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9화
순간 불에 덴 듯 화끈거리는 느낌에 송하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피를 멎게 하려면 오른손을 써야 하는데 그리되면 검을 놓치게 된다.
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 불행 중 다행이라면 상처 부위는 길지만, 얕게 베였다는 것이다.
하나 어릴 적 뛰다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거나, 지난번 황보운룡과의 대회에서 손바닥에 입었던 찰과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아팠다.
‘아아…….’
너무 아파서 눈물은커녕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처음으로 겪어 보는 무인의 혹독한 세계였다.
뚝. 뚝.
깊게 베인 것은 아니나 상처에서 점점 핏물이 고여 주변의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거기에 사방에서 몰아치는 적들은 송하의 정신을 더욱 흐리게 만들고 있었다.
‘누…… 눈앞이 흐려…….’
피를 흘리며 지혈 없이 계속해서 몸을 무리하게 사용할 수밖에 없던 탓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송하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면서 한 개의 신형이 두 개, 세 개로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여기서 정신을 놓게 되면 정말 죽는다.
죽음.
그토록 무겁게만 느껴지고 멀게만 느껴졌던 단어가, 당금 자신의 코앞에 놓여 있다.
이대로 주저앉는다면 이번엔 어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목이 베일지도 모른다.
흐려지는 의식과 함께 모든 걸 놓고 편안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무렵.
문득 예전에 송운과 처음으로 실전에서 겪었던 죽음이 떠올랐고 그와 함께 가족의 얼굴이 떠올랐다.
홍예령과 송악, 그리고 송운과 송후의 얼굴이 차례대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마지막엔 왜인지 모르게 황보운룡의 모습도 보였다.
그러자 송하의 흐려지던 정신이 벼락을 맞은 듯 번쩍 깼다.
‘……정신 차려, 송하! 그래. 황보 소협, 황보 소협이 돌아올 때까지만 버티면 살 수 있어……!’
동시에 초점을 잃어 가던 송하의 두 눈에서 이채가 비쳤다.
어쩌면 황보운룡이 돌아온다고 해도 뒤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
그만큼 적들은 많고 강하니.
하나 여기서 무너진다면 정말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절대 여기서 죽지 않을 거야.”
다시 기운을 되찾은 송하가 검파를 굳게 쥐었다.
쌔애액-!
캉-!
“하악…… 하악……!”
이번에는 절대로 당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로 송하가 등 뒤로 날아오는 검을 쳐 냈고, 다시 정신이 든 송하는 마지막 젖 먹던 힘까지 모조리 짜내 적에게 맞대응하기 시작했다.
숨이 거칠어지고 있었으나, 송하가 여러 명의 검을 상대할 수 있는 건 그녀의 검이 가볍고 날쌘 쾌검인 덕분이었다.
몇 초가 더 오갈 무렵.
카가가각-!
스걱!
챙강!
송하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말…… 도 안 돼.’
송하의 검이 상대방의 검기를 이겨 내지 못하고 잘려 나간 것이다.
검을 다루던 무인이 검을 잃고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그나마 배운 각술과 권법도 저들에게 거리가 애당초 닿지 않기에 불가하다.
‘아!’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그때 송하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게 있었으니, 여태껏 등 뒤에 메고 있던 비익검이었다.
‘이런 걸 메고 있었으니 몸이 더욱 무거웠지, 이 바보!’
스르릉-
충격에 빠졌던 것도 잠시, 송하가 양손으로 비익검을 뽑아 들었다.
메고 있던 걸 손으로 들었을 뿐인데, 한결 몸이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아…… 하악…….”
연신 가쁜 숨을 내뱉으면서도 비익검을 꺼내 들자, 이번엔 상대방의 눈빛이 변했다.
아까보다 더 살기등등한 기세로 달려드는 그들을 보니 송하의 얼굴엔 좌절감이 어렸다.
평생 써 보지도 못한 쌍검을 사용하려니 죽을 맛인데 거기에 적들은 점점 더 세게 치고 나오고 있었다.
송하가 사방에서 날아오는 검을 보며 비익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상처를 입은 데다 검을 다루는 데 익숙하지 못한 왼쪽 검은 느리고 엉성했으나, 오른쪽 검은 여전히 빨랐다.
‘제발…… 제발 좀 그만하라고! 죽기 싫단 말이야!’
웅- 우웅-!
그때, 송하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진동과 귓가를 파고드는 소리가 있었다.
한낱 검이라고 지칭했던 비익검에서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울음을 토해 낸 것이다.
번쩍!
카앙!
“크윽……!”
스륵-
툭.
촤아아악!
처음으로 송하가 내뻗은 검로에 있던 적의 목이 잘려 나가며 몸뚱이에서 피를 내뿜었다.
그리고 때마침 송하의 등 뒤로 신형이 날아왔다.
“송 소저! 괜찮습니까?”
황보운룡이었다.
황보운룡이 도착하자 싸움은 금세 정리되었다.
송하가 간신히 막기 급급했다면 황보운룡은 여지없이 그들을 죽이고, 포박하는 데 성공했다.
송하와 황보운룡의 실력 차이도 한몫했을 터나, 그보다 더 큰 차이점은 송하의 검에는 살기가 없었다는 게 가장 컸다.
검을 쓰고는 있으나, 살상을 경험해 보지 못한 송하로서는 손속이 가벼울 수밖에 없었고, 더더욱 적에게 밀린 것이다.
반면 황보운룡의 검에는 자비가 없었다. 누군가를 죽이는 데 망설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남은 두 명을 잡아 어디서 보낸 누구인지 정보를 캐내 보려 하였으나, 그러할 새도 없이 모두가 입 안에 있던 독을 깨물고 자결했다.
“독으로 자결할 정도라면 그냥 일반 도적은 아닌 듯하군요.”
황보운룡이 분노한 표정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털썩.
그와 동시에 긴장이 풀렸는지 송하가 다리에 힘을 잃고 기절하듯 쓰러졌다.
“송 소저!”
* * *
“으…… 음…….”
“깨셨습니까?”
쪼르륵.
“아, 적은……!”
순간 발작이라도 하듯 송하가 소리쳤고,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황보운룡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진정하십시오, 송 소저. 저 황보운룡입니다. 상처도 있고, 그 주변에 남아 있는 건 위험할 듯하여 인근의 마을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의원분께서 상처를 봐주고 가셨습니다. 이젠 괜찮으니 마음 놓으십시오.”
그러면서 황보운룡은 따듯한 물에 적시던 천의 물을 짜내고 송하의 머리 위에 올려 주었다.
‘하아…….’
별것 아닌 황보운룡의 음성에 송하는 왠지 모를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고개를 틀어 주변을 살펴보니, 작은 방 안이었다.
등잔을 밝혀 놓은 것을 보니 바깥은 이미 어둠이 잠식한 듯했다.
너무도 고요한 방 안의 모습에 마치 아까 벌어진 일이 모두 거짓 같았다.
“아얏……!”
하나 곧 왼쪽 팔에서부터 느껴지는 화끈거림에 실감할 수 있었다.
“의원님께서 치료를 하긴 하셨으나 통증은 조금 있을 거라 하셨습니다.”
“또…… 신세를 졌네요.”
“아닙니다. 제가 혼자 자리를 비우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겁니다. 미안합니다.”
황보운룡이 고개를 숙여 사과하자 송하가 고개를 틀었다.
“애당초 내가 노숙하자고 우기지 않았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잖아요. 사과는…… 내가 해야죠.”
평소의 송하답지 않게 기가 푹 죽은 목소리에 황보운룡이 고개를 내저었다.
“노숙은 저 역시 동의한 일입니다. 더불어 붙잡히자마자 자결할 만큼 체계적인 녀석들이었습니다. 분명 그냥 도적이 아니라, 누군가의 명을 받고 노리고 접근한 겁니다. 그것도 충성을 다하는 자의 명이 아니라면 목숨을 그리 쉽게 버리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자리를 비울 때까지 기다린 걸 테니…… 마을에 머물렀어도 야밤에 몰래 습격했을 겁니다. 제가 좀 더 빨리 알아챘더라면 좋았을 텐데 정말 미안합니다, 송 소저.”
“하아, 한데 우리한테 저들이 노릴 만한 뭔가가 있었…… 아. 설마?”
황보운룡의 말에 의문을 품던 송하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런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황보운룡이 조용히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비익검.”
“설마, 아니 어떻게 그걸 알았단 말이에요?! 우린 분명 은밀하게…… 윽!”
흥분한 탓에 상처가 벌어졌는지 꽁꽁 묶어 두었던 천 틈 사이로 피가 새어 나왔다. 동시에 벌어진 상처 사이로 엄청난 고통이 전해져 왔다.
“아직 그렇게 움직이거나 화를 내시면 안 됩니다. 상처가 아물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겁니다.”
“하아…… 그건 분명 오빠가 나한테 아무도 몰래 전해 준건데, 어떻게 그걸 알아낸 거죠?”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의 송하의 말에 황보운룡이 입가에 고소를 머금었다.
“이 무림엔 비밀이 없습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이니까요.”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잔뜩 묻어 나왔다.
“아, 그럼 비익검은……?!”
“여기 고이 모셔 두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놀란 송하의 머리맡에 황보운룡이 슬그머니 비익검을 내밀었다.
아까와는 달리 지금은 아무런 미동도, 빛도 나지 않았다.
그냥, 정말 그냥 검일 뿐이었다.
“분명 비익검에서 빛이 났어요. 그리고 잠깐이지만 진동도 느껴졌는데…….”
비익검이 빛남과 동시에 머리가 날아간 채 피를 내뿜던 이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당시의 충격으로 인해 잊고 있던 사실이 검을 보면서 떠오른 것이다.
“아, 아아. 내, 내가 사, 사람을…… 사람을……! 우욱!”
충격과 두려움에 휩싸인 송하는 점점 혼동이 오는지 사시나무가 떨리듯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곤 연신 헛구역질을 반복했다.
‘설마, 첫 살인이었던 건가?’
황보운룡의 눈가에 당혹스러움이 내비쳤다.
어지간한 정신력이 아니라면 첫 살인을 하고 멀쩡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송하의 반응을 보아하니 본인의 손으로 처음 저지른 살인인 듯했다.
죽음과 살인.
그것들은 무를 배우고, 무림인이 되면 언젠간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것이자 숙명 같은 것이다.
즉, 내가 남을 죽일 수 있듯 나 역시도 언제든 죽을 각오를 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무림인인 것이다.
하나 그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다.
황보운룡 자신도 분명 처음으로 사람을 베어 죽인 그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예전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해 가슴이 아렸다.
‘겉으론 강해 보이지만 속으론 참으로 여린 마음을 지닌 여인이구나.’
황보운룡이 서둘러 송하의 양팔을 잡았다.
그러자 떨림은 조금 잦아들었으나, 송하는 여전히 떨고 있었다.
“송 소저! 정신 차리십시오.”
“사람이 죽었어요…… 내가, 이 내 손으로 사람을 죽였다고요!”
“놈을 죽이지 않았다면 죽은 건 적이 아니라, 송 소저였을 겁니다.”
“흐윽…… 하지만…….”
계속해서 눈을 피하니 황보운룡이 가볍게 송하의 얼굴을 쥔 채, 송하의 두 눈을 마주 보았다.
“……아.”
직접적으로 처음 마주한 그의 눈은 깊고 깊어 마치 빨려 들어갈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속엔 상처와 아픔도 보였으며, 단단함도 보였다.
하나, 그 끝엔 부드러움이 있었다.
“누구나 처음은 있습니다. 나도 마찬가지로 이 과정을 겪었고, 이 세상의 모든 무인이 그렇게 살아가지요. 내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다면 그 정도의 희생은 필요한 법이니까요. 또한 검을 드는 순간 생과 사를 오가는 것이 바로 무인입니다. 이것도 감안하지 못하고, 이겨 내지 못할 거면서 검을 쥐려 했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포기하십시오. 그 순간, 때마침 비익검이 나서 주지 않았더라면 그 무딘 검날로는 자신조차 지키지 못했을 겁니다.”
그의 담담하면서도 냉정한 목소리에 송하의 심장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너무도 맞는 말이기에 반박할 수조차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