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7화
第八章. 성장
똑똑.
“아저씨, 저예요. 문 열어 주세요.”
조용하던 밤, 장원의 정문을 누군가가 두드린다.
그와 함께 들려오는 건 제법 익숙한 목소리였다.
이미 얼마 전에 서신을 받았기에 더더욱 의심할 필요도, 두 번 물을 것도 없었다.
끼익-
“오셨습니까?”
문지기가 급히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나니 보이는 건 익숙한 여인의 모습과, 반면 생소한 성인 남성의 모습이었다. 옅은 미소를 띤 남성은 여인과 약 다섯 발 떨어진 곳에서 그녀의 뒤를 지키고 서 있었다.
워낙 인심이 후한 곳인지라 하루에도 몇 번씩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 와 도움을 청했으나,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문지기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저분은 누구신지……?”
문지기의 날이 선 말에 여인이 말했다.
“여기까지 동행해 온 낭인이에요. 잠잘 방이랑 먹을 것 좀 내주세요. 아…… 조광 오라버니는요?”
바로 송하와 황보운룡이었다.
* * *
“도착하셨습니까?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양조광은 오랜만에 보는 송하를 향해 미소 지었다.
고개를 주억이는 송하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얼마 못 본 사이 더욱 성숙해진 듯해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송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예전 운양상단에 처음 왔을 때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음을 직감한 양조광이 조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자, 송하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생은 무슨, 잘 지냈어? 오라버니 덕분에 잠깐 큰오빠를 속이나 했는데…… 역시나 무리더라고.”
송하가 시무룩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싶은데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아 그리고 저 사람, 밀정(密偵)이야.”
“……콜록콜록!”
더불어 양조광은 송하의 뜬금없는 발언에 당혹스러웠는지 연달아 기침을 내뱉었다.
“오라버니가 생각하는 그런 이상한 밀정은 아니고…… 큰오빠가 나한테 붙인 밀정. 뭐, 이 정도의 설명이면 되려나? 덕분에 여기까지 안전하게 도착했네, 라고 오라버니가 큰오빠에게 대신 서신 좀 써 줄 수 있어? 나 좀 쉬고 싶어.”
유독 안전이라는 단어를 강조한 송하의 뜻을 곧바로 알아들은 양조광이 고개를 주억였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라진 송하를 대신하여 양조광이 황보운룡에게 향했다.
송하의 말대로라면 그녀가 안전하게 이곳까지 올 수 있도록 지켜 준 고마운 은인이니.
“저희 아가씨를 모셔다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방은 많으니 직접 고르시겠습니까? 원하신다면 며칠 더 묵으시다 가셔도 됩니다.”
양조광의 말에 황보운룡이 답했다.
“마땅히 갈 곳도 없는 처지에 그리 해 주신다면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황보운룡의 난데없는(?) 눈칫밥 생활이 시작되었다.
* * *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달이 지고.
이를 반복한 지도 어언 다섯 번째 되던 날.
“오늘도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러합니다.”
이젠 익숙한 듯 시녀가 고개를 숙인 후 발걸음을 틀었다.
‘……설마 그때 한 말 때문인가.’
황보운룡은 걸음을 돌리지 않고 방 앞에 머물렀다.
그 기간은 송하가 온종일 방 안에만 틀어박혀 나오지 않은 시간이기도 했다.
나올 때가 된 것도 같은데 그녀는 밥을 먹는 것도, 심지어는 씻는 것조차도 방 안에서 해결하는 중이었다. 그 때문에 송하가 온종일 멍하니 벽과의 대화를 일삼고 있다는 소문도 돌고 있었다.
도착하기 전까지 송하는 별다른 큰 변화가 없었다.
말수가 지나치게 줄어 버렸다는 것을 제외하고서는 말이다. 한데 운양상단이라는 곳에 도착한 뒤로는 얼굴은커녕 목소리조차 들을 수가 없다.
완벽하게 세상과 차단되어 버린 것이다.
그냥 가려고도 해 보았으나, 이상하게도 왠지 그냥 가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며칠 동안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더불어 딱히 갈 곳도 없다.
그러니 이런저런 마음으로 운양상단에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다.
생각을 마치고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황보운룡은 확신했다.
‘아니, 아무래도 맞는 것 같군. 내가 너무 심했던가…….’
괜스레 자책감과 미안함이 든 황보운룡은 결국 오늘도 운양상단을 떠나지 못한 채 자신이 묵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 * *
칠 주야를 꼬박 채운 날, 아침.
“오늘도 나오지 않았습니……”
끼익-
황보운룡이 하던 말을 멈추었다.
굳게 닫혀 도무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던 문이 드디어 열린 것이다.
입을 열려던 시녀 역시도 동시에 말을 멈추곤 고개를 숙인 후 발걸음을 틀었다. 아무 말도 듣지도 보지도 않겠다는 굳은 의지였다.
어째서인지 희열이 느껴지기도 한 순간.
단둘만이 남은 앞마당에서 송하과 황보운룡의 두 눈이 마주쳤다.
며칠 동안 바깥출입을 안 한 탓인지 창백해진 안면에, 새빨간 입술, 거기에 더욱 호리호리해진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가녀린 몸은 순간 황보운룡의 미안함을 더욱 가중시켰다.
“저…….”
“……그게.”
먼저 말을 꺼내려던 황보운룡과 살짝 늦은 송하의 말이 겹쳤다.
“먼저 말씀하시지요.”
“아뇨. 먼저 말씀하세요.”
“먼저 말씀하시는 게…….”
송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황보운룡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 단호한 모습에 이 이상은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황보운룡이 잠시 침묵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저 언제까지 기다려요?”
송하가 다시 말을 걸고 나서야 그의 입이 열렸다.
“며칠 전 일…… 은 미안합니다. 그렇게까지 단호하게 말하려던 것은 아닙니다. 단지, 무림의 세계에서 그만큼 검을 드는 건 위험한 일이니, 마음을 단단히 하셨으면 하는 마음에 말한 겁니다. 하나 그것이 주제넘은 참견이었다면, 해서 기분이 상하셨다면 정말 미안합니다.”
“저에게 미안하다고 하셨죠? 그럼 저랑 다시 대련해 주세요.”
송하가 말을 마친 황보운룡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얼굴은 창백할망정, 그녀의 눈빛과 목소리만큼은 기개가 흘러넘쳐 나왔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말인지라 황보운룡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이미 한번 오는 길에 제법 큰 부상을 입었고 정신적으로도 다친 셈이다.
한데 그러한 상황에 대련이라니.
마냥 받아 주기에는 무리라고 생각한 황보운룡이 이내 거절의 말을 내뱉었다.
“대련이라면 몸을 좀 회복하신 후에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나 그런 황보운룡의 만류에도 송하가 고개를 내저었다.
“저 지금 몹시 멀쩡해요. 얼굴이 창백한 건 며칠 동안 햇빛을 못 봐서 그런 거구요. 그러니까 지금 당장 저랑 대련해 줘요. 그러면 진짜 멀쩡해질 것 같아요.”
이미 얼마 길지 않은 시간이나마 송하의 고집을 몸으로 느낀 황보운룡이다. 만류한다고 들을 여인이 아니었다.
이에 황보운룡은 더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한 번 더 주억였다.
“하아…… 알겠습니다. 다만 그만큼 각오는 하셔야 할 겁니다.”
“황보 소협이야 말로요.”
송하가 대답하며 양손을 꼭 쥐었다.
순간 그 모습이 귀여워 보여 웃음이 터질 뻔한 황보운룡은 간신히 참았다.
“대련장으로 가요!”
“그럽시다.”
* * *
대련장으로 가는 길 내내 송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며칠 동안 보지 않았던 해를 보려니 눈이 부신 탓이리라.
더군다나 여름의 햇살이다.
은근슬쩍 송하의 얼굴로 내리쬐는 햇볕을 가려 주려던 그때, 금세 대련장에 도착했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송하의 눈이 강렬히 빛났다.
“한데, 송 소저. 검은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황보운룡은 오는 길에 지녔던 의문을 드디어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었다. 그 말에 송하가 자신의 등에 업혀 있던 보자기를 걷어 내었다.
펄럭!
그러자 그의 눈앞에 보인 것은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는 낯익은 검‘들’이었다.
“그건……?”
“맞아요. 비익검이에요.”
조금은 짧지만 두 자루의 검이 송하의 손에 들렸다.
웅- 웅-
송하의 손길이 닿자 마치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는 듯 비익검이 울어 대기 시작한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인정한 건가.’
지난 칠 주야간 방 안에 틀어박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큰일이 있었던 것은 확실한 듯했다.
“잘 부탁드려요. 황보 소협.”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송 소저.”
둘이 포권지례를 하고 인사를 나누기 무섭게 기수식 자세를 취한다.
스릉-
스르릉-
곧, 서로의 검날이 햇볕으로 인해 빛을 반짝거렸다.
“타핫!”
선제공격으로 나선 건 송하였다.
아직 익숙하지 않을 법하건만 송하가 다루는 비익검은 놀랍도록 자연스러웠다.
검 끝을 따라 비검과 익검이 서로를 인식하는 듯 빠르게 따라붙어 마치 하나의 검인 것처럼 움직였다.
이와 함께 송하의 손길은 부드럽고 빨랐다.
‘음, 지난번보다 더 빨라졌군.’
잠시 놀라움에 지켜보던 황보운룡의 등 뒤로 송하의 검이 날아들었다.
쌔액-!
그뿐이 아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검 끝이 날카로워졌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엔 적당히 넘기려 마음먹었던 황보운룡이 급 노선(路線)을 틀었다.
‘설마…… 그 짧은 시간 동안 마음을 다잡은 것인가?’
한동안은 검을 잡지 못할 거라 여겼다.
어린 나이에 여인의 몸으로는 제법 높은 경지에 올랐던 송하기에 조금 아쉽기도 하였으나, 목숨이 먼저다.
손속에 살(殺)을 두지 못하는 무인은 검을 들지 못한 일반인보다 더 위험하기 때문에 강경하게 나갈 수밖에 없었다.
송하의 반응에 어쩌면 앞으로 평생 검을 잡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데, 오히려 그사이 더 발전했다.
그것도 생전 처음 호흡을 함께하는 검들과 함께 말이다.
황보운룡의 입가에 가느다란 실선이 그려졌다.
이대로 설렁설렁하게 했다가는 진짜 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거, 제대로 상대해 드려야겠군요.’
본디 송하의 검은 약한 게 아니다.
그녀의 마음이 약했던 것일 뿐.
그때, 송하의 검이 황보운룡의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홱-!
타닷!
성급히 몸을 돌린 황보운룡이 제자리를 찾았다.
“절대 져 드리지 않을 겁니다.”
“대련을 해 달랬지, 져 달라 한 적 없어요! 하앗!”
송하의 손에 잡힌 비익검이 빠르게 다시 궤도를 바꿔 맹렬히 황보운룡을 추격했다.
쐐애액-!
마치 발이라도 달린 듯 바람을 가르며 파공음을 내뿜는다.
카가강-!
일전의 검과는 달리 살의를 머금은 송하의 검첨이 황보운룡의 목덜미를 노렸고, 이를 빠르게 빠져나갔다.
맞부딪힌 송하의 비검이 황보운룡의 검에 막혔지만 익검이 그 뒤를 받쳐 주자, 황보운룡은 자신의 공간감을 찾으며 뒤로 빠졌다.
‘앗……!’
송하가 아쉬움에 속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몇 번의 격렬한 움직임이 서로를 오가고 이내 송하의 검이 황보운룡의 어깨에 초근접 했을 무렵.
‘조금만…… 조금만 더!’
서걱!
황보운룡의 소매가 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