! 감히 강호의 무부들이 내 앞에서 황제 폐하의 정병들을 불신하는 것인가?”
그의 말은 명백히 하대였다.
가히 황제의 권력이 무림맹을 앞서는 시대였다.
송운은 성향이 본디 무림의 무인에 더 가까워 무림맹에 최대한 경의(敬意)를 표하며 존대를 해 주었으나, 일반적으로 관에 속한 자들의 태도는 정반대였다.
원체 콧대가 하늘을 꿰뚫을 듯 솟아 있으니, 모우량의 반응이 좀 더 평균에 가까운 것이다.
특히 모우량의 지위는 장군이니, 오만함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속으로 열을 내뿜던, 남씨 세가의 가주 남저명(藍這明)이 조용히 자신의 의견을 내비쳤다.
“장군, 결코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같은 편끼리 싸울 시간이 없습니다. 장군께서도 익히 아실 테지만, 놈들은 이미 해남파를 제외하고도 중원 곳곳으로 소규모로 타격대를 보내 급습하고 있습니다. 아직 이곳까지 넘어오진 않았지만, 언제 급습당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보니, 단단히 대비해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이 조금 격했던 것이지요. 부디 장군께서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그 어느 때보다 황궁과 무림맹이 힘을 합쳐야 할 때입니다.”
광서성에서도 성도인 남녕(南寧)에서 오랫동안 세력을 키워 온 남씨 세가인 만큼, 황궁과 잦은 왕래를 해 왔고, 관리들을 어찌 대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다른 장문인들, 혹은 가주들도 입을 다물고 그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였다.
그 모습에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모우량이었다.
자고로 아부를 싫어하는 이는 흔치 않은 법이고, 최대한 몸을 수그리며 자신을 높여 주는 말에, 모우량의 마음이 조금씩 움직였다.
‘조금만 더 띄워 주면 되겠군. 망할 황군 놈들 같으니.’
속으로는 영 못마땅했으나, 당금은 아군끼리 논쟁이나 벌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당장 적이 코앞에 닥쳐온 중차대한 시점이다.
혹여나, 다투더라도 훗날을 기약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남저명이 쐐기를 박았다.
“또한 장군께서 이번 작전을 잘 마무리하신다면, 황제 폐하께서 장군을 더욱 아끼시지 않겠습니까? 더 높은 관직을 내리실지 또 누가 알겠습니까?”
묘하게 입꼬리를 실룩이던 모우량이 무심한 척,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후하게 인심을 쓰는 척, 명했다.
“크흠, 내 마음이 넓어 다행인 줄 알도록 하라. 군사는 두 개의 부대로 나눌 것이다. 황군을 중심으로 반으로 나누고, 무인들 역시 반으로 나눈다. 총지휘는 나 모우량이 직접 맡을 것이니, 나눈 부대는 각각 남저명 가주와 노중우(盧中祐) 부장(副將)이 맡는다. 불만 있나?”
아무도 그의 말에 토를 달지 못했다.
싸늘해진 회의장의 분위기를 아는지 모른 척하는 것인지, 모우량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명나라의 군사들이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이 정도 군사로도 적을 막지 못하면 어찌 황군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하니 오늘은 이만 해산하여 푹 쉬도록 하라.”
모우량이 해산을 외치고 나서야 남저명 외에도 타 대표들의 얼굴에 안도와 동시에 깊은 고뇌의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이번 전장은 정말이지 걱정이구나. 황궁에 너무 긴 시간 동안 평화가 어렸구나. 혈교와의 싸움을 이리 가볍게 생각하다니……!’
애당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나, 이토록 탁상공론(卓上空論)에 찌든 장군을 모셔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었다.
함께 적군을 상대하는 아군의 머리가 모자라니, 몸이 고생할 것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광서성과 광동성은 이들이 나고 자란 삶의 터전이며, 소중한 사람들이 모두 살고 있는 땅이었다.
부디 많은 피를 보지 않기를 기원할 뿐이었다.
모두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고 자리를 하나둘씩 뜨고 있을 때였다.
쿵!
“커헉…… 가…… 주님…… 놈들이……!”
털썩.
한쪽 팔이 뜯긴 채로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사내가 다급히 방문을 부수듯 안으로 들어왔고, 피를 토하던 입으로는 마지막 말을 마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부우우-!
때마침, 적의 침투를 알리는 나팔(喇叭) 소리가 짤막하게 들려왔지만, 오래가지 않아 끊겼다.
“적입니다!”
“꺄악!”
“……커헉!”
고요했던 방 안이 난잡해지면서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여태껏 들리지 않았는지 놀라울 정도로 순식간에 바깥에서부터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에 잠시 멍해진 모우량의 어깨를 남저명이 격하게 흔들었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생각지도 못했을 일이나, 지금은 너무 급했다.
“모 장군! 어서 명을 내리시오!”
“모, 모두 전투 태세에 돌입하라!”
모우량의 명이 떨어지는 순간, 방 안에 있던 이들이 황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 * *
“대주님, 모두 투입되었습니다.”
“좋은 소식이군.”
혈교의 대대 중 하나인 이혼혈대(利魂血隊)의 대주 홍청염(洪淸念)이 팔짱을 낀 채 전방을 주시했다.
평범했던 마을 곳곳에 불이 지펴지고, 피비린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코끝을 자극하는 비릿한 혈향과 고막을 찌르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홍청염을 더더욱 흥분시키고 있었다.
서서히 그의 눈빛에 광기가 물들기 시작했다.
“하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숨은 아쉬움이었다.
그토록 많은 살인을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올라오는 갈증이 해소되지 않은 탓이다.
더더욱 많은 피를 보고 싶었다.
‘이런 날을 얼마나 오랜 시간 고대했던가?’
너무 오랜 시간을 어두침침한 동굴과 험악한 산속을 헤매며 살아야 했다.
그 답답함과 욕망을 지난 며칠간 모조리 풀어내겠다는 기세로 몰아붙였다.
교주인 진천후는 그들의 갈증을 너무도 잘 파악했다.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날뛰어도 좋다.”
장마가 끝나기 무섭게, 이길 자신만 있다면 중원을 모두 밀어 버리라는 진천후의 명령은 혈교의 무인들을 깨우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 결과 해남파는 무참히 파괴됐고, 혈교가 지나간 자리는 시체의 피만 남았다.
“더 날뛰어도 좋으니, 모조리 살육하라.”
홍청염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