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5화
“……하면 그 진법은 어찌 통하는 것입니까?”
지금까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던 화산파의 군사, 양취록(梁聚祿)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능구렁이 같은 그의 행동에 제갈염이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직 그것까진 밝힐 수가 없네.”
제갈염의 답변에 이번엔 군사 세 명 모두가 동시에 열을 올렸다.
“총군사님, 지금 이 자리는 우리가 혈교에 대한 확고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만든 자리가 아닙니까? 혹시 저희가 제갈세가의 것을 갈취하기라도 할 것 같아 이러십니까? 말씀을 해 주셔야 머리를 맞대고 전술을 짜낼 것 아닙니까?”
“아무리 제갈세가라고 해도, 적용해 볼 대상이 없었지 않은가. 지금 당장 세부적인 것까지 밝히지 못하는 연유는 그 진이 완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일세.”
당금, 제갈염이 내뱉은 말은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허어!”
통탄스러운 듯 백무량이 가슴을 쿵 하고 쳤다.
“오늘따라 총군사님답지 않으십니다.”
모용휘가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제갈염을 쳐다보았고, 이내 그 시선은 송운에게로까지 돌아갔다.
마땅치 못하다는 표정이었다.
“전 무림맹의 군사 회의까지 황궁의 사신이 와 있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오늘 회의는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총군사님.”
말을 마친 모용휘가 자리에서 일어나니, 다른 두 명도 연달아 일어났다. 이미 한 명이 빠진 자리에 남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저도 이만 일어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조만간 다시 뵙도록 하죠.”
그렇게 흐지부지한 듯 회의가 끝이 났다.
모두가 나가고 텅 빈 회의실 안, 아까와는 달리 송운과 제갈염의 얼굴에는 묘한 표정이 걸려 있었다.
“부디 어디든 미끼를 물길 바라야겠군요.”
“이 정도까지 던졌는데, 물지 않을 리 없을 걸세. 다만 그 후의 일은 우리의 몫이겠지.”
* * *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 어느새 이 주야가 지났다.
개방의 장로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지금, 그들은 느끼고 있었다.
내부의 공기 속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이 서로의 기도(氣道)를 묵직하게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크흠, 모두 도착한 것인가?”
그 묵직한 공기 속에서 드디어 편무량이 입을 열었다. 그제야 모두의 입에 물고 있던 보이지 않는 재갈이 풀린 듯했다.
“예, 저희는 모두 도착했습니다, 편 장로님.”
오늘도 가장 먼저 답을 한 것은 갈천노였다.
“그 발칙한 놈 면상 좀 보려 했더니 감히 이 늙은이를 기다리게 하는군. 흥.”
음여랑은 내뱉은 말과는 달리 표정은 제법 밝았다.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기대하는 어린아이처럼 기쁜 표정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 게냐? 여랑아.’
지난 회의 때 이후로, 혹여나 하는 노파심에 편무량이 음여랑의 뒤를 바짝 쫓았으나 별달리 나온 것은 없었다.
가장 뛰어난 실력자들을 붙였지만, 어쩌면 이조차도 알아챈 음여랑이 빠르게 신경을 분산시켰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평생 정보를 사고팔며,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그럴 가능성이 높다.
사실 편무량 본인이 붙었어도 쉽진 않았을 것이다.
편무량이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일단은 눈에 보이는 결과로는 아무것도 없으니 그저 별일이 없길 바라고 있으면서도, 그녀가 했던 말이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일평생 봐 온 그녀를 생각한다면 결코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라며 편무량의 본능이 강력하게 경고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홀로 생각에 잠겨 있을 무렵.
스슥-
누군가가 원형 탁상 중앙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다수가 경계하는 태세로 적으로 보이는 그를 노려보았으나, 음여랑은 여전히 표정이 싱글벙글이다.
가면 쓴 사내는 먼저 목을 돌려 가며 장로들을 둘러보았다.
“네놈이냐? 이 서신을 보낸 것이?”
그중 가면 쓴 사내를 가장 날카로운 시선으로 아니꼽게 바라보고 있던 갈천노가 그를 향해 서신을 던졌다.
펄럭거리며 바닥에 떨어지는 서신을 잡은 가면 쓴 사내가 고개를 주억였다.
“맞다. 궁금한 게 있다면 더 물어도 좋다.”
얼굴이 반쯤은 가면에 가려졌으나, 드러난 한쪽 눈에도 감정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사내의 모습은 약간 기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 분위기에 눌린 것인지 잠시 모두가 할 말을 잃은 그 시점에,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편무량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방주님을 죽인 것도 설마…… 네놈의 짓이더냐?”
아직까지도 공이추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 탓인지, 질문을 끝맺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답은 질문에 비해 너무도 빨리 돌아왔다.
“그렇다면?”
“네 이놈! 네놈이 감히 그런 끔찍한 짓을 벌이고도 이곳에서 살아 나갈 것이라 생각했느냐!”
순간 눈이 벌겋게 충혈된 편무량이 그에게 달려들었지만, 가면 쓴 사내는 가뿐히 몸을 허공에 날렸다.
“설마 이곳에 나 혼자 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딱!
그러곤 가면 쓴 사내가 양 손가락을 맞부딪치자, 순식간에 약 스무 명 정도 되어 보이는 검은 복면의 사내들이 튀어나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쿵!
순식간에 벌어진 사태에 개방의 장로들이 당황하는 것도 잠시.
곧 그들의 동공이 확장됐다.
“바, 방주님!”
복면의 사내들이 던진 것은 개방의 방주, 아니, 방주였던 공이추의 시체였다.
상하가 분리된 채 이미 딱딱하게 굳다 못해 시퍼렇게 변하기 시작한 그의 육신은 그가 죽었음을 명명백백히 보여 주고 있었다.
동시에 장로들이 분개하기 시작했다.
“이런 찢어 죽일 놈들 같으니라고!”
“갈!”
순간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달려 나간 두 장로.
하나, 가면 쓴 사내의 주변에 붙어 있던 검은 복면 사내들의 검신에 처참히 쓰러졌다.
“끄아악!”
순식간에 분위기가 북해빙궁의 겨울처럼 살벌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이는 명백한 개방을 향한 기만행위이며, 모욕이고, 도발이었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방이 무슨 반응을 보이건 상관없다는 듯, 시리도록 차가운 목소리로 가면 쓴 사내가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네놈들이 부르짖던 방주는 죽었고, 그를 이을 후개마저도 실종된 상태지. 내 말이 틀린가?”
“크윽……!”
그 모습에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으나, 섣부르게 행동을 벌일 수 없었기에 온몸이 덜덜 떨리며 머리가 펄펄 끓기 시작했다.
그러던 그때.
가면 쓴 사내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본 개방 장로들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네놈들이 찾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겠지.”
청록빛을 내는 그들에겐 너무도 익숙한 그것.
타구봉이었다.
“이노옴! 이리 당장 내놓지 못할까!”
창월랑이 내기를 실어 장법을 내지르며 소리쳤으나, 가면 쓴 사내가 귀찮다는 듯 내뻗은 손짓 한 번에 허공에서 허무하게 흩어졌다.
“……이럴 수가.”
털썩.
그것을 지켜보던 창월랑이 제자리에서 무너졌다.
이미 방주의 죽음을 확인했다.
그것도 모자라 두 명의 장로가 눈앞에서 살해되었고, 자신의 내기까지 너무도 쉽게 받아내는 상대에게 투지를 잃어버린 것이리라.
‘……강하다. 아니, 강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자다.’
개방이 아무리 무공보다 정보로 유명하다지만, 이렇게 쉽게 당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되짚어 보면 아무리 공이추가 나이 들고 지병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개방의 방주였다.
결코 녹록지 않은 실력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런 공이추가 죽음에 이르렀다면 적도 어느 정도 비슷한 경지에 올랐다는 뜻이다.
‘허, 우리가 너무 안일했구나…….’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놈들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었으나, 마음만큼 육신이 따라 주지 못했다.
하나, 쉽사리 덤비지 못하는 연유는 단순히 무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너희들이 찾는 그 후개도 우리와 함께 있다.”
“그 말을 우리가 어찌 믿는단 말이냐!”
“이거면 되겠지.”
텅, 터더더덩.
가면 쓴 사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로들의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가 던진 것은 다름 아닌 후개인 공대복이 늘 몸에 지니고 다니던 봉이었다. 그것은 워낙 독특한 형상인 데다 공대복과 자주 마주할 기회가 있던 장로들이라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물건이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신물과 후개.
개방의 미래가 이름도 소속도 알지 못하는 적들의 손에 달린 것이다.
“선택해라. 이제부터 네놈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다. 이곳에서 장렬히 전사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편에 서서 함께 훗날을 도모하고, 개방을 이끌어 나갈 것인지를.”
편무량의 두 눈에서 새빨간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방주를 죽인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죽이지 못하는 상황이 너무 원통한 탓이다.
긴 침묵이 맴돌았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장로들 사이에서 몇 명이 앞으로 주춤거리며 나섰다. 그 사이에는 당당하게 걸어 나가는 음여랑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편무량이 두 눈을 질끈 감으며 탄성을 내질렀다.
“음여랑, 네가 기어코……!”
“편 장로. 아니, 편 오라버니. 이제 우리도 케케묵은 협만 따질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때가 되지 않았소? 이미 수십만 아니,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 우리 방도들 중에는 지금도 길거리에서 협이라는 이름 하에 아파도 치료 한번 받아 보지 못하고 죽어 나가는 아이들도 수두룩하오! 그놈의 협이, 무림맹이 우리에게 준 것이 대체 무엇이냔 말이오? 내 이 주야 전에도 그리 말했지 않았소? 나는 이미 암시를 한 것이었어.”
말을 잇는 음여랑의 눈에는 독기와 함께 물기가 맺혀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차갑게 돌아선 음여랑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편무량은 차마 그녀를 잡을 수 없었다.
“드디어 마음을 굳혔군. 화빙화(火氷花) 음여랑.”
가면 쓴 사내가 이미 음여랑을 잘 알고 있다는 듯 스쳐 가는 그녀의 귓가에 중얼거렸다.
“우리가 돌아서는 대신 개방의 입지는 확실하게 보장해 줘야 할 거요. 그렇지 않으면 나 역시도 가만히 있진 않을 테니.”
“그것은 주군께서 보장하시기로 말씀하셨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미 한 약조를 번복하시는 분은 아니니.”
“흥.”
아까와는 달리 달래는 듯한 목소리에 음여랑이 고개를 휙 돌렸다.
음여랑의 뒤를 이어 두 명의 장로가 붙었고, 이렇게 개방의 장로들이 절반으로 나뉘었다.
“……어찌하실 겁니까? 편 장로님.”
조용히 읊조리는 갈천노의 목소리에 편무량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차피 신물과 후개가 없다면 개방의 미래는 없었다.
‘어렵구나, 어려워. 결국 신의를 저버려야 하는가? 허어……!’
깊고 슬픈 탄식이 편무량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