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전생-191화 (191/275)

제191화

그의 말에 백능이 아주 미세하게 눈동자가 흔들렸다.

‘음, 역시 알고 있는 것인가.’

송운이 마지막에 한 말은 백능의 허를 정확히 찔렀다.

아니, 무림맹 전체를 향해 찌른 것이다.

백능이 쓰린 속으로 고소를 머금었다.

제법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잘 막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송운의 입에서 흘러나오니 대꾸할 말이 없었다.

백능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긴 했다.

다만 알면서도 시기가 좋지 못하다 판단하여 미뤄 두고 있었을 뿐.

혈교의 일에 어쩌면 무림맹의 일부가 개입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차다.

더불어 얼마 전 혈교인 줄 알았던 사건의 보고를 듣고 나니 점점 의심이 짙어지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남의 손을 빌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로서도, 작금의 상황에는 썩은 가지를 쳐 내기 위해선 필히 한 손이라도 더 거들어 줄 새싹이 필요했다.

해서 일전에 내린 결정이 천하무림대회였으나, 이조차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했다.

적당한 실력을 지닌 이들은 제법 보였지만, 그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 생각을 다시 떠올리자 백능의 입안에 가시가 돋친 것처럼 떨떠름했다.

우선 송운을 제외하고는 크게 눈에 띄는 무인이 거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던 백능에게도 조금 충격이었다. 준우승을 거머쥔 황보운룡을 회유해 보려 하였으나 이조차 쉽지 않았다.

황보세가의 참사는 예전에 보고를 통해 이미 그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산동성(山東省)의 성도인 제남(齊南) 일대를 호령하던 황보세가는 한때 그 가세(家勢)가 오대세가에서도 손을 꼽을 만큼 뛰어났다.

다만, 타 세가들과 다른 게 있다면 많은 인원보다는 조금 적은 인원으로도 개개인의 무력이 인상적이었던 황보세가다.

한데 그것이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혈교는 외공 위주의 뛰어난 무공을 익힌 그들의 육신을 탐했다.

하여 혈교는 심기일전하여 전력을 퍼부었다.

산동성은 무림맹과 거리가 멀었고, 무림맹 역시 고전하고 있던 터라 도와줄 수 있는 건 황보세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제갈세가뿐이었다.

하나, 무력이 약한 제갈세가로서는 그들이 가장 자신 있어 했던 기문진법(奇門陳法)으로 적의 진영을 교란시키는 것이 최선이었다.

한데 그들 대부분의 적은 이미 생명을 잃고 명령만 좇는 강시였으니, 진법이 통했을 리 없다.

그 대단한 제갈세가의 기문진법 역시 강시의 돌격 앞에 무너진 것이다.

결국 제갈세가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조금의 희망조차 무너지니, 처음엔 꿋꿋이 버텨내던 황보세가도 사방에서 시산시해(屍山屍海)를 이루며 쏟아지는 강시 무리를 막는 건 무리였다.

결국 봉문에 들어갈 만큼 몰락 직전의 길을 걸었다.

그 뒤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해 나가고 있던 황보세가가 몇 해 전 신분을 알 수 없는 이들에게 당해 멸문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황보세가의 무공을 완전히 잃었다고 생각했거늘…….’

그런 황보세가의 마지막 핏줄이 천하 무림 대회에 나타났다.

그것도 꽤나 고강한 수준의 무위를 지닌 채.

피는 못 속인다는 말처럼, 황보운룡의 무위는 높았다.

기껏해야 이제 겨우 약관에 들어섰을까 말까 한 나이였다.

대회가 끝나고 백능은 그를 회유하려 하였으나, 그는 스스로 어디에도 속하는 것을 거부했다.

황보세가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은연중에 백능의 마음속에 잠식하고 있던 차였던 데다 본인이 싫다는데 강요를 할 도리도 없었다.

이런 막연하기만 한 시기에 송운이 먼저 패를 꺼내 들었다.

이는 힘을 보태어 주겠다는 것과도 다를 바가 없다. 어차피 혈교를 타파해 내기 위해서라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일 테지만 나쁠 것이 없다.

‘정녕 무림맹을 재정비할 시기가 온 것인가.’

그간 손을 쓰지 않고 묻어 두었던 연유 중 하나는 더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화로운 세상을 원했고, 그것을 위해 폭력보다는 무림맹을 결속시킬 방법을 찾아 헤맸지만, 결국 찾지 못하였다.

한데 정녕 그들이 혈교와 손을 잡았다면?

이는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하였던 참담한 일이다.

정파의 무인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협을 버리고 혈교와 손을 잡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세간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결국 자신의 알량한 마음 때문에 이 지경까지 온 것이라 생각하니, 머리가 아찔해졌다.

‘아니, 전화위복이라 했던가.’

어쩌면 이번이 무림맹을 개편할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백능의 마음을 조금씩이나마 움직였다.

‘송운의 실력은 믿을 만하다.’

이번 천하 무림 대회를 통해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송운의 무위를 직접 눈으로 보았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송운의 진가를 알아보는 덴 충분했다.

소문은 결코 와전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의 무위는 뛰어났으니.

어쩌면 아직 실력의 절반도 드러내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그가 황궁에 속한, 천자의 사람이기에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 여겼거늘 송운이 먼저 나서 준다?

더는 거절 할 이유가 없었다.

오랜 시간 생각에 잠겼던 백능의 입이 열렸다.

“내 조만간 총군사를 통해 연락을 넣도록 하겠소이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맹주님.”

백능의 두 눈에 순간 이채가 비쳤다.

* * *

백능과의 길었던 대담(對談)이 끝이 났다.

맹주의 집무실에서 나오며 송운이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동시에 시원하고 맑은 공기가 복잡한 그의 머리를 식혀 주었다.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상황인 만큼, 그가 쉽게 답을 내놓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탓이다.

황제의 명인 만큼 거절하진 못할 테지만, 그만큼 불쾌함을 드러낼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했다.

한데, 그저 진중한 모습으로 자신의 말을 듣고 있던 백능이 마지막 단어에 반응했다.

이는 필히 그도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뜻이리라.

물론 혈교를 잡기 위한 동맹은 그렇다고 쳐도, 무림맹 내부의 일을 꺼낸 것은 송운으로서도 도박에 가까웠다.

어떤 수장이, 자신이 이끄는 단체의 썩은 살을 남에게 보이고, 인정하려 할까.

하나 백능은 한참의 고민 끝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곧 연락을 넣겠다는 답을 주었다.

이는 분명, 나쁘지 않은 답이다.

‘이로서…… 그 소문에 대한 가능성도 조금 더 올라간 셈이군.’

송운이 도박임을 알면서도 말을 꺼낸 건 얼마 전, 조사에 나섰던 천조회에게서 썩 유쾌하지 못한 정보가 들려온 탓이었다.

제법 명망 있는 세가와 문파들의 깊숙한 곳의 정보까지 들여다보는 것이 가능해진 천조회였다.

이번에 양조광 납치 사건으로 운양상단의 활동 범위가 커지면서 자금이 뒤를 받쳐 주니, 부담 역시 크게 던 상태였다.

하여 이제는 양보다는 더욱 질 높은 정보를 얻기 시작한 천조회가 제법 묵직한 정보를 물어 온 것이다.

‘무림맹 내부에 적이 있다니……. 이 정보를 생각하면 그간 혈교가 뱀처럼 빠르게 빠져나갔던 것이 모두 설명이 된다. 정말 이번 일은 뭔가 단단히 꼬였다는 건 정확히 알겠군. 정말 골치 아픈 싸움이 되겠어.’

송운이 좌우로 머리를 내저었다.

* * *

백능은 송운이 방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제갈염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좀 전에 송 소협이 다녀갔다 들었습니다.”

“맞네.”

제갈염의 말에 백능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곤 주변의 기운을 움직이기 시작하니, 곧 백능과 제갈염 주변으로 투명한 막이 생겨났다. 그 주변을 중심으로 소음이 새어 나가지도 바깥의 소리가 들려오지도 않는다.

이는 백능이 기파(氣波)를 활용한 막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갈염 역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완전히 소음이 차단된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백능이 그제야 무겁게 닫혔던 입을 열었다.

“총군사, 아무래도 이제는 움직일 때가 된 것 같네.”

“맹주님 그 말씀은……?”

“송운, 그가 먼저 제안한 일이네. 뭔가 눈치를 채긴 했지만, 그도 아직 확신은 두지 못한 것 같더군. 하나, 그쪽에서 그렇게 나와 준다면 우리라고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백능의 말에 제갈염이 고개를 주억였다.

“……결국 결단을 내리셨군요. 하면 쥐새끼를 잡을 덫을 놓아야겠지요.”

벡능의 말에 제갈염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마치 모든 준비를 이미 끝내 두었다는 듯.

“그렇지. 먼저 혈교를 잡기 위해 움직인다는 선언을 내리게. 만일 정말 놈들이 혈교와 손을 잡았다면, 반응이 있을 테지. 내가 이렇게 쉽게 움직일 거라 생각하지 못하였을 테니 말이야.”

제갈염이 차분히 고개를 주억였다.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저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한데, 시간이 지날수록 어쩌면 백능이 자리에 내려오기 전까지 들추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던 제갈염이다.

그런 백능이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움직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드디어 구더기가 들끓고, 썩은 내가 진동하던 이 무림맹을 뒤집어엎을 때가 온 것이다.

‘이는 필시 송운이 무언가 패를 던진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맹주인 백능이 마음을 먹은 만큼 진정 무림맹의 개혁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지금이 아니면,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이 더 걸릴지 몰랐다.

아니, 그 전에 욕심에 혈안이 된 놈들에게 무림맹이 먹힐지도 몰랐다.

‘적기로구나.’

제갈염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 * *

똑똑-

“숙부님, 접니다.”

“들어오너라.”

“백능이 조만간 움직일 것 같습니다.”

“……뭐라!?”

젊은 사내의 말에 짧은 수염의 사내가 놀란 듯 몸을 움찔거렸다.

그의 눈빛에는 놀라움과 동시에 어처구니없다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영감탱이가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정말 의외로군…… 허어!’

여태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짧은 수염의 사내의 반응에, 되레 더 놀란 쪽은 젊은 사내였다.

“흐으…… 무언가 변수가 생긴 것은 분명하구나.”

금세 마음을 가다듬은 그가 자신의 짧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변수라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평소라면 인자하게 설명해 줬을 짧은 수염 사내였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어허! 그것은 네가 찾아야지! 이 숙부가 매번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놈이 예상 밖의 행동을 보였으니, 우리도 머리를 잘 굴려야 할 것이야.”

차분히 말을 마쳤으나, 그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파였다.

잘 있던 뒤통수가 얼얼해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예정대로 잘 가고 있던 마차가 길을 벗어나 보이지 않는 숲속으로 들어선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맹주, 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게요?’

짧은 수염 사내의 굳게 쥔 주먹이 떨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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