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9화
말을 늘어놓기 시작한 땅딸보 사내의 표정은 처음과 달리 사뭇 진지해졌다.
“……그러니 저희는 황궁의 눈 역시도 조심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단순히 혈교만을 위해 손을 잡았다고 한들, 황궁과 무림맹의 관계가 호의적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훗날 또 어떤 관계로 맺어질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손이 늘어났으니 더 조심하셔야 합니다.”
제법 길던 그의 말이 끝나자 짧은 수염의 사내가 고개를 주억이며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예, 예. 어르신.”
“여기선 굳이 어르신이라 호칭할 필요 없다.”
“아, 예! 가주님!”
“그렇다고 그렇게 크게 부를 필요도 없다.”
“예, 예…….”
몇 번에 걸친 짧은 수염의 사내의 질책에 기가 죽은 땅딸보 사내는 고개를 땅에 푹 박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짧은 수염의 사내가 속으로 혀를 찼다.
‘쯔쯧, 저리 간이 작아서야…… 분명 머리는 좋은데 말이지.’
그런 성격 탓에 안타깝긴 해도 좋은 점은 분명했다.
이곳에 발을 들인 이상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리라.
실상 땅딸보 사내에겐 안타까워도 머리 좋은 놈이 간까지 크면 이래저래 귀찮아진다.
시키는 것만 잘하면 자신의 할 일을 다 하는 것이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짧은 수염의 사내기에, 조금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자신에게 해가 될 것은 없으니.
그저 몸을 쓰는 놈은 나서서 싸움을 주도하고, 머리를 쓰는 놈은 뒤에서 작전만 짜내면 된다는 게 그의 오래된 생각이었다.
‘하면 저놈 말대로라면 생각보다 꽤 복잡해지겠구나. 끙.’
하나 처음엔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았으나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할 만 해졌다는 생각이 드는 그였다.
“오늘은 이만하면 되었으니, 둘 다 나가 보도록 해라. 다음번에 나를 볼 때는 대책이 준비되어 있어야 할 게다. 알겠느냐?”
“예, 숙부님. 다시 보고가 올라오는 대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럼 저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가주님!”
둘 모두 방을 빠져나가기 무섭게 짧은 수염의 사내가 손가락을 맞부딪혔다.
딱!
그 소리에 누군가 빠르게 그의 뒤에 나타났다.
그림자처럼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스슥-
“네가 알아볼 게 있다.”
* * *
달빛조차 어두운, 묘두응 소리마저 들려오지 않는 깊은 밤.
개방 방주, 공이추(孔伊錐)의 거의 다 쓰러져 가는 방 안 곳곳에는 곰팡이가 얼룩덜룩했다.
스슥-
고요한 방 안에 검은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그가 방 안으로 들어와 공이추가 있는 곳까지 향하는 데에는 고작 다섯 걸음이 전부였다.
부스럭.
고요한 방문을 눈치챘음에도 곱게 누워 잠을 청하고 있던 공이추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몸을 벽으로 돌렸다.
침입자가 곧 익숙한 몸짓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방 안에는 몸을 누인 공이추를 제외하고는 술 한 동이가 전부였다.
어찌나 오래 입었는지 옷 듬성듬성 구멍이 뚫리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넝마를 걸친 채 등을 보이는 공이추.
개방의 방주로서 개방의 방칙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공이추를 바라보던 침입자의 안타까운 눈빛은 금세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침입자는 공이추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방주, 아직도 어느 쪽인지 선택하지 못하셨습니까?”
“……어째 한동안 안 찾아온다 했지. 이 시간에 왔으면 곱게 술이나 한잔 걸치고 돌아가시게. 이 거지가 자네에게 내줄 것이라곤 이 술 한 동이뿐이니.”
드드득.
공이추가 침입자를 향해 발로 자신의 옆에 놓인 술동이를 밀었다.
단호하게 내치는 그의 목소리에는 굳은 의지가 보였다. 그의 말에 침입자는 속으로 조용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이가 들었다면 정말 술 한 동이로 들었을 테지만, 침입자에겐 다른 의미로 들렸기 때문이다.
건네는 침입자의 말은 조곤조곤했다.
“방주, 자꾸 이리 나오시면 정말 재미없으십니다.”
“이미 인생은 즐길 만큼 살았네. 더는 재미없어도 될 때도 됐지. 인생을 재미로 살 나이는 지났으니, 재미는 아직 앞날이 창창한 자네나 실컷 즐기게. 자네와 내가 아직도 서로 함께 재미를 찾을 사이는 아닌 것 같구먼.”
덤덤한 그의 목소리에 침입자의 언성이 조금 커졌다.
“하오나 방주……!”
“나는…… 아니, 우리 개방은 언제나 무림이 어떠한 격변을 맞이하던 중립을 지켜왔네. 그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연유이며, 여태껏 버텨 온 힘이고, 해야 할 일이네. 게다가 이리 복잡한 세상에 중립을 지킬 이 하나쯤은 필요하지 않겠는가? 흘흘.”
공이추가 웃음을 흘렸다.
그 천하 태평한 모습은 여전히 침입자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진정해라.’
여기서 흥분하면 결국 공이추의 의도에 놀아나는 것밖엔 되지 않는다.
침입자가 곧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후…… 지금은 맹주의 편에 남으실지, 아니면 저희 편에 서실지. 정하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이젠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적이 아니면 친구인 세상이지요. 친구가 아니면 곧 죽음뿐입니다.”
“예끼! 이 사람아, 지금 날 농락하는 겐가? 아니면 혹시 겁박이라도 하는 겐가? 나는 그 누구의 편도 아니야. 굳이 따지자면 이 무림 전체의 편이겠지. 게다가 거지가 가진 것이라고는 이 거적 한 장 걸친 몸뚱이와 나불댈 수 있는 주둥이뿐이네.”
“그 두 개가 오랜 세월 몹시 중요한 역할을 해 왔지 않습니까.”
“자네가 그리 회유해 보아도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네. 애당초 처음부터 바뀔 건 없었어.”
공이추의 단단해 마지않은 말에 침입자가 한 번 더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간다.
“어찌 이리도 답답하십니까? 어차피 중립에 서 있는 자는 언제 어디로 가도 되는 자유의 몸입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미 작금의 무림맹은 끝났습니다. 이번 혈풍이 불고 나면 세대가 교체될 겁니다. 그걸 그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께서 어찌 이리 고집을 피우십니까?”
“그것은 곧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지.”
여태 나른하게 들려오던 공이추의 목소리에 날카로운 가시가 박혔다.
자신을 향한 일침임을 깨달은 침입자가 순간 발끈하며 외쳤다.
“스……!”
하나, 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공이추는 그의 말을 끊었다.
“어허! 두 번 다시는 그 말을 꺼내지 않기로 약조하지 않았던가? 자네는 이미 이곳을 떠났지. 개방의 방도들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하나 없어. 행여나 가진 것이 있어도 가는 길에 나누고, 뿌리는 것이 바로 이 개방의 방칙임을 잊었는가? 더는 할 말이 없네. 함께 술이나 한잔 걸칠 게 아니라면 이만 가시게나. 나름 바쁘신 몸이 아닌가.”
끝까지 공이추의 음성에는 확고한 의지만이 담겨 있다.
더는 말하기를 포기한 침입자가 공이추를 향해 고개를 슬쩍 숙였다.
“……조만간 다시 들리겠습니다. 부디 그때까진 방주의 마음이 바뀌길 바랍니다.”
“이토록 보고도 모르겠는가? 그럴 일은 없을 걸세. 아니, 없네.”
“참 너무하십니다.”
스륵-
마지막 말을 남긴 침입자가 처음 나타났을 때와 같이 조용히 사라졌다.
그러자 꿋꿋이 벽만 바라보고 있던 공이추가 조금 전까지 침입자가 머물렀던 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침입자가 서 있던 곳에는 온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부디 네가 마음을 돌렸으면 좋겠구나.’
주름이 자글자글한 그의 눈가에서 반짝이는 무언가 흘러내렸다.
* * *
같은 시각.
송운이 가부좌 자세를 한 채 곱게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떴다.
“후우.”
송운의 얼굴에는 많은 고민이 깃들어 있었다.
더불어 한 시진 동안 꿈쩍도 안 했던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송운의 머릿속에는 지난날 동안 만들어 낸 수많은 성좌들이 떠돌고 있었다.
‘머릿속이 정말 복잡하구나. 이것들을 어찌하면 하나로 엮을 수 있을까…….’
평소라면 수련 때문이겠거니 했을 테지만, 오늘은 어딘지 모르게 조금 달랐다.
송운 앞에 놓인 수많은 종이와 붓과 먹이 어지러이 뒹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송운이 고민하는 건 바로 반년 전부터 고민해 왔던 운양상단의 표사들에게 줄 무공이었다.
많은 이들이 배워야 하므로 익히는 기간이 오래 걸리지 않으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무공을 만들어야 했다.
여러모로 바쁘고 정신없는 나날이었지만, 이 일도 더는 미뤄 둘 수 없는 것이었기에 틈틈이 짬을 내어 만들고 있었다.
처음엔 이미 무림에 나와 있는 무공들을 추리려고 하였으나, 송운이 원하는 형식의 무공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도 같았다.
아니, 그런 무공이 있기는 할까? 라는 의문이 송운을 괴롭혔다.
세상 어느 무공이 빠르게 배울 수 있으면서도 강력할 수 있을까.
속성으로 익힐 수 있는 무공은 한계가 낮고 명확하며, 무공의 수준이 높고 깊으면 무재가 아니고서야 일류 고수까지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만 대략 십 년이다.
이 작업을 시작한 송운은 새삼스럽지만 다시 한번 중원 각지에 있는 크고 작은 문파들에게 경의(敬意)를 표했다.
아무리 익히기 쉬운 무공이라고 한들 만드는 것도 쉬운 것은 없었다.
흔히들 부르는 삼류 무공도 그 속엔 각자의 무리가 담겨 있는 것이다.
‘아무리 줄여도 오 년이다. 하나, 배우고 몸에 익혀,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데 걸리는 시간이 그 정도라면 충분히 오래 걸리는 것이다. 후…… 역시 무공을 직접 만들어 내는 것은 무리였나?’
더불어 많은 무공을 접할 수 없었던 탓에 한계가 있기도 했다.
기존에 만들었던 것들도 몸으로 직접 재현해 보니 쉽사리 해낼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아! 그래!”
송운의 머릿속에 문득 질풍신공을 창조해 냈던 때가 스쳐 지나갔다.
‘그래, 질풍무와 질풍각도 하나의 동작으로 같은 무공을 만들어 낼 수 있었지.’
왜 이렇게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을까?
물론 그것은 천의선천기공이 도와주었기 때문이지만, 이제는 그것을 완벽하게 익혔으니 그때를 떠올려 다른 무공들을 조합하면 새 무공을 창조해 낼 수도 있을 거라는 희망이 보였다.
송운이 급히 몇 가지 생각해 두었던 무공들을 다시 머릿속에서 분해하고, 조합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단시간에는 무리다. 그렇다고 더 늦어질 수는 없어. 이렇게 된 이상 기존에 있는 것을 조합해서 만드는 게 최고의 방법이야.’
기존의 동작에 점을 찍고, 선을 그리며 성좌를 만들어, 그것을 다시 재조합하고, 무리를 창조해 내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질풍신공이 아니던가?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고 나니 무언가 손에 잡힐 것 같기도 하여 마음이 크게 요동쳤다.
‘우선 상단전을 조금 더 개방시키고…….’
잠시 힘을 잃고 쳐졌던 송운의 두 눈이 다시 생기를 머금고 빛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