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1화
第一章. 변심
“군대를 파견하라.”
지엄한 황제의 명이 떨어졌다.
명나라의 백성이라면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지상 최강의 명령이다.
이를 시작으로 황궁의 명을 받은 군병들이 중원의 곳곳에 배치되었고, 군병들이 도착한 각 현들은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기 바빴다.
그 문이 열리는 것은 오롯이 물자가 도착하는 순간뿐.
백성들에게까지 되도록 사는 현을 벗어나지 말라는 명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자칫 군병, 혹은 무인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면 도와줄 방도가 전혀 없기 때문에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더불어 가장 치안이 열약했던 호남성에 대한 소식이 황궁까지 전달되면서 가장 많은 군사가 배치되었다.
호남 주변의 상인들과 몇몇 세가들은 자신들을 무시한다며 속으론 불만을 품기도 했으나, 가장 먼저 꽁무니를 내뺐던 것이 자신들이라는 사실과 황제가 내린 명이기에 더더욱 겉으로 표출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보름이 흘렀다.
군대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중원은 혹독한 첫 번째 전쟁을 치러야 할 처지에 놓였다.
적은 혈교만이 아닌 본격적으로 시작된 장마도 포함되었다.
사실 장마를 적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했다.
자연재해인 만큼 그간 그들이 장마에 대비할 수 있는 것이라곤 미리 손을 봐 놨던 제방들을 한 번 더 점검하고, 황제가 직접 하늘에 제를 올리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몇 번의 반복된 제사로 하늘이 정성에 감복한 것인지 비구름이 물러나는 듯 보였다.
그 덕에 병력이 움직이는 데에는 수월했으나, 약 이 주야 전부터 비구름은 다시금 존재감을 거하게 내뿜기 시작했다.
각기 현에 도착한 군사들은 피의 전쟁을 치르기도 전에, 물과의 전쟁부터 치러야 할 기세였다.
하나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마음이기도 했다.
적에게도 그만큼의 피해가 가지 않을까라는 작은 희망이었다.
때마침, 하늘이 크게 굉음을 냈다.
콰르르르릉!
콰광!
쏴아아아-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이가 막사에 자리를 잡고 심각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너른 하늘을 가득 둘러싼 구름은 새카맣게 물들어 무거운 몸을 잔뜩 털어 내고 있었다.
곧, 그가 입을 열었다.
“이거…… 아무래도 비가 심상치 않게 오는군.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인가? 어찌 이리도 무심할 수 있단 말이냐? 허, 현령을 불러 둑을 재정비하라 이르라.”
“장군, 아마 내일까진 첫 번째 둑이 버텨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합니다.”
“같아서는 안 된다. 기필코 막아야지! 자칫하면 전쟁보다 비에 먼저 휩쓸려 갈 터. 그렇지 않아도 손이 바쁜 시기에 전쟁 준비에, 자연재해까지……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로구나. 허어.”
장군이라 불린 이의 얼굴에는 걱정이 잔뜩 묻어 있었다.
바쁜 것은 조정의 대신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가친척들을 안전한 곳으로 모시느라 혼이 쏙 빠질 만큼 정신없이 움직였다.
연이 긴밀하게 닿아 있던 무림의 문파, 세가들로부터 자세한 정보를 들은 대신들도 무림의 대전쟁이 암시된 이상 피해 가는 것은 무리라고 여긴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얼마 전부터 두세 차례 혈교와의 작은 전투가 벌어졌기에 그들의 움직임은 더더욱 기민(機敏)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라면 아직까지 큰 피해 없이 전투들이 마무리되었다는 점일 터다.
이렇게 일이 터지고 뒤늦게야 소식을 전해 들은 중소 상인들은 그제야 급하게 식량과 무기를 끌어모으느라 애를 썼지만 이미 물가는 치솟았고, 시중에 풀린 물량은 빠르게 부족해지고 있었다.
무인들은 물론, 사람이라면 누구든 잔뜩 긴장감에 움츠린.
그야말로 대혼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 * *
대별상단 소단주실.
똑똑-
“들어가겠습니다.”
서류에 집중하던 도중 문소리가 나자 유가량이 잠시 고개를 들었다.
가볍게 문을 두드리고 들어온 곡사무(曲使務)가 고개를 숙였다.
곡사무는 그의 아버지가 오랜 시간, 대별상단에서 총관의 일을 맡아 해 온 덕에 어릴 때부터 대별상단에서 자랐다.
유가량보다 열다섯 살 많은 형으로서 때로는 고민을 들어 주기도 하고, 외동아들인 그의 진짜 친형제처럼 함께 자라온 사람이었다.
그는 적당한 체구에 얼굴이 각이 진, 조금은 날카로운 인상을 지녔는데 그나마 약간 휘어진 눈매가 곡사무의 인상을 조금이나마 유하게 만들어 주었다.
곡사무가 잠시 고개를 든 그 틈으로 슬쩍 쳐다본 유가량의 얼굴은 여전히 잘생겼다.
평소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눈 밑이 퀭한 게 무척 힘들어 보였다.
유가량이 곡사무임을 확인한 후 다시 서류에 고개를 박고선 말을 이었다.
“물자 전달은 어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최근 비가 다시 거세졌다고 들었습니다만.”
서로 오랜 형제처럼 지내는 둘이지만, 사무적인 곳에서는 서로 존댓말을 사용했다.
“소단주님의 말씀대로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최대한 수로를 이용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남들이 들으면 홍수가 날 지경에 강은 위험하다며 말릴 테지만, 유가량의 생각은 달랐다.
그를 오랫동안 지켜봐 온 곡사무 역시도 그의 파격적인 의견을 말릴 생각은 딱히 없었다.
그렇게 한 덕에 오히려 이득을 보게 된 상황이다.
곡사무가 조금 놀란 듯한 눈빛으로 유가량에게 질의했다.
“한데 어찌 강을 사용하실 생각을 하셨습니까?”
“처음부터 배를 이용하면 적어도 홍수나 강물이 범람해도 물벼락이나 산사태에 물건을 전부 잃는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피해야 했을 테지만, 홍수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가까운 곳에 가는 것도 아니고 중원 곳곳에 뿌려져야 한다면 그편이 낫겠죠.”
말을 이어나가는 그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역시 소단주님이시구나.’
유가량의 말을 다 들은 사내가 흐뭇한 표정으로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훗날 자신들의 주인이 될 소단주, 유가량은 남들이 생각하는 그 이상을 본다.
때때로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몇 해 전 있었던 송운의 조금은 터무니없던 거래에 응한 것도 유가량의 판단이었다.
유호길도 반신반의하며 허락한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매진도 모자라 추가 수량을 받아야 할 만큼 어마어마한 수익을 얻었다.
결국 송운이 생산을 중단하면서 끝이 났지만, 그때 벌어 놓은 자금으로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잠시 휘청거릴 뻔한 위기를 쉽게 이겨 낼 수 있었다.
그 덕에 발돋움하여 더 큰 상가로 발전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제법 많은 일들이 유가량의 손을 걸쳐 대별상가에 큰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이제는 유호길도 유가량의 의견을 더욱 존중해서 듣게 되었다. =
그만큼 유가량은 아버지보다 더한 타고난 상인이었다.
하나, 그럼에도 이번의 거래에서는 조금 달랐다.
“이번 거래에서 아버지께서 생각보다 욕심을 덜 부리셔서 놀랐습니다.”
유가량이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말했다.
목소리에는 조금의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그런 그를 달래는 건 곡사무였다.
“아무래도 나라의 명이 걸린 중대사다 보니 내리신 판단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절반에 가까운 물량을 그 정도 선에서 끝내실 줄은…….”
유가량은 얼마 전 있었던 협상에 대해 떠올렸다.
황궁도 아닌 무림맹의 사람이 찾아왔다.
물론 송운에게 이미 귀띔으로 들은 사항이긴 하지만, 충분히 이익을 낸다면 더 낼 수 있는 거래 조건이었다.
모든 상인이 가장 최고로 치는 거래 상대는 당연히 황궁과 무림맹이다.
두 군데 모두 신용도가 높고, 속한 사람이 많기에 어마어마한 양을 사들이기 때문이다.
그중에 조금 더 우위를 따지자면 당연히 황궁일 테지만, 무림맹이라고 해서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황궁은 황제와 황실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기에 더욱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롭지만, 무림맹은 그나마 좀 더 수월하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해서 상인들이라면 어떻게든 연줄을 대려 하는 곳이 바로 이 두 곳이다.
그런 무림맹에서 내민 조건은 전쟁 자금을 대주는 대신 훗날 난세가 안정되면, 무림맹에서 원하는 분야의 삼분지 일에 해당하는 상권을 내주겠다는 것이었다.
삼분지 일이라 겉으로 별것 아닌 듯 보일지 몰라도 무림맹이 사들이는 양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양이다.
그래서 유가량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난세(亂世)일수록 상인은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더 큰돈을 벌 수 있다.
하나 자신의 의문에 유호길은 이렇게 답해 왔다.
“가량아, 상인에게도 덕(德)이 있는 법이니라. 물론 그것을 간과하고 상인으로서의 이득만 취하는 이들이 더 많으나, 이것은 단순히 무림 전쟁이 아니다. 그걸 아시기에 천자께서도 명을 내리신 것이지. 덕을 알아야 오래간단다. 적정선을 지켜야 훗날 내가 힘들 때 거둘 씨앗이 남아 있지 않겠느냐?”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유가량은 조금 충격이었다.
많은 걸 배우고 행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갈 길이 더 멀다는 생각을 일깨워 준 순간이기도 했다.
물론, 아직 아쉬움까지 감출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래요. 뭐, 운이도 고려해서 우릴 소개해 준 걸 테니, 그 마음을 배신할 수는 없죠.”
유가량이 조용히 고개를 주억인다.
그 모습에 곡사무의 입가에 가느다란 호선이 그려졌다.
“아무리 일이 중요하더라도 쉬엄쉬엄하십시오. 그러다 쓰러지시면 큰일입니다. 단주님께서도 바쁘신 와중에 쓰러지시면 이 많은 일을 제가 다 떠맡게 되지 않습니까?”
곡사무가 걱정스럽다는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말하자, 유가량이 크게 웃었다.
“하하! 아직은 돌도 씹어 먹을 나이 아닙니까? 너무 걱정 마십쇼. 이래 보여도 다 쉬어 가며 일하는 중입니다. 너무 쉬는 것 같아 걱정일 만큼이요.”
“흠, 알겠습니다. 꼭 그 말 지키셔야 합니다.”
마지막 말을 남긴 채 곡사무가 서둘러 방을 나섰다.
유가량에겐 쉬엄쉬엄하라고 말했지만, 정작 본인이 더욱 바빴기 때문이다.
“형님도 참…….”
그리 말하는 유가량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 * *
하늘에 높게 뜬 달이 실처럼 얇아진 것도 모자라 안개가 잔뜩 낀 어둡고 기괴한 밤.
누군가가 공이추의 누추한 거처에 기척을 내며 들어섰다.
이번엔 아예 알아 달라는 듯 대놓고 들어왔다.
하나, 오늘도 공이추의 몸은 굳게 닫힌 그의 마음처럼 벽을 향해 있었다.
“마음을 정하셨습니까? 이번엔 저와 함께 가시지요.”
“독한 놈.”
공이추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내저었다.
“방주야말로 참으로 독하십니다. 이렇게 간청을 드리는데도 어찌 이리 권주를 마다하신단 말입니까? 이렇게 되면 저도 더는 방도가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나는 죽어도 무림을 위해 죽을 것이래도. 그리고 이 한 몸 정도는 평생을 스스로 지키며 살아왔네. 배신까지 해 가며 누군가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 않아. 설령 그것이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일지라도 말이야.”
완강한 공이추의 말 속에는 천 년은 묵은 듯한 고집이 어려 있다.
침입자도 잘 안다.
그의 고집은 절대 못 꺾는다는 것을.
“……이다음에 우리가 만나면 정녕…… 적이 될 겁니다. 그래도…… 괜찮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