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한참을 침묵으로 물들이던 백능이 드디어 깊게 닫혔던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들을 움직여야 할 듯싶군, 총군사.”
“예.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맹주님.”
서로의 의견을 확인한 이상 이 자리에서 해결될 것은 없었다.
이제는 직접 나서서 사건을 조사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할 때였다.
“이는 아무래도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성이 있겠구려. 이번 회의는 여기에서 끝내는 게 좋겠소이다. 송 소협, 조만간 시간을 한 번 더 내도록 합시다.”
“그리하도록 하시지요, 총군사님.”
* * *
회의가 끝나고 방에서 나온 송운은 너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제법 짧은 시간이라고 생각했음에도 어느덧 하늘은 석양이 지며, 붉은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송운이 곧장 방으로 돌아가려던 발걸음을 틀었다.
그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무림맹 내부에 있는 수련장이었다.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
송운과 평서란이 무인임을 감안해 특별히 내준 공간이기에 근처에선 누구의 기척도 없었다.
더불어 수련장 위 천장 부근을 시야에 방해되지 않을 만큼만 가려 두어 제법 햇빛이 많이 차단되는 효과도 있었다.
어쩐지 호화로운 모습의 수련장은 외부인에게 무림맹의 성세를 보여 주기 위하여 만들어진 느낌이 다분한 장소였다.
하나, 이미 해가 반절 이상 졌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그다지 효용이 없었다.
‘어쨌건 무공 수련하기엔 좋겠군.’
주변을 확인한 송운이 곧바로 가부좌 자세를 잡았다.
오랜만에 제대로 수련장에서 자리를 잡고 하는 수련이다. 그래서인지, 어딘가 조금 어색한 기분도 들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후우.”
깊은 들숨을 마신 후, 천천히 날숨을 내뱉은 송운의 어깨가 땅을 향해 가라앉는다.
몇 번을 반복하던 송운이 얼마 전 황보운룡과의 대진을 머릿속에 천천히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공간감을 그렇게 잘 사용하는 자는 처음이었지.’
대진 당시에도 느꼈지만, 송운이 만일 그보다 무공의 수위가 훨씬 높지 않고, 공간감을 익히지 않았더라면 그에게 졌을 것이다.
이길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실력 차이였다.
둘째는 송운이 공간감을 익혔다는 것이다.
그 두 가지가 합쳐지면서 송운이 승리를 이끌어 낸 것이다.
그만큼 황보운룡의 공간감은 평생 만나 본 그 어떠한 무인보다 뛰어났다. 심지어 구천악조차도 공간감을 완벽히 구사해 내지는 못하였다.
그때, 단 한 번 검을 주고받았던 독고백의 모습이 송운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 그렇다면 백 형이 사용하던 무공 중 하나가 바로 공간감을 활용한 무공이었구나!’
생각해 보니, 유일한 한 명이 있었다.
독고백은 자유자재로 자신의 공간을 사용했다.
하나 독고백의 무위는 가히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신의 경지에 달해 있었으니, 일반적인 무인의 기준이라면 황보운룡을 따라올 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더더욱 공간감이 중요하게 느껴졌다.
당금 송운도 공간감을 조금은 익혔으나, 완벽하지는 못하다.
그저 천의선천기공을 깨달으면서 점을 보고, 그 선을 보게 되면서 익힌 공간감이다.
제대로만 익혀 둔다면, 동급 무인의 싸움에선 공간감을 익힌 자가 이긴다.
어쩌면 이 두 개를 합치면 더 뛰어난 공간감이 만들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악.
송운이 오랜만에 상단전을 있는 힘껏 개방시켰다.
더불어 하단전이 열렸다.
예전이라면 감히 해낼 수 없었을 테지만, 그날 이후 송운은 상단전과 하단전의 동시 개방이 가능해졌다.
동시에 두 단전을 열고 나니, 머릿속이 깨끗해지면서 동시에 몸이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이 송운의 온몸을 감쌌다.
기가 혈과 혈 사이를 타고 흐르며 격렬하고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온몸에서 느껴졌다.
‘좋아. 제대로 정착하였군.’
그다음으로 송운이 한 일은 눈앞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이는 그가 생각하는 공간감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렇게 하나의 그림을 그리니, 그 선을 따라 점들이 떠오르며 새로운 하나의 성좌를 만들어 냈다.
유에서 무로, 무가 또 다른 유를 창조해 내는 것이니, 곧이어 송운의 눈앞에 커다란 원형이 그려졌다.
그것들이 큰 공간을 점하며 송운의 주변을 맴돌았다.
금세 송운의 눈앞에 투명하면서도 명확한 선이 그려졌다.
여기까지는 이미 송운이 이뤄낸 경지이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은 송운이 이번엔 그려 낸 선 밖에 또 다른 선 하나를 그리기 시작했다.
앞에 놓인 통나무를 기점으로 잡아낸 선이다.
안쪽 선이 자신의 동선(動線)이라면 이번에 그려 넣은 선은 적의 동선이다.
한참 동안 온 정신을 한곳에 집중하기 시작한 송운의 눈앞에 두 개의 선이 간신히 동시에 자리를 잡았다.
꿀-렁.
‘……후우.’
이에 송운이 다가가려 몸을 움직였으나, 이내 두 개의 선 모두 다 동시에 힘을 잃고 흐트러져 허공으로 사라졌다.
알 듯 모를 듯 눈에 보이지만, 잡히지 않는 그것들은 송운의 마음을 점점 애태우고 있었다.
하나의 선까지는 완벽하게 되지만, 이번에 시도해 보려는 두 번째 공간감이 계속 흐트러지면서 두 개가 다 무너지니, 마음만 점점 급해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 성급할수록 돌아가라 하였다.’
송운이 다시 한번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그 과정을 몇십 번 더 반복했을까.
어느덧 지고 있던 해는 완연히 몸을 감추었고, 그 빈자리를 대신하여 달빛이 송운을 비추던 그때.
“……됐다!”
뚝.
송운의 외침과 동시에 볼에 고였던 땀방울이 송운의 볼을 타고 땅에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송운의 손끝을 통해 피어난 공간감이 흐트러지지 않고 완벽하게 균형을 이뤄냈다.
두 개의 선을 모두 다루는 데 성공한 것이다.
송운의 목소리에 희열이 비쳤다.
천의선천기공과 공간감을 모두 이용해 송운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감을 창조해 낸 것이다.
기존의 공간감과는 달랐다.
하나 그것을 완성했다고 하여 끝은 아니었다.
당장은 움직이지 않는 통나무의 선에서 그쳤으나, 훗날에는 움직이는 적을 잡아내야 한다.
이제 시작인 것이다.
‘그래도 시작이 반이라고 하였다.’
더구나 기존에 있는 것이 아닌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 만큼 그 길이 수월할 것이라는 생각은 접은 지 오래였다.
오히려 송운은 실망하기보다는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앞으로 더 많은 수련이 필요하겠군.”
송운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그려졌다.
* * *
합양(合陽)의 끝자락에 도달한 송하와 황보운룡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기로 하고 자리를 잡았다.
벌써 출발한 지 삼 주야가 지났음에도 아직 섬서성을 벗어나지 못한 연유는 시작 전부터 계속해서 투닥거리기 바쁘던 두 사람의 의견이 처음으로 맞아떨어진 탓이다.
송하도 돌아가는 길, 여행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었고 황보운룡 역시 급할 이유가 없기에 가능했다.
그 와중에 송하가 하나 더 우긴 건 다름 아닌 노숙이었다.
송운이 준 노잣돈으로 방을 잡을 수도 있었지만,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자신이 노숙을 해 보겠냐며 송하가 박박 우긴 탓에 강제로 노숙을 하게 것이다.
처음엔 황보운룡도 송하를 말리려고 하였으나, 이제는 그녀의 도전 정신에 박수를 보내며 응원할 지경에 이르렀다.
생각보다 송하는 빠르게 노숙에 적응했고, 본인이 우긴 만큼 불평불만이 없었던 점도 둘의 노숙을 이어 나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나 황보운룡이 오늘따라 주춤거렸다.
“어라, 뭐해요? 자리 잡는 데 도와주지 않고?”
“오늘은 아무래도 비가 올 것 같은데…….”
황보운룡의 말에 송하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본다.
“그걸 그쪽이 어떻게 알아요? 멀쩡하기만 한데.”
송하가 군데군데 구름이 낀 하늘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 아직까지는 파란 하늘이 보였다.
“아아, 됐어요. 하기 싫으면 관둬요. 내가 하면 되지.”
현과 현, 마을과 마을 사이라고 해서 계속 집들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적당한 길목에 자리를 잡고,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온 송하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곤 입으로 바람을 불어 가며 길쭉하고 고운 두 손으로 열심히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황보운룡이 속으로 피식 웃음을 내고선 그녀의 곁에 앉아 돕기 시작했다.
그래도 비가 온다는 말이 신경이 쓰이긴 했는지 나름대로 제법 우거진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은 모습이 너무도 귀여웠다.
“뭐, 뭐 안 할 것 같이하더니만…….”
“혼자 하는 것보다야 낫겠지요.”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황보운룡의 모습에 말을 더듬었으나, 정작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송하의 손에 들린 것을 가져와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황보운룡이 손을 대니 한참을 낑낑댄 것이 무안할 만큼 금세 불이 붙었다.
아니, 정말 무안했는지 송하가 말을 서둘러 돌렸다.
“아, 그, 오늘 저녁은 토끼 고기예요! 아까 잡아 왔어요.”
보통의 여인들이라면 귀여운 토끼가 안쓰럽다고 하거나, 마을에서 음식을 사 오자고 했을 테지만, 송하는 많이 달랐다.
입맛을 다시는 송하의 모습에 황보운룡이 기절해 있는 토끼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 틈에 송하는 자신의 어깨에 매달린 두 자루의 쌍검을 꺼내 들었다.
이내 그녀의 커다란 두 눈이 뚫어져라 두 개의 검을 바라봤다. 바로 송운이 천하무림대회에서 맹주에게 받은 그 검들이었다.
“……별로 좋아 보이지도 않은데.”
비검과 익검.
송운이 어차피 자신은 쌍검을 사용하지 않으니 가져가서 양조광에게 넘기든 보관을 하든 알아서 하라고 건네준 것이다.
비익검을 송하가 가져간다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기에, 그다지 큰 위험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가지라며 주는 걸 거절하기도 애매하고, 어쨌거나 좋은 검이라고 하니 탐이 나는 것도 사실인지라 받아 왔다.
하나 막상 받고 나니, 생각보다 무게만 무겁고, 딱히 쓸 일도 없었다.
그런 송하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황보운룡이 대신 답했다.
“그리 보여도 무림 역사상 제법 유명한 검입니다. 너무 막대하시면 검이 슬퍼할 겁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보운룡이 송하에게 한마디를 건넸다.
하나, 제대로 된 검을 만나 본 적이 없는 송하로서는 그 말이 이해가 전혀 되지 않았다.
송하는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심각한 표정으로 검을 다시 바라보았다.
“검이 슬퍼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어찌 한낱 검 따위가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일까.
우르르르릉! 콰광!
“어, 어어?!”
툭, 투둑-
그때, 마른하늘에서 엄청난 굉음이 나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