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자네는 참 알면 알수록 놀랍구먼.”
말을 내뱉음에 있어 자신감에 차 있는 송운의 모습에 제갈염이 혀를 내둘렀다.
그 때문일까.
혹시나 되지 않을까라는 조바심 따위는 애초에 들지도 않았다.
“실력만 뛰어난 줄 알았더니 인맥도 이 정도일 줄이야. 하하. 무림맹이 참으로 적절한 시기에 좋은 인연을 둔 듯싶네. 마치 하늘이 무림맹을 돕고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말이네.”
제갈염이 말을 하면서도 속으로 쓴물을 삼켰다.
‘이를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쓰린 속을 움츠리느라 제갈염은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런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송운은 그저 스스로를 낮출 뿐이었다.
“과찬이십니다. 아직 일은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 칭찬을 하시려거든 훗날 하셔도 충분합니다. 지금은 넣어 두십시오. 더불어 무림에 닥친 시련을 함께 피해 가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잘났다.
참으로 잘나서 이리도 탐이 나는 인재가 있었던가?
‘자네는 참으로 탐이 나는 사람일세.’
제갈염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진심을 속으로 삼켰다. 처음에도 그랬으나, 송운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이렇게 뛰어난 인재를 가진 천자의 복이 부러웠다.
문, 무, 재력, 인맥,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사람이 아닌가?
이러한 시기에 당당히 재력을 보태 줄 수 있는 지인이있다고 말하는 송운의 목소리는 얼마나 당당한가.
‘역시 하늘의 뜻을 타고난, 천자의 사람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을 터다.
이제는 될 수만 있다면 정말 송운이 스스로 황궁을 벗어나 새롭게 재건될 무림맹에서 젊은 새 인재로서 도와주었으면 했다.
하나 그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대로 학사 가문으로 황궁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곧 식을 올릴 미래의 부인과 장인어른 모두 황궁의 무인으로서 오랜 시간 동안 궁을 지켜 왔다.
그런 이를 황궁에서 끌어낸다?
그것도 이 폭풍의 중심인 무림맹에?
‘말도 안 되는 소리.’
애당초 스스로가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말한다 한들 천자가 쉬이 자신의 사람을 내어줄 리가 없다.
과한 욕심이다.
가만히만 있어도 자연스럽게 관직을 꿰차고 한자리할 것이 분명하다.
한데 그 자리를 뭣 하러 마다할까.
물론 그러한 자리는 그간 지켜봐 온 송운의 성품상 거절할 가능성이 컸지만, 본인의 능력까지 뛰어나니 더는 건더기가 없다.
그걸 알기에 백능도 더는 말을 꺼내지 않은 것이다.
“총군사님?”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 제갈염을 향해 송운이 되물었다.
“아, 미안하네. 내 생각이 깊어져서 말이야. 사람을 앞에 세우고 실례했군.”
한번 생각에 빠지면 주위 사람의 유무를 떠나 혼자만의 성에 갇혀 버리는 제갈염의 오랜 버릇이다. 이미 제갈염과 제법 많은 만남으로 그의 행동에 익숙해진 송운이다.
“아닙니다. 머리가 복잡하실 만합니다. 되도록 긴 싸움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네. 언제나 전쟁은 길어져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지. 폐하께서도 근심이 크시겠구먼.”
“그것은 총군사님과 맹주님께서도 마찬가지 아니십니까?”
송운의 허를 찌르는 말에 제갈염이 안면에 고소를 머금었다.
“그래. 지금 이 시기에 사실을 알면서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을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것도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럼,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질 것 같아 빨리빨리 움직여야 할 것 같군요. 조만간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도록 하게. 이래 보여도 나도 그다지 한가한 사람은 아니니, 하하.”
끼익-
탁.
송운이 방안을 나가고 나서야 제갈염이 여전히 쓰린 입맛을 다셨다.
‘이렇게 된 이상 황보운룡이라도 손에 잡혀 주었으면 좋으련만…….’
하나 황보운룡도 맹주인 백능의 권주마저 거절한 상태다.
더불어 황보세가의 일은 제갈염 역시도 안타깝게 생각하는바.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는 입장이었다.
무엇하나 마음 따르는 대로 도와주질 않으니 무심한 하늘이 야속할 뿐이다.
아니, 언제는 하늘이 자신의 말을 들어 주기나 했던가?
“……오늘따라 차 맛이 쓰구나.”
송운이 나가고 나서야 들어온 시녀가 제갈염을 향해 물었다.
“차를 다시 올릴까요?”
“아니다. 그보다는 맹주님을 찾아뵈어야겠다.”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총군사님.”
* * *
“최근 무림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너도 느꼈구나. 나도 느끼던 차다.”
매영령이 초조한 듯 엄지손톱을 지근지근 깨물었다.
길고 가늘던 손톱이 이에 갈려 뭉개진다.
마치 당금 매영령의 마음처럼.
자신에 대해서 철저한 그녀로서는 그것이 겉으로 내비칠 수 있는 최상의 불안함이었다.
이를 알기에 곁에서 지켜보던 주하의 입장에서는 애가 탔다.
무엇이 이 여인을 이리도 불안하게 하는가.
오랜 세월 동안 그녀의 곁에서 지켜본 결과로는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닐 거라는 추측이 들었다.
“아무래도 전쟁에 대비해야겠구나.”
그때, 매영령의 입에서 나온 말은 주하를 놀라게 하기엔 충분했다.
“전쟁이라 하심은……?”
“우리가 설마 하며 미뤄 왔던 그 일 말이다. 어제 도착한 송 대협의 서신엔 곧 무림에 피바람이 불 것이라 하였어.”
매영령의 두 눈에 불안감이 내비쳤다.
좀처럼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나 그와는 달리 그녀의 머릿속은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날 것이며 이에 대비하라…….’
이미 주변의 정세를 읽고 있던 매영령도 느끼고 있는 바였다.
비록 하북성 내의 정보이긴 하나, 이미 매영령의 오래된 직감으로서도 경고를 내리고 있었다.
다만 확신 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만큼 이번 일은 위험하며, 조심스러웠다.
너무 거대하고 현실감이 떨어져서, 절대로 의심할 리 없는 자신의 정보마저도 의심하게 이르는 수준인 것이다.
연이은 충격이었다.
‘혈교라니……. 그들이 아직까지 실존해 있었다니.’
처음이다.
매영령의 길고 가는 두 손끝이 잘게 떨려 온다.
그만큼 무섭고, 불안했다.
무림에서 크고 작은 방파, 혹은 문파끼리의 싸움은 늘 있었다.
지금도 길거리에서는 서로의 이권(利權)을 위해, 방파끼리의 싸움이 지속되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다.
하나 이것은 그저 작은 집안싸움이 아니다.
그들이 삶을 일구고 살아가고 있는 이 중원에서 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어야 할 정도로 크고 거대한 싸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더욱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죽어 나갈 것이다.
적어도 매영령이 아는 무림인들의 전쟁은 그랬다.
그녀 역시도 무림인들의 전쟁에 휘말려 부모를 잃었다. 비록 그 사건은 더 커지기 전, 무림맹이 나서 중재를 하는 탓에 사그라졌으나, 이미 피해를 입은 이들의 억울함은 달랠 길이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뼈저리게 알 수 있다.
‘더더구나 상대는 혈교야.’
이미 소규모 형태로 치고 빠지는 혈교의 전략으로 인해 피해 입은 마을이 많다. 한데 혈교가 본격적으로 전쟁을 일으킨다면 그 피해는 얼마나 무지막지할까.
눈으로 굳이 확인하려 하지 않아도 매영령의 눈앞에 자연스레 그려졌다.
절로 귓가엔 아비의 외침과 어미의 비명 소리.
아이들의 절규가 들려왔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구나.”
“예?”
놀란 주하가 되물었으나, 매영령이 고개를 내젓는다.
그러곤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다, 아니야. 이럴 때가 아니다. 정보를 들었으면 사용할 줄 알아야지. 우선은 물자를 단단히 확보해야겠다. 거래를 트던 상단들에게서 생필품 위주로 넉넉히 쟁여 두거라. 양은 세 배, 아니 네 배도 좋으니 불리도록 하고. 그만큼의 거래에도 응하는 이에게는 실수인 척 이야기를 흘려라.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굳이 말할 필요 없어. 한동안 화령각에 오는 이들에게 더 귀 기울이도록 하고. 난 아무래도 그분을 만나 뵈러 다녀와야겠구나.”
“그분이시라면…….”
당금 시기에 그녀가 만나러 가야 할 사람은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매영령과 눈이 마주친 주하가 곧바로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곧 준비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주하가 사라지자 매영령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아, 부디 큰 화는 피해 가야 할 터인데…….’
* * *
방으로 돌아온 송운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대별상단.
서로가 거리가 제법 있다 보니 평여현을 떠나온 이후로는 얼굴 볼 일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몇 해 전 약을 팔기 위해 서로 연락을 취하였고, 약혼식에서 얼굴을 본 것이 마지막이다.
하나 그럼에도 송운은 그의 지원을 확정했다.
이미 단단히 굳어진 우정도 우정이나, 그는 상인이다.
자성(自性)이 뼛속까지 상인인 자가 이런 기회를 내쳐 버릴 리 만무하다.
‘어차피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다.’
혈교가 전쟁을 선포한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지금은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자원 전쟁이다.
그러한 상황에 이런 큰 거래를 마다할 상인은 없다. 어차피 벌어질 전쟁이라면 대비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돈을 대 주는 것도 아니다.
훗날을 도모하기 위한, 확실한 보증이 될 수 있는 무림맹과의 거래를 내던질 리가 있을까?
‘가능성이 있어도 희박하지.’
이미 혈교와의 일차대전을 겪으면서도 무림맹은 건재함을 몸소 보여 주지 않았던가.
사실 이번 거래를 전부 운양상단에서 맡는다면 지금보다 몸집을 두 배로 불리는 것도 충분히 현실이 될 수 있다. 그러한 연유로 욕심대로라면 조금 거래 조건을 하향시키더라도 운양상단에게 모두 맡기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나 아직은 대별상가에 비하면 운양상단은 이러저러한 많은 면에서 모자란 감이 컸다.
크기도, 무인도, 현금 보유량도 모든 점에서 말이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제 욕심을 불리기 위해 그런 결단을 내린다면 전쟁의 승패에 누를 끼치게 될 터.
송운이 잠시 사욕에 마음이 흔들릴 때, 예전에 책에서 읽었던 글귀가 떠올랐다.
‘남을 이기려는 사람은 먼저 자기 욕심부터 물리치라 하였지. 늘 욕심에서 사단이 나는 것이니.’
많은 무인과 백성들의 사활이 걸린 전쟁이다.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
이래저래 많이 아쉽긴 하였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세워진 시간에 비해 단시간 동안 이 정도로 커 준 것만 해도 기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하여 작금 아쉬운 것이 바로 무인이었다.
이미 운양상단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부터 송운은 늘 이 점을 고민했다. 대별상가는 자체적으로 키워 낸 무인들이 표사의 주류를 이룬다.
아니, 대별상가뿐만이 아닌 대다수 몸집이 큰 상인들은 이것을 중요시 여긴다.
‘이미 나온 결과가 모든 걸 보여 주고 있지. 표사를 구하기만 해서는 상단이 이 이상 크는 건 힘들다고 보면 된다.’
이미 무인이 되어 자신의 무를 구축한 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상단에서 키워 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비로소 상단의 진짜 인력이 되고, 단단하게 자리를 굳힌다.
이것을 깨닫고 약 반년 전부터 송운은 어떻게 하면 어렵지 않으면서도 기초가 단단한 무공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해 왔다.
지금은 여러 가지로 애매한 시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더 늦어서도 안 된다.
‘다음엔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운양상단이 해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