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0화
“제 여동생과 닮았거든요. 송 소저가. 라니……! 아니 어떻게 낯빛 한번 안 바뀌고 그런 말을 해?”
어제의 대련을 마지막으로 방으로 돌아온 지 만 하루가 꼬박 지났으나 송하는 여전히 이불을 팡팡 차기에 바빴다.
시간이 흐르면 나아지리라 생각했거늘 여전히, 아니 오히려 민망함과 부끄러움에 얼굴이 마치 불에 덴 듯 화끈거리면서도 가슴 한편이 시큰거렸다.
대체 자신은 뭘 기대하고 물어보았던 것일까?
‘날 위해서라는 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 거야? 설마 정말 그 말이 듣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스스로 자문자답 해 보았지만 몇 번을 되물어도 돌아오는 답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처음엔 부정으로, 부정에서 긍정으로 긍정에서 부정으로 무한 반복했다.
그렇게 밤새도록 부정해 보아도 결국 돌아오는 결과는 같다.
‘맞네, 했네. 했어. 내가…….’
쿵.
허공에서 이불과 함께 동동 구르던 발이 멈추며 힘없이 침상 위로 떨어졌다.
“하아…….”
송하의 자그맣고 붉은 입술 사이로 깊고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명백한 인정의 한숨이었다.
허공에 머무른 그녀의 사슴 같던 눈빛은 아련하고 당장이라도 툭 건들면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거짓말…… 대체 언제부터지?’
어릴 적부터 워낙 두 오빠의 동생 사랑이 각별하여 다른 사내들의 근처엔 가 보지도 못했던 송하다.
그런 자신이 지금 누군가에게 연정을 품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면서 믿기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건 처음으로 외간 남자(?)와 오랜 시간을 보내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를 휘휘 내저어도 봤다.
그럼에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는 건 황보운룡의 얼굴이 자꾸만 그녀의 머릿속을 맴돈다는 사실이었다.
웃는 얼굴, 멍한 표정, 걱정하는 표정, 심지어 냉정했던 그 날의 표정까지도 전부.
두근, 두근.
또다시 그 얼굴을 떠올리니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한다.
그래서 더 약이 올랐다.
“그럼 뭐해! 본인은 정작 나한테 관심도 없는데…… 치.”
송하의 고운 얼굴이 베갯속에 푹 파묻혔다.
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던 그녀의 십칠 년 인생 중 첫 쓰라림이었다.
* * *
한 젊은 사내의 방에 소리소문없이 누군가가 침입했다. 그 모습은 마치 연기와도 같아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어둠에 묻혔다.
하나, 단지 그것은 그의 방식일 뿐 방문(訪問)이라고 볼 수 있었다.
기척을 알아챈 젊은 사내가 자연스럽게 침입자를 향해 먼저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보낸 일은 어찌 되었지?”
“그것이…….”
“그것이?”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는 모습에 여지없이 젊은 사내가 안면에 불쾌함을 드러내자, 머뭇거리던 침입자가 입을 열었다.
“송구합니다. 다음번엔 꼭…….”
쨍그랑!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젊은 사내의 손에 들린 애꿎은 화병이 벽으로 날아가 깨져 사방으로 펴졌다.
“개방 방주가 우리 편을 들어야 앞으로의 일정이 수월해진다고 내 수십 번이나 말해 주지 않았던가? 나 따위의 말은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도 된다는 것이냐?!”
그의 말에 화가 날 대로 났는지 얼굴이 새빨개진 젊은 사내가 목울대에 핏줄을 세우고, 침까지 튀며 역정을 냈다.
괜한 화풀이를 하는 것이라 판단한 침입자는 더 입을 여는 것보다는 빠르게 고개를 땅에 처박는 쪽을 택했다.
쿵!
“그것은 절대 아닙니다.”
“내가 지금 그딴 말이나 들으려고 이 귀한 시간을 내어 네놈을 불러들인 줄 알아? 얼마나 바쁜 시기인지 모른단 말이냐? 그것에 우리의 생사가 달렸단 말이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그는 자신이 흥분했음을 느꼈는지 곧, 숨을 고르고 차분히 말을 이어 나갔다.
“후우, 후우. 두 번은 없다. 다음번엔 반드시 그 망할 방주 놈이 승낙했다는 소식만 들고 와야 할 것이야. 이만 나가 봐!”
젊은 사내의 말에 고개를 박았던 침입자가 몸을 일으켰다.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젓는 젊은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침입자는 속으로 끓어오르는 화를 삭여야 했다.
‘새파란 애송이 주제에…….’
애당초 자신이 선택한 것은 젊은 사내가 아니었다.
하나 그가 이 무리에서 하나의 직책을 떡하니 맡고 있으니 무시할 수도 없었다.
이 무리 속 수장의 혈육이라는 연유 하나로 얻은 자리다. 물론 그 자리를 꿰차기 위해 버린 것도 있었을 테지만 그런 것 따위는 침입자에겐 상관없는 일이다.
더구나 그 정도의 희생도 없이 여기까지 올라온 이는 흔치 않았다.
그런 주제에 그분을 향해 함부로 말하니, 화가 날 수밖에.
‘……참자, 조금만 더 참자. 곧 저자의 아래를 벗어날 수 있다.’
“아직도 안 나가고 뭐 하고 있는 거지?”
그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는 듯 날카로운 음성으로 노려보자, 침입자가 고개를 숙였다.
“나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침입자는 그야말로 연기처럼 사라졌다.
* * *
쿠르르르릉.
“……하늘이 참으로 맑지 못하구나.”
태화전.
황제의 근심 어린 목소리에 곁에 있던 송악이 한 술 거들었다.
“예, 폐하. 하나 백성들이 농사를 일구기에는 적절할 듯싶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마치 성이라도 난 듯 으르릉거리며 땅바닥에 굵은 빗줄기를 퍼부어도 이상하지 않은 하늘을 바라보며 송악 역시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지금까지는 딱 적당한 양이다.
하나 적당한 비는 농사에 도움이 될 테지만, 과하면 이 또한 한 해 농사를 쫄딱 망칠 수 있다.
더 나아가면 농사뿐만이 아니라 백성들이 큰 손해를 입을 수도 있다. 그것은 매년 겪고 있는 위기이지만 딱히 제방(堤防)을 쌓는 것을 제외하고는 큰 방도가 없는 실정이었다.
아무래도 올해도 하늘에 제(祭)를 올릴 준비를 해야 할 듯싶다.
이런저런 걱정이 앞서던 그때, 또다시 황제가 질의해 왔다.
“무림맹과의 이야기는 잘되어 가고 있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하오나 아무래도 지원금과 군대를 요청한 걸 보니 무림맹의 상황도 딱히 녹록지는 않은 듯싶습니다.”
“……그런가. 현재 우리 황궁의 상황은 어떠하던가?”
“당장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이 약 오만입니다. 다행히 병장기도 재작년에 모두 새것으로 교체하였으니 싸우는 데 큰 지장은 없을 것입니다, 폐하.”
이번엔 곁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평목단이 조용히 읊었다.
“작년이 풍작(豐作)인 덕에 식량은 넉넉합니다.”
이어 곧 송악이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의 말을 다 들은 황제의 근심 어린 표정이 그제야 조금 풀어지는 듯했다.
“하면, 군인들이 먹을 군량미는 충분하겠는가?”
“예. 폐하. 하나 급작스럽게 많은 군인이 이동한다면 백성들이 더욱 혼란에 빠질 것이 염려되는 바, 조금씩 나누어 각 중원에 배치하는 것은 어떠하실는지요.”
조심스러운 송악의 말에 황제가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도록 하게. 백성들이 평안해야 이 나라가 평안할 테니. 지금 당장 먹고 마시는 이 모든 것들도 결국 백성들의 피와 땀이 아니겠는가?”
당대 황제는 근엄하고 엄숙하였으나, 음성 속에는 진심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런 이가 작금 자신들이 모시는 황제이며 군주이다.
평목단과 송악의 안면에 절로 미소가 맴돌았다.
* * *
어두운 동굴 속, 유일한 사람으로 보이는 공손우경이 낮게 읊조리며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공손우경의 겉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음산함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대체 얼마 동안이나 밤을 새운 것일까.
공손우경의 눈은 새빨갛고 눈 밑은 짙게 그늘이 져 있었으며, 보름은 안 감은 것인지 머리는 온통 떡이 져, 산발이던 머리는 아예 굳어 있었다.
하나 그럼에도 그의 눈동자만은 놀랍도록 초롱초롱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스스스스-
음산한 기운이 깔리며 곧, 공손우경의 손끝에 놓인 강시 하나가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렇지…… 그렇지! 그렇지! 일어나라!”
벌떡!
계속해서 귀마병에 대해 연구하던 도중, 우연찮게 광독강시를 만드는 주술을 완성해 낸 것이다.
예기치 않은 뜻밖의 성과였다.
오늘은 바로 그 성과를 두 눈으로 확인하는 날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은 듯, 아니 죽은 채 바닥에 누워 있던 몸을 벌떡 일으킨 강시.
새빨간 눈에 온몸은 뻣뻣하지만, 시퍼렇게 날이 서린 손톱에는 독기가 흐르고 있었다.
명백히 일반적인 혈라강시와는 다른 외형이었다.
“그으으으…….”
혹여나 부정을 탈까 그는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오오! 해, 해낸 것인가?!’
하나 이도 잠시.
쿵!
서 있던 강시가 맥없이 픽 하고 쓰러졌다.
딱딱한 약품 처리가 된 몸인지라 바닥과 맞닿는 소리가 제법 육중했다. 동시에 숨죽여 지켜보던 공손우경의 눈빛에 실망이라는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에잉! 아니지, 아니야. 이제 시작인 게지. 드디어 이 공손우경의 손으로 광독강시라니! 으흐, 으흐흐흐!”
공손우경의 입에서는 계속해서 소름 돋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비록 아직까지도 귀마병의 비술을 알아내지는 못했으나, 자신의 오랜 숙원(宿怨)인 광독강시가 눈앞에서 깨어 움직이려는 역사적인 순간인 것이다.
한번 탄력을 받은 그는 여전히 지치는 줄 모르고 수도 없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덜컹!
쿵!
덜그럭!
쿵!
몇십 번을 더 반복했을까.
강시들은 죄다 눈을 뜬 지 얼마 되지 않아 몸에서 독이 전부 빠져나가거나, 혹은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흐음…… 이번엔 대체 무엇이 문제지?”
공손우경이 머리를 갸웃거리며 강시의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하나 강시의 몸 상태는 완벽했다.
약품 처리 과정에서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소리다.
결국 주술을 쓸 때 생긴 문제일 기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내렸다.
곧 공손우경이 두 손을 오므리며 입에서는 알 수 없는 주문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반이불사…….”
그러자 동시에 그의 손바닥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면서 강시의 몸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덜컹, 덜컹!
쿵! 쿵!
그러자 그의 주문에 맞춰 눈을 감고 있던 강시들의 몸이 조금씩 떨려 오더니 곧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하나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공손우경이다.
이다음이 진짜였다.
이미 이 과정은 수도 없이 겪어 봤기에 마음을 쉽사리 놓을 수 없었다.
꿀꺽.
‘설마……?! 이번에도 실패인가?’
잔뜩 긴장한 채 바짝 타는 목을 마른침으로 축이고 있을 무렵.
드디어 다섯 구의 강시 중, 단 한 구가 중심을 잃지도 않고 독이 빠져나가지도 않은 채 꼿꼿하게 서는 데 성공했다.
“크으으으어…….”
숨을 죽인 채 오랜 침묵을 유지한 공손우경은 약 반 시진이 더 흐르고 나서야 참았던 감탄사를 뱉어 냈다.
“……오, 오오!”
짝짝짝!
동시에 공손우경이 손뼉을 마주치며 마치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그 모습은 참으로 순수하여 악을 만들어 낸 이의 모습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거다, 이거였어! 광독강시라면 당장 귀마병까지는 아니더라도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교주께서 기뻐하시겠구나. 경사로다, 경사야. 흐흐흐! 내 피조물들이 드디어 빛을 볼 때로구나!”
마침내 혈라강시를 만드는 주술을 완성해 낸 공손우경의 눈빛이 마치 강시처럼 붉게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