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전생-196화 (196/275)

제196화

순간 송운의 두 눈에 번쩍하고 광채가 어렸다.

예전의 송운이었다면 어림도 없었을, 꿈조차 꿔 보지 못했을 그러한 것들이 현실화되어 가고 있다. 무언가를 하나하나 이륙해 나갈 때마다 없었던 욕심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고 있었다.

더 나아가고 더 일궈 내면 그 끝엔 결국 가족을 지킬 수 있는 거대한 힘이 될 터.

해서 송운은 더더욱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세상으로부터 어떠한 위협으로부터든, 가족을 안전한 울타리에서 지켜 주고 싶었다.

그러한 마음은 송운을 끝없이 채찍질하고 증진시킬 수 있는 원천이기도 했다.

‘아마도 이것이 과거의 나와 또 다른 점이겠지.’

지켜야 하는 게 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힘인지, 가족을 지키려는 이들이 어찌하여 그리도 필사적이었는지 이번 생에서야말로 알아 나가고 있는 송운이었다.

곧 송운이 붓을 들어 이미 절반 가까이 적힌 책에 무언가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 * *

무림맹의 회의실에는 오랜만에 장로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이는 맹주 백능의 호출 때문이었다.

어떤 이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어떤 이는 덤덤한 표정으로, 각기 마음속에 다른 것들을 품은 채 한자리에 모였다.

장로들이 모두 모인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백능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이리 모두 모인 것 같구먼.”

그의 안면엔 비록 피로감이 조금 몰려 있었으나, 나이를 잊을 만큼 백능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기개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 누가 감히 그를 종심에 이른 자라고 본단 말인가?

이는 곧 백능의 무공 경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보통 젊은 시절 호령하던 무인들도 나이를 먹어 가며 힘과 무력이 줄어들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절정 고수는 지천명에 가장 고강하고 완벽한 무공의 정점을 찍는다면, 이순부터는 슬슬 무위에 힘이 빠지고 더욱 쉽게 지치기 시작한다.

무공의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여 대다수의 무인들은 이 나이를 가장 무서워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나이를 먹으면 무림행을 접고 조용히 홀연히 사라지는 이들도 제법 많았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스스로의 한계를 깨어 버린 이들이 존재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백능이었다.

반로환동이나 환골탈태를 하지 못하면 적어도 조화경.

조화경의 경지를 넘어선 자만이 나이에 구애받지 않는 무공 실력을 지닐 수 있다.

‘……여전히 굳건하다 이건가?’

백능이 입을 열자, 다들 수많던 표정을 마음속에 뒤로 숨긴 채 적당한 표정을 유지시킨다.

하나 그 찰나의 순간.

백능은 그들의 모습을 모두 잡아내었다.

표리부동한 얼굴들을 보며 백능이 속으로 혀를 찼다.

‘쯔쯧, 아직도 멀었구나. 멀었어.’

벌써 맹주로서 함께해 온 세월만 몇십 년이다.

한데도 아직 그들은 완벽하게 자신의 본 얼굴을 감추는 것에 능숙하지 못한 이가 대다수다. 나이를 먹어도 나잇값을 못 하는 장로들이 바로 무림맹을 지탱하는 실세라는 소리다.

‘다들 명예와 돈에 눈이 멀었으니…….’

오랫동안 무림맹을 지켜 왔고 지켜보았으나, 지금까지도 그들은 변한 게 없다. 늘 자신의 안위를 챙기는 것이 가장 큰 관심사이며, 더 높은 곳에 오른 이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기회를 노리는 자들이 태반이다.

그간 제갈염은 끊임없이 그를 설득해 왔다.

썩은 것은 잘라 내고 새로운 뿌리를 길러내야 하고, 새로운 인재를 뽑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말이다.

하나, 그들은 결국 험난했던 혈교와의 일차대전을 모두 함께 겪은 전우들이며, 아무리 미워도 작금의 무림맹을 함께 일구어낸 동지들이었다.

어찌 전장을 함께 누빈 이들을 쉽게 쳐 낼 수 있을까? ‘다시 한번 다 함께해내면 된다.’ 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그렇게 머뭇거린 세월이 어언 반백 년.

화합과 통합을 일구려 하였으나, 이는 결국 통하지 못했고 현실은 이 지경에 이르렀다.

이번 제안은 천자의 명이 먼저였으나, 그것을 가다듬어 말한 것은 송운이었다.

어쩌면 정말 이번 기회는 하늘이 준 기회일지도 모른다. 비록 그 기회가 무림맹의 위기이긴 할 터나, 위기는 곧 기회가 된다. 문득 그 말이 떠오른 백능이 속으로 쓰린 침을 삼켰다.

‘진즉 송운과 같은 인재의 별이 무림맹에도 떠올랐다면 좋았을 것을……. 결국 나 역시 다른 이들과 별다를 바 없지 않은가.’

하나 언제까지 후회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작금이라도 결정을 내린 만큼, 백능은 더 이상 그들을 우유부단하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의 굳은 의지처럼 백능의 단단한 주먹이 앞에 놓인 책상을 내리찍었다.

쿵-!

“다들 주목하게.”

그와 동시에 순식간에 어수선했던 주변이 정리되었다.

잠시 장로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백능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혈교를 먼저 칠걸세.”

“맹주님. 혈교를 먼저 치겠다는 게 무슨 뜻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가만히 앉아 있던 공동파의 장로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가만히 있던 몇몇 장로가 고개를 주억였다.

하나 백능은 이에 주저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네. 혈교가 날뛰는 꼴을 두고 보기보다는 먼저 나서서 그들을 타파하자는 이야기네. 언제까지 우리가 그들을 기다려 주어야 하는가? 이미 혈교와의 일차대전으로 그들의 저력은 충분히 알았지 않은가? 가만히 점잖은 척 무시하고 있던 대가로 얼마나 많은 무인들이 죽고, 많은 문파들이 축소되었던가. 그 이후로 여기까지 다시 무림맹을 일으키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는가?”

백능의 물음은 결국 다수의 침묵으로 돌아왔다.

그 말에 처음 물었던 공동파 장로의 입이 무겁게 닫혔다.

그도 그럴 것이 백능은 직접적으로 그 시대를 겪은 세대다.

실제로 현존하는 이들 중 혈교와의 일차대전을 겪은 사람은 백능을 포함하여 극소수다. 대다수가 당시 죽음을 맞이하였거나, 살아남았다 한들, 인간에게 주어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자연으로 돌아간 탓이다.

하나, 그들에게 남겨진 모든 것.

전쟁에 대한 참혹함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그 질의에 대해서는 쉽사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하나 이도 잠시.

곧 백능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서로가 서로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물어뜯기 시작했다.

“설마 이번에도 그들의 준비가 다 끝나고 나서야 막을 준비를 하자는 것은 아니겠지.”

이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종남파의 장로이자 제법 나이를 먹은 염자단(廉紫端)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물 흐르듯 흘린 말이었으나, 이에 하나라도 흘려듣지 않겠다는 듯 귀 기울이고 있던 점창파의 장로가 덥석 물었다.

“하면 혈교가 정녕 세력을 이끌고 전쟁을 일으킬 거라는 보장은 어디 있소이까? 그것부터 얘기를 나눠 보아야 하는 것 아니겠소이까?”

“허, 이 사람 보게. 만일 혈교가 움직이지 않을 거였다면 우리 전체를 단순히 겁쟁이로 만들 작정으로 나섰단 말인가? 그리되면 또 마교는 어찌하고? 당금 천마는 머리가 좋은 놈일세. 단순한 추측으로 무림맹에 손까지 내밀 멍청이가 아니란 말이네. 아직도 그렇게 적을 몰라서야 어찌 무림맹을 이끌 장로라 하겠는가.”

“뭐라?! 지금 내가 자리를 잘못 꿰차고 들어앉았다고 훈계라도 하는 겐가!”

서로 의견이 치열해지자 백능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만 기감을 끌어 올렸다. 눈은 더더욱 예리하게 빛이 나고 귀는 미세한 호흡 소리마저 잡아내는 데 바빴다.

이 자리는 단순히 혈교를 치느냐, 안 치느냐의 의견을 나누러 나온 장소가 아니다.

진짜는 이 속에 숨어 있을 배신자를 찾는 것이다.

가장 큰 가설은 ‘대놓고 반대를 하진 않을 것이다.’와 반대로 ‘자신을 숨기기 위해 더더욱 몸을 드러내 섞일 것이다.’ 두 가지였다.

만일 첫 번째대로라면 가장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개방의 장로가 될 터다.

하나, 그렇다고 하기엔 그간 무림맹의 역사에서 개방의 위치는 늘 중립에 서 있었다.

개방이라고 넘겨짚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 될 터다. 실제로 무림맹에서 가장 넓은 정보망을 지닌 문파가 바로 개방이다.

방도의 수도 압도적이었다.

‘어디냐. 어느 놈이 감히 혈교와 손을 잡은 것이냐?’

그때, 큰소리로 누군가 외쳤다.

“언제까지 겁만 먹고 있을 겝니까! 그것이 과연 무림맹입니까? 우리가 존재하는 연유는 오롯이 이 무림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그저 작금 자신의 위치를 지키느라 급급한 이들이 무림맹의 장로로서 자리를 꿰차고 있어 이토록 답답하니, 늘 무림맹이 같은 자리에서 맴도는 것이 아닙니까?!”

장로 중에서는 가장 나이가 어린 남궁세가의 두 장로 중 한 명, 남궁장호(南宮張浩)였다.

실상 오대세가 중 하나인 남궁세가인 만큼 무림맹 장로를 두 자리나 차지하고 있었으나, 이번처럼 목소리를 높여 발언한 것은 처음이었다.

때문에 오히려 이에 당황한 것은 남궁진혁이었다.

“허어, 어찌 이리 경거망동하는 게냐? 이 자리가 지금 무슨 자리인지 알고? 어서 장로들께 사죄드리거라.”

자리가 자리다 보니 남궁진혁이 크게 꾸짖진 못하였으나, 남궁장호는 남궁진혁의 첫째 아들이었다.

이 사실은 모르는 자가 없으니, 그의 어투에 크게 신경을 쓰는 이는 없었다.

“하오나……! 어찌 이러한 사항을 두고만 보라 하십니까?”

억울하다는 듯 남궁장호가 다시 말로 호소하였지만, 남궁진혁은 흔들리지 않고 그를 다시 다그쳤다.

“아직 나이가 어려 그러한 것이니 타 장로들의 양해를 바라오. 잘못이 있거든 이 못난 아비인 나의 잘못이오.”

“아, 아버지!”

“크, 크흠! 뭐, 남궁 장로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별다른 말은 하지 않겠소이다.”

“거, 뭐, 젊은 시절에 누구나 다 그러한 게 아니오? 나도 그랬던 때가 있었지. 흠흠!”

남궁진혁이 어리다고 말하였으나, 이미 남궁장호도 부인이 있고 자식을 둘이나 둔 가장이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도 불같은 성정이 줄어들지 않은 탓이리라. 이를 아는 장로들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차거나 별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초지일관하려 애썼다.

어찌 되었건 남궁세가는 무림맹에서 힘 있는 가문이다.

당금 크게 눈 밖에 나서 좋을 것은 없었다.

그러한 소란 사이로, 백능은 모두의 말에 귀 기울이며 더욱 기감을 끌어올려 그들을 지켜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다들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릴 때, 허공에서 남궁진혁과 백능의 시선이 스치듯 갈렸다.

서로의 의견이 격해질 무렵, 백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의지를 꺾을 생각은 없으니, 모두 정비에 나서게. 이는 비단 우리 무림맹의 일뿐만이 아니네. 이는 나의 의지만이 아닌, 황명이 있었네.”

“……?!”

백능의 급작스러운 발언에 모두가 놀라고 있을 때,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백능의 눈에 누군가의 행동이 주시 되었다.

평소라면 한마디라도 거들었을 테지만, 점잖게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듯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는 어딘지 모르게 시선 처리가 불안했다.

‘설마 네놈이냐?’

백능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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