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8화
그날을 기점으로 송운은 매일같이 하루를 수련에 매진하다시피 보냈다.
한번 가닥을 잡았을 때 붙잡지 않으면 더 오래 걸린다는 걸 느꼈기에 스스로를 한계까지 매섭게 몰아치는 것이다.
이것이 완전히 몸에 익숙해지고 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한결 수월해질 터였다.
그리되면 송운보다 더 경지가 높은 무인과 마주치더라도 승산이 생긴다.
하여 매우 중요한 수련인 것이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수련을 마치고 돌아온 송운의 온몸과 무복은 땀으로 잔뜩 젖어 있었다.
“가닥이 좀 잡히세요?”
수건을 내주며 평서란이 송운에게 묻는다. 하나 어김없이 그의 고개는 좌우로 내저어졌다.
“조금 성과가 있는 듯하더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소.”
실망한 감도 없잖아 있는 그의 표정에는 또 다른 궁금증이 새겨졌다.
평서란은 그의 표정을 보는 즉시 그가 무슨 질문을 꺼내려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지난 몇 주야간 반복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오늘도 송하에겐 서신이 오진 않았소?”
“후후. 그렇지 않아도 말하려고 했어요. 조금 전에 섬서성 합양현에 도착했다고 서신이 왔으니, 아마 지금쯤이면 조금 더 가셨겠죠?”
참 난감하다는 표정이 송운의 얼굴에 짙게 깔린다.
“나 원 참…… 최대한 빠르게 갔으면 하는데 정작 본인은 느긋하구려.”
“황보 소협이 함께 갔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편히 먹어야 한다고 하셨던 게 운 가가시잖아요?”
“으음…… 부디 그러길 바라야지.”
두 눈에 걱정이 가득한 송운을 바라보던 평서란이 그의 옷을 받아 들며 말했다.
“따뜻한 물을 준비 해 놓았으니 우선 씻고 오시는 게 좋겠어요. 그리고 난 후에 같이 저녁 먹어요.”
자신을 다독이는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예뻐 보이는 평서란이다.
그녀를 바라보는 송운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고맙소, 란 매. 금방 다녀오리다.”
* * *
“……진짜 비가 오네.”
송하가 손을 내미니 순식간에 빗물이 손바닥을 적신다.
한번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하니 빗줄기가 굵어져 그칠 기미가 없어 보였다.
그 탓에 제법 촘촘한 나무 아래 자리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비를 맞기 시작해 기껏 피워 놓은 불이 꺼져버렸다.
“오늘 저녁은 아무래도 굶어야 할 것 같군요.”
“으…… 배고픈데…….”
꼬르르륵-
마침 타이밍 좋게 송하의 배 속에서 배고픔의 신호가 나지막하게 주변을 울린다.
그 때문인지 더더욱 송하의 얼굴이 빨개지며 울상이 되자,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황보운룡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선 송하 곁에 있던 장옷을 살포시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이미 몸이 다 젖어 가고 있었지만, 비를 피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젖은 무복이 송하의 몸과 밀착되면서 양측 모두 민망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흠! 잠, 잠시 앉아 계십시오.”
평소의 그라면 더듬지 않을 말도 말을 마치기 무섭게 사라진 황보운룡을 바라보며 송하는 어깨에 걸쳐진 장옷을 끌어 몸을 감쌌다.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아 모르겠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제는 배고픔보다는 계속해서 내리는 빗물과 꺼져 버린 불씨 탓에 엄습한 추위에 점점 지쳐 갈 무렵 멀리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누구지?’
만일 황보운룡이라면 굳이 이렇게 조심스럽게 다가오지 않았을 터.
혹시 도적이라면 스스로를 지켜 내야 한다. 살기는 품지 않았지만,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인기척은 송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마음에 검파를 잡은 송하의 손끝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꿀꺽.
송하가 마른침을 삼킨다.
거의 근접에 가까워짐을 느낀 그 순간.
“이런……!”
휙-!
펄럭!
비익검을 휘두르던 송하를 누군가 감싸 안았다.
“접니다, 송 소저.”
놀란 그녀를 감싸 안은 건 황보운룡이었다.
“아, 아으…… 놀랬잖아요! 왜 그렇게 숨어서 다가와요? 하마터면 칠 뻔했잖아요.”
놀란 마음에 황보운룡의 가슴 부근을 주먹으로 내리친 송하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송하의 주먹이 제법 매웠는지 잠시 움찔하던 황보운룡이 말을 이었다.
“잠이 든 것 같아 조용히 다가오던 참입니다.”
그 말에 송하는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배려해 주려던 사람에게 화를 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때, 긴장과 함께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어느새 황보운룡의 품에 안긴 듯한 모양새가 되어 있자 송하가 빠르게 그에게서 멀어졌다.
“우선 이것부터 드시지요.”
놀란 마음을 수습하던 송하에게 황보운룡이 건넨 건 주먹밥 한 개와 말린 육포였다. 비에 조금 젖어 축축한 상태였지만 불이 꺼진 지금은 이마저도 감사했다.
“……자, 잘 먹을게요. 그리고 아까 그건…… 미안해요.”
말하는 송하의 점점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고 있었으나, 모두 알아들은 황보운룡이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별말씀을.”
* * *
“오늘은 여기서 묵어요.”
송하가 자리를 잡고 땅을 툭툭 친다.
이제야 산서성 길현현(吉縣縣)에 도착한 송하와 황보운룡이었다. 오는 길 도중에 강이 있어 빙 둘러 오느라 시간이 더욱 지체된 것이다.
“서신은 보내신 겁니까?”
황보운룡의 말에 송하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를 물어본 까닭은 현에 들릴 때마다 송하가 송운에게 서신을 날리기 때문이었다.
계속해서 움직였으므로 직접 답신을 받지 못하더라도 오매불망 자신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송운임을 알기에 첫날부터 계속 서신을 보내고 있던 송하다.
첫 서신의 내용은 이러저러한 연유로 자신의 복귀 행이 늦어지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이었고, 그 뒤로는 도착한 곳까지의 행적을 남기는 것이었다.
송하의 답변에 황보운룡이 오는 길에 주워 놓았던 마른 나뭇가지들을 한곳에 가지런히 내려 두었다.
“그럼 오늘은 이곳에서 묵으면 되겠군요. 주변을 좀 둘러보고 마을에 다녀올 터이니, 불만 좀 지펴 놔 주십시오.”
말을 마친 황보운룡이 몸을 일으켰다.
본래는 그날 이후 현에 들릴 때마다 음식을 미리 구해 오려 했으나, 급격하게 날이 더워진 탓에 음식이 반나절을 가지 못하고 상하기 시작했다.
해서 그때그때 자리를 잡고 나서야 음식을 구해야 했다.
“네! 그럴게요.”
제법 고분고분해진 송하가 자신 있게 답했다.
환하게 웃는 송하의 얼굴은 노숙으로 인해 제법 까무잡잡해져 있었으나 이마저도 아름다웠다.
본판이 예쁘니 어쩌면 당연했다.
하나 아직까지 여인에게 익숙하지 못한 황보운룡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큼,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곧 황보운룡이 자리를 비웠고, 송하가 돌과 나뭇가지를 가지런히 모아 놓고 마찰을 내기 시작하자 금세 연기가 피어올랐다.
삼 주야 전까지만 해도 버벅였으나, 이제는 스스로 불을 피울 수 있게 된 덕에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불을 준비를 해 두는 송하였다.
“후우, 후우!”
연기가 꺼질세라 열심히 바람을 불어넣자, 곧 불씨가 조금씩 붙기 시작한다.
짝!
“잘했어, 송하야!”
불까지 완벽하게 피우는 자신이 스스로도 대견했는지 양손을 맞부딪치며 입으로는 칭찬을 내뱉은 송하가 이내 이번엔 매의 눈으로 주변을 훑는다.
흡사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의 그것과 닮은 모습이었다.
‘주변에 들판이 많고 산은 없고…… 그럼 적어도 들짐승은 있겠지?’
꿀꺽.
잠을 좀 못 자더라도 배가 고픈 것은 딱 질색인 송하다.
게다가 아마도 황보운룡이 마을에서 먹을 것을 구해 올 테지만, 오늘만큼은 자신이 확실하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저녁만큼은 고기로 푸짐히 먹자는 심정이 묘하게 가미된 것이다.
해서 자리를 잡은 곳을 중심으로 멀리 사방을 둘러보던 참이었다.
바스락.
‘설마 벌써 먹잇감이……?!’
저 먼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송하의 귀가 쫑긋거렸다.
킁킁.
냄새까지 맡아보니 영락없는 짐승의 냄새다.
혹여나 놀라 도망갈세라 송하의 발걸음이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다가가기 시작했다.
조금 더 가까이 가 보니 정체는 자그마한 토끼였다. 오늘 자신의 운명이 어찌 될지도 모르는 채, 평화로이 열심히 눈앞에 놓인 풀을 뜯어 먹는 중이었다.
동시에 송하의 두 눈에 반짝하고 빛이 났다.
‘역시! 오늘은 진짜 토끼 고기를 먹을 수 있겠어.’
며칠 전, 비가 오는 바람에 놓쳐 버린 토끼를 회상하며 송하가 입맛을 다셨다.
그러고선 숨을 쉬는 것조차 최대한 참으며 조심스럽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때였다.
찌릿-
토끼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송하는 어디선가 날카로운 시선이 쏘아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엔 얼마 전처럼 황보운룡이 다가오는 건가 싶었으나, 벌써 같이 먹고 자고 걸은 기간만 칠 주야 가까이 된다.
그런 황보운룡의 기운조차도 헷갈릴 송하가 아니었다.
‘살기…… 인가……?’
꿀꺽.
그 기운에 절로 마른침이 삼켜 넘어갔다.
흐릿하지만 정신을 최대한 집중해서 보니, 한 명이 아닌 여럿이었다.
최소 일곱은 되는 듯한 숫자였다.
황보운룡이 떠난 지 이제 겨우 반 식경.
여태까지 그의 행적을 떠올려 보면 못해도 아직 반 식경은 더 걸릴 터. 그전까진 혼자라는 생각이 송하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조금씩 몸이 떨려 오기 시작한다.
아직 단 한 번도 진짜 살기가 오가는 실전에 나서 본 적 없는 송하다.
만일 놈들이 공격해 온다면?
휙휙-!
‘정신 차려. 정신만 단단히 차리면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산다고 했어! 그리고 저 사람들이 갑자기 나를 노리고 올 리가 없잖아. 그냥 지나갈 수도 있어.’
하나 그런 송하의 생각과는 달리 점점 심장이 세차게 뛰고, 손발이 발발 떨려 왔다.
‘윽……!’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입술을 질끈 깨문 송하가 검을 집어 들었다.
자신이 느낄 수 있는 살기를 지닌 이들이라면 어쩌면 이길지도 모른다는 자그마한 희망을 품고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몸을 숙였다.
그러곤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기수식을 취했다.
‘괜찮아, 괜찮아.’
사사삭-
하나, 그런 송하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놈들도 송하가 자신들의 기척을 느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저 들판 너머에서 살기가 정확하게 그녀의 팔을 노리고 날아왔다.
쌔애액-!
카앙!
‘쳐, 쳐 냈어!’
간신히 암기를 쳐 낸 송하가 입 밖으로 거친 숨을 내뱉으며 최대한 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들판 사이로 바람이 불어와 그녀가 움직이는 방향을 잠시 어지럽혀 주었다.
하나 숨바꼭질은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곧바로 송하의 뒤꽁무니까지 쫓아온 암살자들이 점점 송하를 압박해 오고 있었다.
마치 사냥감을 모는 것처럼 말이다.
간신히 그들의 공격을 피하고 있었지만, 방어만으로 그리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서걱-
“윽……!”
아니나 다를까, 찰나의 순간 송하의 왼쪽 어깨가 베이고, 새빨간 핏물이 허공으로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