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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전생-207화 (207/275)

제207화

장포를 벗은 휘의 몸은 왜소한 체격에 비해 적절히 근육이 분배되어 있었다.

“이, 이분의 말이 진짜입니까? 교주님?”

어느새 호칭마저 존칭으로 바뀐 공손우경이 놀라 물었다. 이에 제법이라는 눈빛으로 휘를 보고 있던 진천후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주억였다.

“틀린 말은 아니지. 저자가 그 환을 가져다주었으니.”

그 대답은 곧바로 공손우경에게 큰 신뢰와 함께 눈빛이 돌변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봐, 들었지? 어찌 되었건 광독강시라…… 이거 얼마나 더 만들 수 있어?”

휘가 어느새 동작을 멈춘 광독강시를 바라보며 물었다.

가면에 가려 보이진 않았지만 그의 표정은 어딘가 묘하게 변해 있었다.

“더 만들려 한다면 만들 수는 있습니다. 다만 약품처리를 해 두긴 했지만, 시체가 생각보다 얼마 남지 않은 터라…….”

“흐음, 그래? 아무튼 언제 출정에 나가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모아 두라고.”

“그 말은……?”

여태껏 가만히 있었던 조익기가 조심스레 입 밖으로 질의를 꺼냈다.

“맞아, 네 생각대로야. 이제 슬슬 움직여야지? 언제까지 이런 어두컴컴한 곳에 처박혀 있을 거야?”

휘의 말에 진천후의 눈빛이 번쩍하고 빛났다.

혈교의 출전.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 같던 장마도 슬슬 물러나고 있다. 그리되면 강시들의 움직임이 한결 자연스러워질 테고, 지금처럼 자잘한 피해가 아니라 큰 재앙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미 죽어 버린 강시들은 인격이 없다.

고로, 일반 평민이고 무림인이고 가리지 않고 지옥도를 만드는 것은 굳이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세상에 재림(再臨)하겠다. 그리하여 전 중원에 혈교의 위엄을 알리고 나의 조부님과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간 이들을 내 손으로 모두 무릎 꿇리리라!’

그것이 바로 진천후가 지금까지 이를 악물고 악몽 같던 나날들을 버텨온 원천이며, 발원(發源)이다.

그런 진천후의 모습에 공손우경과 조익기, 종초기가 동시에 그를 향해 무릎 꿇었다.

“충(忠)!”

“충!”

확실히 강자존 법칙을 좋아하는 마교보다는 혈교 쪽이 더욱 충성심이 강력했다. 어떠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저들은 진천후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정말 이번 전쟁은 일말의 인정도 없이 오로지 피로 말하는 전장이 벌어질 거라는 직감이 왔다.

‘주군께서 조금 더 즐거워하실 수 있겠어.’

주군이 즐겁다면, 이는 곧 휘 본인의 뿌듯함과 직결된다.

처음 나타났을 때와 같이 휘가 조용히 그곳에서 사라졌다.

* * *

똑똑-

“……들어오너라.”

안에서 들려온 허락에, 젊은 사내가 다급한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젊은 사내, 바로 자신의 형인 양의조(楊議潮)의 장자(長子).

양자청(梁資晴)이었다.

어찌나 빨리 뛰어왔는지 양자청의 숨은 고르지 못한 채, 가쁜 숨을 내뱉고 있었다.

한동안 일을 반으로 나누던 가면 쓴 사내가 쉬게 된 탓에 대부분의 일을 양자청이 맡고 있었다.

“헉…… 숙부님, 헉. 조금 급한 정보입니다.”

짧은 수염의 사내의 붓을 놀리던 손이 멈췄다.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이기에 이리도 정신이 없는 게야.”

조금 나무라는 목소리의 그에게 양자청이 잠시 숨을 고르고 나서야, 말을 이었다.

“어젯밤 무림맹에서 들려온 소식인데, 내용이 심상치 않습니다. 읽어 보시죠, 숙부님.”

양자청이 작은 서신을 내밀었고, 그것을 펼쳐 읽어 내려가던 짧은 수염의 사내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뭐라, 강시를 격파시킬 진법이 나왔다고?’

믿기지 않는 소식에 당황하기도 잠시.

떨리는 손을 진정시킨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양자청에게 물었다.

“이 글의 진위 여부는? 확인하였느냐?”

“그게…….”

“어찌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야!”

결국 참지 못한 짧은 수염의 사내의 입에서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큭! 죄, 죄송합니다. 숙부님.”

“아아, 아니지, 아니야. 이럴 때가 아니다. 어서 정황을 말해 보아라.”

그 내력이 워낙 강력한지라 그의 화가 가라앉고 나서야, 양자청은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군사들의 회의에서 나온 말입니다. 제갈세가의 일원인 총군사의 입에서 직접 흘러나온 것이니, 진위 여부는 충분합니다. 다만 아직 완벽하게 진법이 어찌 통하는지 어떻게 사용되는지는 밝히지 못했다고 합니다.”

“흐으…… 나이도 젊은 놈이 머리 하나는 정말 빠릿빠릿하게 잘 굴린단 말이지. 그래서 네 생각은 어떠하느냐? 사실인 것 같으냐?”

처음엔 부드럽기만 하던 짧은 수염의 사내는 갈수록 양자청에게 엄해지고 있었다.

그만큼 그의 신경이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다. 만일 이 서신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발을 걸치고 있는 혈교의 승산이 기울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는 것이니 만큼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법이 완성되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한 듯싶습니다.”

역시나 당연하게도 양자청의 말에는 확신은 없었다.

오히려 점점 그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고 있음이 보였다.

‘위험하다, 위험해.’

딱!

짧은 수염의 사내가, 바깥을 향해 손가락으로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방문 틈 사이로 누군가가 고개를 조심히 내밀었다.

양자청도 몇 번 본 적이 있는 땅딸보 사내였다.

“부르셨습니까? 가주님!”

절도 있는 그의 목소리에는 긴장한 기색(氣色)이 잔뜩 배어 나왔다. 한 번의 대답이 그의 목숨을 위협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터다.

그 모습에 만족감을 느낀 짧은 수염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제갈세가에서 강시를 타개(打開)시킬 방도를 찾아냈다고 한다. 이 머리만 굴리는 데 능한 놈들이 기어코 진법을 만들어 낸 것 같은데…… 이러면 과연 혈교에게 승산이 얼마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으음……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땅딸보 사내의 말에 짧은 수염의 사내가 고개를 주억인다.

대답을 들은 땅딸보 사내가 진중해진 표정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가 생각을 끝내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반반입니다.”

“무엇이 반반이라는 게지?”

의아한 표정으로 짧은 수염의 사내가 되묻자, 땅딸보 사내가 양손을 들었다.

“이쪽이 혈교의 강시고, 이쪽이 제갈세가입니다.”

주먹을 쥔 오른손이 제갈세가이고, 완전히 손을 펼친 왼손이 혈교였다.

“아, 거 답답하니 내 눈치 보지 말고 계속 말해 보아라.”

다음 답을 기다리던 땅딸보 사내가 짧은 수염의 사내의 말에 고개를 주억이며 말을 이었다.

“제갈세가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 말이 맞습니까?”

“그러하다. 소규모의 형태로 폐쇄적으로 지내는 것이 그들의 특징이지.”

“그렇다면 반대로 혈교가 거느린 강시의 숫자는 많습니다. 더불어, 저희의 손아귀에는 얼마 전 개방이라는 다량의 먹잇감이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랬지. 한데 그것은 갑자기 왜?”

반복되는 문답에 짧은 수염의 사내가 땅딸보 사내를 귀찮다는 듯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 잠시 움찔거렸으나, 천천히 설명을 이어 나갔다.

“바로 그 점입니다. 어차피 놈들의 진법은 익힌 자들만 사용할 수 있는 한정적인 것이 아닙니까? 한데 혈교에게는 셀 수 없이 많은 강시가 있습니다. 그러니 그 위력이 어느 정도이냐에 따라 확률은 천차만별일 것입니다. 하니, 이긴다와 진다. 두 가지만 놓고 본다면 반반의 확률이 되는 것이지요.”

한동안 말없이 짧은 수염의 사내와 양자청이 듣고만 있자, 땅딸보 사내가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어찌 되었건, 미리 알고 대비를 하는 쪽이 좋을 것입니다. 총군사 그자가 허튼소리를 할 이는 아닌 듯하니 말입니다. 자세한 진법의 능력을 알아내는 것은 더더욱 중요할 테고요.”

마지막 말을 끝낸 땅딸보 사내는 어딘지 모르게 말하는 내내 당당해 보였던 표정이 다시 빠르게 움츠러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결국, 놈들의 진법이 어느 정도인지 자세히 파고들어야 한다는 것이군. 끄응…… 하나의 일이 해결되니 또 다른 일이 생기는 것인가. 정말 귀찮게 되었군.’

“우선, 한동안 군사 회의에서 튀지 않게 행동하라 일러두어라. 최대한 정보를 더 빼내 오면 당연히 좋은 것이니.”

“알겠습니다, 숙부님.”

“아, 그리고 자청이 넌 얼마 뒤에 나와 갈 곳이 있다. 조용히 움직일 채비를 해라.”

“저…… 그, 그럼 저는 어찌할까요, 가주님?”

“너는 이만 물러가거라. 그리고 그 진법이 대체 무엇일지 그놈과 머리를 좀 맞대 보도록 하고.”

“아, 알겠습니다, 가주님!”

“그놈의 호칭은 더럽게 큰 소리로 말하는구나. 귀찮으니 이만 물러가라!”

“예, 예. 알겠습니다!”

땅딸보 사내가 물러나기 무섭게 짧은 수염의 사내의 표정이 불안하게 변했다.

최대한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했음에도 자연스럽게 드러난 표정은 양자청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아직까지 혈교의 교주라는 자를 만나 본 사람은 짧은 수염의 사내뿐이다.

‘대체 얼마나 강력한 자이기에 숙부님께서 이 정도로 두려워하신단 말인가?’

만나러 갈 채비를 하라고는 일렀으나, 이제 양자청이 만나러 갈 사람은 쉬이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먼저 연락을 넣는 것조차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하다.

혹여 자신들의 위치가 누군가에게 들키면 곧바로 그곳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다.

그만큼 자신들을 철저하게 관리한다는 뜻.

아무리 급한 정보라고 하여도, 혈교의 서신이 먼저 도달하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짧은 수염의 사내는 처음으로 진천후와 마주했던 그 날의 기억을 떠올랐다.

“내게 협조한다면, 훗날, 네놈에게 무림맹을 넘겨주마.”

명백한 협박이자, 명령이었다.

‘혈교의 교주라는 위치가 과연 그러한 것이었나…… 크으.’

짧은 수염의 사내 역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혈교라는 것은 옛 문헌 속에나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이들 중 하나였다.

하나, 그를 만나고 나서야 어째서 혈교에 의해 무림맹이 그토록 큰 존폐의 위험을 겪었는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첫 만남에서부터 그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그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었고, 첫 만남의 자리에는 오직 그와 자신 단둘뿐이었다.

만약 그 자리에서 협상을 거절했더라면 자신이 살아 있을 수 있었을까?

‘얼굴까지 본 나를 살려 두진 않았을 터.’

아니라고 답하고 싶지만, 차마 그 말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동맹과 같은 위치이니 동일선상에 서 있다고 생각하려 해 보아도, 그 존재감과 주변을 아우르는 분위기는 자신조차도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해서 처음엔 불공평한 처사라고 생각하였으나 점점 그를 알면 알수록 적이 아닌 게 다행이라는 나약한 생각이 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씁쓸하면서도 답답하고, 화가 맺힌, 오묘한 표정을 짓던 짧은 수염의 사내가 양자청을 향해 조용히 읊조렸다.

“조만간 또다시 연락이 올 것이다. 그때 바로 떠날 수 있게 채비를 마쳐 둬라.”

“그리하겠습니다, 숙부님. 걱정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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