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6화
술이 제법 들어가서인지, 연하게 붉어진 얼굴에 그는 어딘지 모르게 화가 난 것도, 그렇다고 담담한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표정이 그려졌다.
“곤란한 일이라면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아무래도 무례를 크게 범한 것 같군요.”
“아닙니다. 송 소협이 하신 일도 아닌데, 화를 내서 무엇 하겠습니까.”
쭈웁-!
탁!
거칠게 따라진 잔을 마저 비워 낸 황보운룡이 잠시 한숨을 내쉰다.
그러곤 이내 무겁던 입을 열었다.
“……몇 해 전, 집에 큰불이 났습니다. 누군가의 습격을 받았고, 저항했지만…… 결과를 보니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같습니다?”
그 말은 추측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황보운룡이 자리를 비운 사이 가문이 습격당했고, 멸문했다는 것인가?’
특히 그 큰불이라는 게 마음에 내심 걸렸다.
의아한 마음에 송운이 되묻자, 황보운룡은 자조(自照)하는 표정으로 순순히 답했다.
“저는…… 당시 그 자리에 없었고, 전해 들은 것입니다.”
송운의 생각대로였다.
말하는 황보운룡의 눈동자와 목소리에 무척이나 씁쓸함이 담겼다.
“……그런 일이 있었구려.”
그러곤 곧바로 또 한잔을 따라, 한입에 털어 넣은 황보운룡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아무리 저희 황보세가의 세력이 약하다고는 하나, 아버지와 스승님의 무공은 정말 대단하셨습니다. 주변 일대에서는 견줄 만한 무인이 없었으니까요. 해서 처음엔 그 흉수가 마교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 굳이 평화로운 무림에서 명성도 크지 않은 우리 황보세가를 견제하기 위해 그런 사건을 저질렀다는 건…… 이해하기 힘들더군요.”
일전과는 달리 황보운룡의 목소리에 자부심이 가득하다. 그만큼 가진 애정도 얼마나 컸을지는 겪어 보지 않아도 훤했다.
“…….”
더불어 점점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송운 역시 입안이 까끌까끌해졌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이야기다.
송운과 평목단, 평서란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송가 역시 같은 꼴을 면치 못했을 사건.
그 외에도 몇 개의 사건들이 송운의 뇌리에서 겹쳐지면서,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설마 황보세가에도 흑야가 손을 뻗은 것인가? 그렇다면 놈들은 대체 얼마나 더 광범위하게 퍼져 있단 말인가!’
송운의 마음속이 세차게 요동친다.
어쩌면 이 역시도 그들이 벌인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황보 소협, 혹 마교라고 추측했던 연유가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소?”
그 질의에 제법 담담했던 황보운룡의 목소리가 조금 격양됐다.
“마기 비슷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간 흔적이 있었습니다. 하나, 기운이 짙지 않고 금세 끊기는 바람에 그 흔적을 더는 쫓지 못했습니다. 한데, 지금은 마교가 아닐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연유는?”
“송 소협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마교와 무림맹이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정도로 약해진 마교가 굳이 정파의 문파를 적으로 만들고 다녔을 거라는 생각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더는 그들을 쫓지 않을 생각이오?”
“그건 아닙니다.”
송운의 질의에 그가 단호하게 답했다.
“그걸 다시 찾기 위해 강호에 뛰어든 겁니다.”
동시에 황보운룡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음…….’
송운이 속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어쩌면 황보운룡도 흑야에 당한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데…… 저도 한 가지 여쭤 보아도 되겠습니까?”
“물어보시오.”
송운이 고개를 주억였다.
“송 소협께서도 몇 해 전 비슷한 일을 당하실 뻔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자세하게도 알아봤군.’
송운의 미간이 슬쩍 꿈틀거렸다.
“내 소문만 들은 게 아니었던 모양이오.”
송운의 말에 황보운룡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반은 사실이고 반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엔 소문으로 들었고, 후에는 사건과 관련된 정보를 제가 직접 알아봤으니 말입니다. 혹 기분 나쁘셨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계속해서 그의 태도와 행동을 유심히 지켜봤던 송운이기에 황보운룡의 말이 거짓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더불어 같은 아픔을 겪을 뻔한 이였다.
만일 송운과 과거에 맞닿았던 이였거나, 혹은 큰 사건으로 거론되어 그 흉사를 미리 알았더라면 어쩌면 그도 이번 생에서만큼은 그런 참혹한 경험을 겪지 않아도 됐으리라.
‘어쩌면 흑야의 새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겠군.’
마지막 잔을 들이켠 송운이 황보운룡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송하를 북경까지만 데려다주면 되오. 사례는 톡톡히 하도록 하지.”
“그러실 것 없습니다. 어차피 이곳저곳 세상을 떠돌아 볼 생각이었습니다. 그저 가는 길에 먹고 재워만 주시면 됩니다. 길동무도 생겼으니 가는 길이 지루하진 않을 테니 말입니다.”
“부탁하는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하기엔 염치없으나, 아직 철이 조금 덜 들었긴 해도, 마음은 깊은 아이오. 잘 부탁하오.”
* * *
“큰오빠! 나 저 사람이랑은 절대 안 갈 거야. 차라리 여기에 머물래. 오빠랑 있으면 안전하잖아. 응?”
송하가 두 눈망울을 반짝반짝 빛내며, 마치 상처 입은 사슴처럼 송운을 올려다봤다.
어릴 적부터 몇 번이나 저 눈망울에 속아 넘어갔는지 모른다.
하나 이번만큼은 송운도 절대 허락해 줄 수 없었다.
송하를 진정 사랑하고, 아끼기에 내린 결정이었으므로 무를 수 없었다.
“어쩔 수 없구나, 송하야. 이미 약조를 끝내고 오는 참이다. 이 오라비가 함께 가 줄 수도 없고, 운양상단은 앞으로 도착할 때까지 기한이 너무 오래 남았다. 더더군다나 너도 네 눈으로 직접 보았지 않느냐? 점점 혈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이러한 시점에 널 이곳에 계속해서 남겨 둘 수는 없구나.”
“그건 그렇지만…….”
“왜 그렇게 황보 소협을 싫어하는 것이냐?”
“그거야! 그, 그게…… 그러니까…….”
송운의 물음에 자신 있게 답하려던 송하가 말을 버벅인다.
‘정말 왜지?’
동시에 그녀의 두 볼이 발그레 물들었다.
막상 연유를 대려니 자신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와의 대결에서 진 것에 앙금이 남아서일까?
하나 무인이라면 응당,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맞았고, 그녀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황보운룡이 싫은 데에는 딱히 연유랄 게 없었다. 더구나 황보운룡은 대진이 끝나자마자 자신에게 찾아와 약까지 주고 간 사람이다.
심성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오히려 그가 자꾸 눈에 밟히고 신경이 쓰인다는 것이 맞는 듯했다.
그런 송하의 모습을 지켜보던 송운이 입가에 슬쩍 미소를 띠었다.
“이번 사건이 해결된다면, 내 반드시 너와 함께 강호행을 할 테니 이번만 이 오라비의 마음을 조금 이해해 주면 안 되겠느냐?”
송운의 걱정이 절절하게 묻어나오는 마지막 말에, 송하는 결국 고개를 주억일 수밖에 없었다.
“……그거 정말 약속하는 거지?”
“그래, 꼭 그러도록 하마.”
“치…… 알았어. 돌아가서 얌전히, 부모님 곁에 있을 테니까 오빠도 꼭! 다치지 말고 조심히 돌아와!”
휙-!
말을 마친 송하가 곧장 몸을 돌려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
“아무래도 둘이 서로 관심이 있는 듯하죠?”
곁에서 보고만 있던 평서란이 송하가 방을 나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큼, 뭐…… 한창 그럴 나이 아니겠소?”
“후후. 그런 거예요?”
평서란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고, 이에 송운이 평서란을 안아 들었다.
“어머!”
“그럼 우리도 오늘은 간만에,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갖는 게 어떠할까?”
“운 가가가 원하신다면요?”
훅!
평서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송운이 넘실대던 촛불을 손짓으로 껐고, 어둠이 몰려왔다.
스윽.
컴컴해진 방 안은 둘의 숨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동이 트는 대로 송하와 황보운룡이 무림맹을 떠났다.
이미 출발이 늦어진 감이 없잖아 있어 날이 밝기 무섭게 발길을 재촉한 것이다.
송하를 보내고 나서 송운은 곧장 무림맹주 백능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똑똑.
“들어오시게.”
안으로 들어가니 그곳에는 이미 백능과 제갈염이 함께 앉아 있었다.
거기에 며칠 만에 얼굴을 보는 담벽남도 있었다. 하나 그중에서 역시 가장 먼저 송운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백능이었다.
두 눈이 마주친 순간, 송운은 그 속에서 엄청난 무게감을 느꼈다.
백능을 마주한 것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번 천하 무림 대회가 끝나고 열린 연회에서 멀리서 스치듯 보았지만, 그때와는 많은 것이 달랐다.
백발이 성성한 게 무색할 정도로 백능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어마어마했다.
숨이 턱 막힐 만큼은 아니지만 거대한 석산(石山) 하나를 앞에 두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정말 엄청나군. 과연 괜히 무림맹주가 아니라 이건가.’
송운이 이런저런 생각을 할 무렵, 제갈염이 먼저 말을 걸었다.
“우선 자리에 앉으시지요.”
잠시 적응이 되지 않았으나 곧 이에 응했다. 공식적인 자리인 만큼, 제갈염도 평소와는 달리 송운에게 말을 높인 것이다.
송운이 자리에 앉자, 이번엔 백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소이다. 나는 무림맹주 백능이라 하오. 지난번부터 송 소협이 우리 맹의 일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많이 주었다고 들었소.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전하는 바요.”
송운이 황궁의 소속인 만큼, 무림맹주인 백능도 송운에게 하대를 하지 않았다.
전생이었거나, 자신이 계속 그저 송가의 송운이었다면 이런 대우는커녕 그가 앉을 자리조차 없었을 터다.
새삼 사회적인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달은 송운이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아닙니다. 제 말을 믿고 들어 주셨으니,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맹주님. 저는 황궁의 사신으로 온 송운이라 합니다.”
“서로 간단한 인사는 끝난 듯하니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합시다. 이야기는 대충 전해 들었소. 담 단주의 말로는 이번엔 뭔가 다르다고 하던데…… 사실이오?”
“그러합니다. 지금까지 혈교의 흔적을 쫓아 보았으나, 이렇게 많은 시신을 두고 간 적은 처음입니다.”
“하면, 혈교를 빙자한 다른 세력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라는 뜻이오?”
백능의 목소리에는 불신이 담겨 있었다.
확실하지 않다면 이 의견은 묵살하겠다는 뜻이다.
괜한 낭설에 무림맹이 흔들리게 둘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이것 역시 확실하게 단정을 지을 수는 없겠지만, 삼분지 이 정도의 확률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놈들은 무인도 무인이나, 지금까지의 흔적으로는 강시를 위주로 부대를 꾸렸습니다. 한데 그런 놈들이 갑자기 습격을 한 다음, 처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는 것은 이제 준비가 모두 끝이 났다고 경고장을 던진 게 아니라면, 혈교를 가장한 다른 무리가 무림맹에 압박을 가하기 위한 흉계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삼분지 이라…….”
백능의 시선이 제갈염에게 돌아간다.
이를 알아들은 제갈염이 곧바로 답했다.
“송 소협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여태껏 함께 조사를 펼쳐 봤으나 저 역시 이러한 경우가 처음입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우리에게 혼동을 주기 위한 적의 기만책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음…….”
양측의 말을 다 들어 본 백능이 고심이 짙게 밴 신음을 흘렸다.