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0화
송하가 무림맹을 떠난 지 칠 주야하고도 삼 주야가 더 흘렀다.
오늘도 어김없이 무공 수련을 마치고 돌아온 송운에게 평서란이 수건과 함께 하얀 서신을 건넨다.
“아가씨께서 곧 운양상단에 도착할 거라는 서신이에요, 가가.”
평서란의 말에 놀란 듯 송운이 재차 물었다.
“정말이오?”
“후후, 네. 분명 그리 적혀 있었어요.”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구려. 마음을 바꾼 것인가? 쉽게 마음 바꿀 아이는 아닌데…….”
순간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찌 되었건 다행이오. 송하에게는 미안하지만, 세상이 흉흉하니 되도록 조금이라도 안전한 곳에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구려.”
“당연히 그러시겠죠. 동생의 일이잖아요. 다음에 무림이 더 안전해지고 나면 아가씨와 함께 강호행을 약속하셨으니 그때 함께해요.”
“그래도 늘 이 아이에게 강요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보오.”
“시기가 시기이니까요.”
평서란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송운을 바라봤다. 송운이라고 어찌 동생과 함께하고 싶지 않을까.
하나, 만일 자신에게도 동생이 있었다면 같은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말 그대로 어쩔 수 없는 사항이니 말이다.
“아, 그리고…… 폐하께서도 서신을 보내오셨어요.”
“폐하께서 말이오?”
평서란이 품속에서 하나의 서신을 더 꺼내 들었다.
“운 가가를 단주로, 그리고 저를 부단주로 무림맹과 합의를 걸쳐 혈교의 타파에 힘쓰도록 하라는 어지예요.”
송운이 곧 서신을 펼쳐 들었다.
황금색이 화려하게 수 놓인 종이에 황제를 뜻하는 인이 붉게 박혀 있었다.
“네. 갈수록 민심이 피폐해지니, 아무래도 무림맹과 손을 잡고 직접 나서 달라는 말씀이신 듯해요.”
“음…… 찾든 못 찾든 우선은 성난 민심을 잠재울 조치가 필요하다는 뜻이구려.”
송운의 말에 평서란이 고개를 주억였다.
“아무래도 시간은 점점 지나고 있는데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조정에서도 점점 이야기가 나오나 봐요.”
“황명이 내려온 이상 빠른 시일 내에 맹주를 만나 어찌해야 할지 이야기를 해 봐야겠소.”
“제가 미리 맹에 언질을 넣어 둘게요.”
“아, 그리해 주겠소? 그나저나 정말 놈들이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군. 지난번 습격 사건 이후로는 모습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있으니……. 아직까지도 별다른 소식이 없다는 게 더 불안하구려. 일전에는 일부러 우릴 교란하기 위한 작전을 펼친 것 같기도 하고, 놈들 특유의 그 비릿한 느낌이 없었단 말이지.”
송운은 머리가 아파져 오는지 미간이 찌푸려진 채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런 시기에 섣불리 결정을 내리는 것도 그다지 좋은 수는 아니다.’
천조회에게 섬서와 북경 일대를 중심으로 정보를 조사해 달라 말했지만, 아직까진 별다른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황보운룡의 사연을 들은 후, 오랫동안 멈추다시피 했던 흑야의 사건도 재조사를 시작했으나, 그조차도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하긴 가장 최근이라 해 봤자 몇 해 전의 일이니 증거나 정보가 남아 있을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지만…… 아쉽군.’
송운이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들이 활동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으니, 실마리조차 찾기가 어려웠다.
‘정녕 흑야는 완전히 사라진 것인가.’
검은 복면인과의 싸움 이후로 벌써 몇 해가 지났다.
아직까지 무림에 그들의 흔적이 눈곱만큼도 나타나지 않는 걸 보면 완전히 그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한데,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어딘지 모르게 두 집단 사이 닮은 구석이 있었다.
양측 다 은밀하고 실마리조차 남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혹, 흑야와 혈교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도 드는구려. 후우…… 지나친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말이오.”
송운이 허탈하게 내뱉은 말에, 평서란이 고개를 주억였다.
“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간 왜 그 생각을 못했죠?”
평서란의 말에 송운이 고개를 주억인다.
“란 매조차 그리 생각한다면 역시 흑야 쪽도 아무래도 내가 직접 나서서 찾아봐야 할 것 같소.”
“괜찮으시겠어요?”
“어차피 계속해 왔던 일이오. 우선은 흑야와 혈교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가정하에 조사를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이렇게 사람을 애타게 하니,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수밖에. 일단 빠른 시일 내에 맹주를 뵈러 가야겠군.”
“그럼,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아침에 요청을 넣어 둘게요.”
“그래 주면 고맙겠구려.”
송운이 평서란의 두 손을 잡았다.
그러자 평서란 역시도 그의 손을 꼭 맞붙잡았다.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 당연한 일인걸요? 후후. 이제는 늘 제가 함께하니 너무 혼자 고심하지 마세요.”
“그것참 든든한 말이군.”
잠시 고됨을 잊은 듯 송운과 평서란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第五章. 암영
어느 한적한 산 속에 위치한 작은 지붕 아래.
은밀하게 모인 네 명의 인영이 있었다.
내부는 무척 작았는데, 최대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처럼 보이려는 듯 어둡고 습했다.
곧 그곳에 아주 작은 빛이 새어 들어왔고, 그 작은 빛은 간신히 서로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주변을 비췄다.
“여전히 이곳은 칙칙하군.”
얼굴의 절반을 가면으로 가린 사내가 작은 먼지 조각 하나 달라붙는 것조차 싫다는 듯, 불쾌함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짧은 수염의 사내가 물었다.
“그곳의 상황은 어떻게 되어 가느냐?”
젊은 사내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역시나 숙부님께서 생각하셨던 대로입니다. 이래저래 머리를 굴리는 듯하나, 무림맹 내부에서도 슬슬 균열이 일어날 듯싶습니다. 정녕 혈교가 벌인 일인지, 다른 제삼자의 짓인지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차피 반대 세력들도 맹주를 그다지 탐탁지 않게 바라보고 있던 차 아닙니까.”
“머리가 꽤 아플 테지. 점점 사건은 벌어지고 수습은 해야 하는데 정작 혈교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고 있질 않으니…… 끌끌.”
“그러합니다. 점점 옭아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맹주가 먼저 선수를 치려 할 테지만, 반대파에서 결코 먼저 나서서는 안 된다며 거부할 겁니다.”
한껏 들뜬 목소리로 떠드는 젊은 사내를 짧은 수염의 사내가 제지했다.
“아니다. 그가 그 자리에 앉은 지 몇십 해나 흘렀다. 그 영감탱이가 그렇게 단순하게 대처할 리 없어. 게다가 옆에 능구렁이가 한 마리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한 쉽게 넘어가지는 않을 게다.”
“하오나 숙부님……!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맹주는 내부에 혈교와 손을 잡은 이가 있는지부터 알아내려 할 텐데요?”
“그러니 더욱 박차를 가해야지 않겠느냐? 조만간 한 번 더 날뛸 기회를 열어 주마.”
“한데, 가…….”
“허어! 이곳에서만큼은 내 그 호칭을 쓰지 말라 하였거늘!”
젊은 사내가 이제 막 입을 연 이에게 엄하게 꾸짖었다. 입을 연 이는 땅딸막한 키에 호리호리한 체형을 지닌 사내였다.
그는 젊은 사내의 호통에 지레 겁을 먹었는지 황급히 말을 바꾸며 고개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어르신, 한데…… 정말 이 결정이 옳은 것일까요……?”
“왜? 이제 와 겁이라도 생긴 것이냐? 지금이라도 싫다면 빠져라.”
짧은 수염이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하, 하면…….”
스릉-
짧은 수염의 말을 듣고 주춤하던 사내의 목울대에, 서슬 퍼런 쇠붙이가 겨눠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짧은 수염의 사내 뒤에 서 있던 반 가면을 쓴 사내가 누구 하나 말릴 새도 없이 검을 뽑아 든 것이다.
“빠지고 싶으면 빠져도 된다. 하나, 더 이상 저 밝은 빛을 보지 못할 거라는 사실 또한 명심해 두어야 할 것이다.”
“가, 가주, 아니…… 어르신!”
검을 겨눈 반 가면을 쓴 사내의 살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에 다급하게 빌 듯 엎드리며 사내가 외쳤다.
한다면 하는 그의 성미를 익히 아는 탓이다.
어찌 되었건 그는 겁이 많아서 그렇지, 사실 가장 머리가 뛰어난 자였다. 죽여서 좋을 것은 하등 없었다.
제 목숨 아까운 줄 아는 자이니, 적당히 겁박하면 자연스레 남아 있을 터였다.
짧은 수염의 사내가 입에 조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끌끌…… 그만. 겁은 그만하면 되었다. 한 사람이라도 소중한 이때에 어찌 같은 배에 올라타고서 언제까지 투덕거릴 테냐?”
“……송구합니다. 어르신.”
짧은 수염의 말에 반 가면의 사내가 검을 꺼내 들었을 때와 같이 빠르게 검을 집어넣었다.
“가, 감사합니다. 어르신! 감히 제가 쓸데없이 혀를 놀렸습니다. 다시는 절대로, 절대로 그런 허튼소리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겠습니다!”
그제야 숨통이 트인다는 듯 연신 짧은 수염의 사내에게 절을 했다.
‘입만 산 놈 같으니라고.’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지, 반 가면의 사내가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미 내려진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럼 숙부님, 미리 준비를 해 둘까요?”
“그리하도록 해라. 그리고 준비가 끝나는 즉시 동시에 두 곳을 친다. 생각할 틈조차 없게 몰아붙여라.”
“하면 그 아이는 어찌할까요?”
“당분간은 놔두자꾸나. 설마 자신의 본문을 버리기야 하겠느냐? 송운과 친해진 듯하니, 지켜봐서 나쁠 건 없을 게다.”
“예, 알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젊은 사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과연, 우리 맹주께서는 어떠한 결정을 내리실꼬. 참으로 기대되는구나. 큭.”
짧은 수염 사내의 안면에는 조소가 가득 피어올랐다.
* * *
똑똑-
“무슨 일인가.”
“맹주님, 황궁의 사신이 맹주님을 뵙기를 청합니다.”
이른 아침부터 송운이 찾아왔다.
뭔가 중요한 사안일 거라 직감한 백능이 이에 응했다.
“안으로 모시게.”
“예.”
끼익-
잠시 후, 커다란 문이 열리고 송운이 들어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맹주님.”
예의를 차린 송운이 자리에 앉자, 곧 시녀들이 기다렸다는 듯 차와 다과를 내왔다. 그리고 이내 백능이 손으로 표시하니 방 안에 있던 모두가 자리를 비켰다.
“이제 우리 둘만 남았으니 본론을 꺼내 보시오. 무슨 일이시오?”
백능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송운이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황궁에서 황명이 내려왔습니다.”
“흐음, 황제께서 말인가?”
황명이라는 단어에 웃고 있던 백능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예. 아무래도 혈교를 찾을 단을 다시 꾸려야 할 듯싶습니다. 저를 단주로 평 소저를 부단주로 하여 무림맹과 협의 하에 다시 한번 혈교를 찾아 나서시기를 원하십니다.”
“혈교를 찾아보라?”
백능이 되묻자 송운이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
“한 번 실패했다고 하여 이대로 앉아서 당하고만 있기에는 무림도 무림이나, 백성들의 피해가 만만치 않습니다. 사냥감이 숲속에 숨었으면, 직접 찾아 나서야지요. 더불어 무림맹에 숨어 있는 쥐새끼들 역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